제12화
드르륵- 드르륵-
나는 앞에서 느긋하게 달려오고 있는 마차를 마주보며, 슬쩍 옆에 무성하게 자라있는 수풀을 훑었다.
동굴을 떠나 알음알음 행인들에게 길을 물으며 북쪽 국경을 찾아가기도 어느덧 삼 주째.
애초에 길을 알고 있었더라면 굳이 번거롭게 이럴 필요가 없었을 텐데.
연합과 마왕군의 전선은 대륙 동쪽과 남쪽에 몰려있던 지라, 나로서도 대륙 북쪽의 지리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용사 시절 제국 수도에서의 훈련을 마치고 곧장 전선에 투입됐었으니까.
드그득- 득-
“거기 그렇게 길을 막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아, 죄송합니다. 북쪽 국경으로 가고 있는데 이 근처 지리를 잘 몰라서요. 혹시 길 좀 물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곧 멈춰 선 마차 앞에 다가가, 인상을 팍 찌푸리고 있는 마부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도 차마 웃는 낯에 침을 뱉을 수는 없었는지, 혀를 한 번 쯧 차고선 퉁명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이 길을 따라서 쭉 가면 에멜튼이라는 도시가 하나 나올 거요. 거기서 북쪽으로 마을을 세 개만 더 건너면, 국경에 딱 붙은 작은 촌락 하나가 있으니 그리로 가시오.”
“에멜튼에서 마을 세 개 말이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무얼, 뭐 대단한 정보도 아닌데.”
난 꽤나 자세히 길을 알려준 마부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면서도, 슬쩍 그의 뒤쪽에 보이는 마차를 훑었다.
이렇게까지 멈춰서 얘기를 나누는데 누군가 안에서 나올 기미도 없었고, 딱히 근처에 호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귀족도 아니겠고, 그렇다고 이름 있는 상인도 아닐 테고.
혼자서 돌아다니는 작은 행상인 정도 되려나.
딱히 털어도 뒤탈은 없을 거 같았다.
도움을 준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특이한 외모 때문에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마흔 남짓의 인원의 배를 채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젊은 사람이 병사도 아니고 국경에는 왜 가려는 거요? 지금 그쪽은 국경 근처 마을을 약탈하는 몇몇 수인 놈들 때문에 난리도 아닐 텐데.”
“하하… 그게, 사실은 의뢰 때문에 국경을 넘어야 해서 말입니다.”
“아, 용병이었소? 어쩐지, 허리춤에 뭔가 차고 있더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다시 말 위에 오르는 그를 씁쓸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댔다.
“왜 그리 멀뚱히 보시오. 아직 물어볼 게 더 남았… 컥!”
푹-
날붙이가 섬뜩한 소리와 함께 마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히이잉-!
툭-
뜨거운 핏물이 제 등을 적시는 느낌에 놀란 모양인지 앞발을 들며 크게 몸을 비틀은 말 위에서, 충격을 버티지 못한 시체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걱-
투둑- 툭-
그대로 날뛰며 마차를 이끌고 도망치려는 말의 목을 잘라낸 나는, 수풀 너머에 숨어 있던 놈들에게 손짓하며 마부의 시체를 들어올렸다.
“으음….”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이를 박아 넣으려던 나는, 조금만 더 가면 목덜미의 살갗을 찢을 수 있는 거리에서 흠칫 몸을 떨며 머뭇거렸다.
…젠장.
과거 인간으로서의 거부감이라도 남은 건가.
지금까지 잘만 흡혈해오다가 이제 와서, 고작 상대가 내게 딱히 해를 끼친 게 없는 무고한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콱-
꿀꺽- 꿀꺽-
“프흐… 으음… 퉷!”
나는 마치 밍밍한 음료처럼 무언가 한참 모자란 맛에 눈살을 찌푸리며, 나도 모르는 곳에 한줌 남아있던 인간성과 함께 삐쩍 말라버린 시체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래, 이놈들은 인간이 아니다.
애초에 나를, 우리를 이방인 취급하며 은연중에 함부로들 대하지 않았는가.
그 빌어먹을 연합이 마왕군을 상대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던 게 다 누구 덕분인데.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
[국경 출신의 가난한 행상인, ‘보만’을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로는 능력치가 증가하지 않습니다.]
비록 능력치조차 오르는 일이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갈증을 해결한 셈 치고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 내 손짓에 우르르 몰려나온 인원들이 마차를 숲속으로 옮기며, 남은 몇몇이 바닥에 남은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고생은 무슨.”
