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누구냐!”
“나, 나야. 프랭.”
“…프랭? 아직 순찰시간이 안 끝났을 텐데.”
남자, 프랭을 앞세워 동굴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곧 안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악마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안쪽이 넓은 모양이네.
하긴 그러니까 마흔이 넘는 인원이 이 한곳에서 지낼 수 있는 거겠지.
“그, 그게….”
“음? 그러고 보니 뒤에 누가….”
“반갑군.”
나는 우물거리는 프랭을 옆으로 치우고, 머리가 새파란 악마족 앞에 섰다.
“…인간? 아니, 뱀파이어로군.”
“그래. 이쪽에 악마족들이 모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지. 혹시 좀 들어가도 되겠나?”
“그야 물론이지. 그나저나 뱀파이어에 발록 그리고… 요, 용족? 으음, 참 다양하게도 뭉쳤군. 어쨌든 다른 종족도 살아있었다니 다행이구만.”
우리는 곧 그의 안내를 받아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임시방편들로 얼기설기 해놓은 수준이지만 여러 인원이 버틸 만한 준비는 충분히 해놓았군.
“저기 봐, 순찰대가 또 누굴 찾은 모양인데?”
“이번엔 동족이 아니네. 세상에, 용족도 있잖아?”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참 개성 있는 머리들을 슥슥 지나친 우리는, 금방 가장 안쪽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잠들어있던 새하얀 머리칼의 악마족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장님, 세 명이 새로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동족이 아닙니다.”
남자는 벽에 기대 누운 여인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어 깨웠다.
…대장?
그러고 보니 정찰대 중에 몇몇 그런 놈들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이 몸뚱이의 기억으로는 그냥 아무나 집어서 허울만 좋은 직책을 내려준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의외로 저들끼리 어느 정도 군기가 잡힌 걸 보아하니 그건 또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정찰대 안에서도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생각해보니 조금씩 마음에 걸리던 부분이 있긴 했다.
말은 정찰대라고는 하면서도 왜 정작 임무와는 전혀 동떨어진, 눈에 잘 띄는 종족들이 대원으로 들어가 있던 건지.
지금까진 단순히 버림패로 보낸 줄 알았기에 그러려니 하고 있었지만, 갈수록 무언가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 거였다면 애초에 마왕의 딸내미인 카렌과, 나름 쓸 만한 능력을 가진 발라크가 이곳에 낄 이유가 없었으니까.
뭔가 따로 노리는 거라도 있는 걸까.
아무래도 나중에 카렌한테 한 번 물어봐야겠군.
“아이시스 님?”
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여자를 보며 다시 흔들어 깨우는 녀석을 보고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아이시스라.
무언가 크게 활약한 게 있었더라면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건, 카렌처럼 한눈에 알아보기라고 했을 텐데.
전혀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니, 딱히 크게 써먹을 만한 녀석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파비앙 후작이 보낸 놈들한테 노예로 붙잡혀서 그랬다던가.
애초에 우리가 여길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카렌이 후작과 그의 가신들 사이에서 들었다던 소문 덕분이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아이시스.”
“아는 사람인가?”
“이 몸의 생일 때 성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다. 무뚝뚝하고 알게 모르게 재수 없는 여자였다.”
카렌의 생일에 마왕성에서 열렸을 파티에 초대돼서 갔을 정도라는 걸보면, 생각보다 고귀한 가문 아가씨라는 소린데.
그러면 보통 높은 작위의 가문 출신일수록 더 강한 가계능력을 가지는 악마족의 특성상, 그녀 또한 그리 약하진 않을 거란 얘기였다.
아무래도 전에는 운이 없었던 모양이군.
“으응….”
잠시 후 몸을 뒤척이며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맑은 하늘색 눈동자로 우리를 올려다봤다.
“…인간?”
가장 먼저 나와 눈을 마주친 아이시스는, 멍하니 앉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뱀파이어다.”
“뱀파이어….”
내가 이를 드러내어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이자,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주억이며 발라크와 카렌을 훑고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렌, 오랜만.”
“…흥. 멋대로 친한 척하지 마라.”
아이시스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린 카렌을 보며 한 차례 눈을 깜빡이고선, 우리를 데리고 온 악마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디서 만났어? 근처에 다른 사람들은?”
“순찰대가 발견한건 아니고, 저들이 우리가 여기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왔다고 합니다.”
“…소문?”
그녀는 남자의 대답을 듣고선 고운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금 우리를 쳐다봤다.
“그거, 어디서 들었어?”
“소문 말인가? 그거라면 카렌이 노… 읍.”
“도, 도시에서 들었다! 이 숲에 특이한 머리색의 수인들이 모여 산다… 으겍!”
나는 갑자기 내 입을 틀어막으며 횡설수설하는 카렌의 목덜미를 잡아채 발라크에게 던지며, 인상을 구겼다.
“네, 네놈! 갑자기 이게 무슨 짓….”
“조용히 해라. 저 여자에게 네가 인간한테 노예로 잡혀있었다는 사실을 다 말해버리기 전에.”
“읏, 큭….”
자기가 먼저 말하고 있는데 입을 막아놓고는, 오히려 성을 내려고 들다니.
괘씸한 놈.
확 한 번 더 물어버릴까.
나는 협박이 꽤 그럴싸하게 들어갔는지 입술을 앙 다물고선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카렌을 보며, 슬그머니 이를 드러냈다.
“흐익… 그, 미… 미안하다.”
나는 곧바로 몸을 움찔 떨며 시선을 내리까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아이시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문… 어떻게? 하지만….”
그녀는 아까 소문에 대한 얘기를 들은 직후부터, 계속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며 고민에 빠진 듯 보였다.
“…응. 결정했어. 떠나야 해.”
“떠나다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대장님?”