숲속으로 옮긴 마차에서 쓸 만한 물건을 골라내고 말의 사체를 해체하는 악마족들을 지나쳐 아이시스의 앞으로 걸음을 옮긴 나는, 조용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하늘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에릭, 길은?”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나오는 도시에서 북쪽으로 마을 세 개를 지나면 된다더군. 아마 일주일 안으로 도착할 거다.”
“일주일….”
“애들한테 해체 작업만 끝나면 바로 출발하자고 전해. 괜히 빈둥거리다가 혹시라도 어디 다른 곳에 따로 떨어진 악마족 놈들이 사고라도 쳐서 존재가 알려지기라도 하면, 일이 꼬일 수도 있으니까.”
“…응. 바로 전할게.”
기특한 녀석.
나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시스의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정찰대장인 그녀가 일개 정찰대원인 내 말을 이렇게 따르는 게 참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무언가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우고 있는 게 나밖에 없었기에 근처에서 불만이 나오진 않았다.
애초에 공적을 쌓을만한 작전을 입안한 것도 나였고, 그를 위해 국경으로 가는 길을 알아오는 것도 나였으며, 그간 이동하면서 필요한 물품들을 구하기 위해 도시로 들락날락거릴 수 있는 사람도 오로지 나뿐이었으니까.
하다못해 다른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도플갱어 같은 종족이 몇 놈 더 있었으면 모를까.
어째선지 악마족만 모여 있던 그들은, 적어도 지금으로선 완전히 나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중간에 몇몇 놈들이 작게나마 수군댄 적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발라크와 카렌의 심기 불편한 반응에 금방 쏙 들어가고 말았다.
“카렌, 본대가 넘어오기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했지?”
“…넉 달 조금 더 남았을 거다. 안에서 방해만 없다면 말이지.”
나는 이제는 어느덧 이름으로 불리는데 익숙해진 건지, 그에 대해선 별로 투덜대지 않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좀 까칠한 느낌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것까진 용족 특유의 오만함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있었다.
“방해라면 저번에 말한 그 온건파들 얘기인가?”
“그래. 잃을 게 많다고 평화에 찌든 암 덩어리 같은 놈들이지. 애초에 정찰대가 이렇게 제대로 된 구색도 못 갖춘 버림패 취급을 받게 된 것도 다 그놈들 때문이고.”
난 으드득 이를 가며 눈매를 날카롭게 좁히는 카렌을 보며, 전에 들었던 얘기들을 떠올렸다.
마왕군이 중간계를 침공하려는 가장 큰 이유가 자원의 부족 때문이라는 건 용사 시절에도 익히 알려진 얘기였지만, 모든 마족들이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었다는 것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자기 밥그릇이 걱정돼서 그런 같잖은 수작을 부리려는 놈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마족이 전쟁을 두려워하다니, 마계의 수치들 같으니라고.”
어느 순간 일곱 마왕의 세력이 각기 비등해지면서, 서로가 서로의 억제력이 되어버려 자연스레 마계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했던가.
문제는 그게 너무 길게 지속되면서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그에 따라 자원이 고갈되는 속도에 불이 붙었다는 거였다.
그렇기에 중간계를 침공함으로서 자원도 차지하고 겸사겸사 머릿수도 줄이려는 목적이었지만, 개중에는 딴 생각을 품는 놈들도 있었다고 했다.
“흐음….”
아무리 자원이 매말라고 있다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힘없는 노예와 평민들의 이야기일 뿐.
마계의 이권을 주름잡는 7대 종족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얘기였다.
그런데 중간계를 침공하겠답시고 전쟁을 일으키면, 당연하게도 이후에 나눠 먹을 파이를 생각했을 때 지휘관으로든 병사로든 반드시 출전을 해야만 했다.
이미 모자란 것 없이 배부른 상태에서, 굳이 위험부담을 안을 필요가 있을까 의문을 느끼고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모인 녀석들.
그게 바로 온건파였다.
“빌어먹을… 그놈들은 우리가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하기를 바라고 있을 거다. 만일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정찰대가 그 어떤 성과도 없이, 오히려 적에게 걸려 죽어나자빠지기만 했다면 그들에게 강한 발언권이 생기는 셈이니까. 생각보다 중간계는 위험한 곳인 거 같다, 조금 더 힘을 모아서 다음을 노리는 건 어떻겠냐. 좋을 대로 떠들어대겠지. 여태까진 명분이 없어서 전쟁을 준비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 되면 상황이 많이 달라질 거다. 최악의 경우엔… 군을 전부 해산시키고 그 책임을 져야 될지도 모른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분을 삭이는 카렌을 보며,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나름 정찰대랍시고 보낸 놈들이 하나같이 대부분 이렇게 쓸모없는 쭉정이들이었던 이유도, 그런 온건파의 입김이 들어갔기 때문이랬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부대를 보내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여론을 조성해보려고 한 것일 터.