“이 동굴, 이제 안전하지 않아.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으니까, 인간들도 올 수 있어.”
“하, 하지만….”
“다들 짐 챙기라고 해. 한 시간 뒤에 출발해.”
“…예, 일러두겠습니다.”
나는 꽤나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는 여인의 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이쪽은 발라크랑 카렌과는 달리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양이군.
아무리 인간들이 쳐들어올 수 있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쳤다고는 해도, 나름 그럴싸하게 자리를 잡은 곳을 단번에 버리고 간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어디로 갈지는 정해놨나?”
“…아니. 하지만 언제 적이 올지 모르는 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어.”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동굴에 들어오기 직전에 나름대로 그럴싸한 계획을 짜놓긴 했어도, 어떻게 이놈들을 설득시켜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됐다.
마땅히 목적지도 없는 녀석들을 상대로 길을 잡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그것도 대가리가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놈이라면 더더욱.
“그러면 나한테 괜찮은 계획이 하나 있는데 어떤가. 잘하면 본대가 오기 전에 아주 큰 전공을 세울 수도 있는데 말이야.”
“…전공을?”
좋아, 물었군.
나는 곧바로 관심을 보이는 아이시스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실은 우리가 들었다는 그 소문 말이지. 아까 카렌이 말하다 말았다만, 이 델리안 숲에 특이한 머리색을 가진 수인들이 모여 산다는 내용이었거든. 그 말은 너희 악마족이 머리색만 잘 바꾼다면, 이 중간계에 사는 수인이라는 종족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가까이서 본다면 뭔가 확실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겠지만, 마족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싶은 지금이라면 아마 문제없이 속일 수 있을 거다.
뿔이 있는 수인족, 이를 테면 소 수인의 돌연변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겠지.
그마저도 조금 멀리서 본다면 그냥 특별할 것 없는 수인으로 인식하리라.
“수인?”
“그런 놈들이 있다. 짐승의 뿔이나 꼬리를 달고 있는 녀석들이.”
“…응. 그래서?”
“내가 도시에 몰래 숨어들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금 중간계는 크게 네 개의 종족이 세운 나라들이 땅을 나누어먹고 있다고 하더군. 인간, 엘프, 수인, 드워프. 듣자하니 다들 사이가 마냥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야. 특히 인간과 수인들은 지금 대륙 북쪽에 붙은 국경에서 종종 크고 작은 분쟁을 벌이고 있다더군.”
“…그 말은, 불씨를 피우자는 거?”
“바로 그거다. 너희가 아직은 조금 특이한 수인 정도로 보이는 걸 이용하는 거지.”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들은 이게 편하다니까.
아이시스는 내가 두 종족의 사이에 관한 얘기를 꺼낸 의도를 금세 알아챘는지, 눈에 이채를 띠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좋은 전략이야. 이이제이, 훌륭해. 그런데 어떻게 벌써 이런 정보들을?”
“방금 말했지 않나. 도시에 잠입해서 알아본 것들이라고.”
나는 짐짓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녀를 보며, 덤덤히 어깨를 으쓱였다.
실제로는 용사 시절에 같이 싸웠던 병사나 기사들에게 들은 내용들이었지만, 이 악마족이 그것까진 알 턱이 없었다.
“…대단해. 당신, 이름이 뭐야?”
“에릭 가이오스다.”
“에릭… 에릭 가이오스. 응, 기억했어. 대단한 뱀파이어.”
대단한 뱀파이어라.
나는 마치 억지로라도 외우려는 듯 내 이름을 되뇌며 옅은 웃음을 지어보이는 그녀를 보고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으음, 아무리 나라도 이렇게 본인 앞에서 대단하니 뭐니 얘기를 꺼내는 건 좀 낯부끄러운데.
“그럼, 북쪽으로 가서 인간 마을을 습격하면 돼?”
“그래. 물론 그전에 염색부터 해야겠지만 말이야.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주지.”
나는 품속에 금화가 그득하게 담긴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응. 역시 에릭, 대단해. 전공을 세우면, 1순위는 당연히 에릭의 몫.”
“음. 그렇겠지.”
계획대로만 잘 된다면 마을 한두 개쯤을 괴멸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인간과 수인 두 종족을 싸움붙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뒤에 제국 서쪽으로 가서 에리스, 그년의 동생을 잡아다가 엘프들까지 그 싸움에 끌어들이게 된다면, 본대가 넘어오기도 전에 이미 세 종족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혀놓을 수도 있을 터.
그렇게만 된다면 훗날 정벌 이후, 공적을 써서 그 빌어먹을 연합의 수뇌부 놈들을 노예로 받을 수 있으리라.
“흐흐….”
생각만 해도 찢어질 듯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고귀한 연놈들의 입에서,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테지.
“형님,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린 우리대로 따로 할 일이 있지.”
악마족들이 수인 행세를 하며 인간들의 영토를 휘젓는 동안, 나는 발라크와 카렌을 데리고서 수인족들의 마을을 덮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을 로브라도 하나 사다가 씌워서 모습을 좀 가려야겠지만, 내가 인간인 척 모습을 드러낸다면 같이 행동하는 두 사람도 당연히 한패라고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터.
그렇게 서로 종족간의 골을 쌓고 쌓은 뒤, 결정적인 순간에 방아쇠를 당겨주면 되리라.
“대장님, 모두 떠날 채비를 끝냈습니다.”
“응, 잘했어. 그럼 바로 출발. 북쪽으로 갈 거야.”
“북쪽… 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준비를 마친 악마족들을 데리고서 동굴을 나서는 아이시스를 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조금만 기다려라, 에리스.
이쪽부터 금방 끝내고 갈 테니까 말이야.
인간도 수인도, 이번에는 전처럼 그렇게 쉽게 연합할 수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