“이 몸이나 아이시스, 저 계집처럼 마왕이나 공후작가의 자제가 몇 섞여있는 것도 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함이다. 부대로서는 이미 무언가 전공을 세우기 글렀으니, 개인의 능력이라도 출중한 이들을 보내서 여지를 만들어놓기 위함이었지.”
“그런데 정작 공을 세웠어야 할 너는 인간한테 노예로 붙잡혔고 말이지.”
“무, 무슨! 운이 안 좋았을 뿐이다! 설마 그 망할 온건파 놈들이 차원문 자체에도 손을 써놨을 줄은 몰랐다. 원래대로라면 못해도 백 명 단위로 끊어서 한곳에 모여 소환됐어야 하는 건데….”
나는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반박해오는 카렌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운이 없었던 건 사실이겠지.
그녀보다 못한 발라크조차 작긴 하지만 화전민 마을 하나를 혼자서 도륙을 냈을 정도니, 처음에 허무하게 잡히지만 않았더라면 꽤 그럴싸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을 테지.
실제로 그녀는 마왕군 본대가 넘어오고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연합군들 사이에서 지독한 악명을 떨쳤었으니까.
“에릭, 저기.”
옆에서 카렌과 이야기를 나누며 숲길을 걷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조심스럽게 내 옆에 붙어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아이시스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새하얀 성벽이 보였다.
에멜튼.
국경으로 가는 길에 남은 마지막 도시.
나는 맑은 하늘색 눈동자를 깜빡이는 그녀의 손을 떼어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다녀올 테니.”
“…응, 알았어. 역시 가이오스의 뱀파이어. 어쩌면 피를 가문의 수치라는 소문도….”
“음?”
“으응, 아니야. 프랭.”
“예, 예! 대장님!”
난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무어라 중얼거리는 아이시스를 보며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프랭에게 마차에서 건진 물건들을 건네받고선 성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남은 마을이 얼마나 작을지 모르니, 육포나 밀빵도 넉넉하게 준비하고 슬슬 염색약도 구해야겠지.
“정지. 신원과 도시에 들어가려는 용무를 밝혀라.”
“예, 저는 가….”
성문 앞에서 경비에게 검문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용병패를 꺼내 들려던 나는, 그의 허리춤에 둘둘 말려 끼어져 있는 종이들을 보고선 손을 멈췄다.
수배지인가?
“뭐하는 거지?”
“아, 그것이… 분명 패를 여기다 넣어놨는데….”
갑자기 멍하니 있는 나를 보고선 의심스러운 눈치를 보내는 경비를 보며 능청스레 프랭에게 받은 배낭을 뒤지기 시작한 나는, 흘끗 수배지에 적힌 내용을 훑었다.
…이런 젠장, 빌어먹을 파비앙 후작 녀석.
기어코 제국 전체에 수배를 때린 건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자그마치 금화 오백 개를 홀라당 먹고 도망친 데에다가, 삼천 개나 주고 산 노예까지 데리고 사라졌으니까.
그래, 그나마 초상화라도 안 그려진 게 어딘가.
어쨌든 미리 눈치 채서 다행이군.
하마터면 계획을 벌이기도 전에 성난 후작의 군대를 국경까지 끌어들일 뻔했다.
“아아… 신분패가… 아무래도 행상 중에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저, 죄송하지만 이거로라도 어떻게 좀….”
“안타깝지만 신분이 증명되지 않으면… 음?”
신분패가 없다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물리려던 경비는, 내 손바닥 위에 올라간 은화를 보고선 흠칫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크흠. 원래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곤란한 이를 그렇게 빡빡하게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들어가시오.”
“헤헤…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어쩔 수 없다는 듯 길을 비키는 경비를 지나쳐, 별 탈 없이 도시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쯧.”
어딜 가나 돈 좀 쥐어주면 신원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바로 들여보내주는 꼴이라니.
심지어 국경지대에 붙어있는 이 도시조차 이 모양이었다.
“속부터 아주 썩어문드러졌군.”
제국은 아직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에 즐거워하며 곧장 염료를 팔 만한 가게를 찾아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