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잘했다, 발라크.”
“감사합니다, 형님.”
후작의 병사들을 피해 산속으로 도망친 우리는, 그들의 눈에서 벗어나 동굴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우읍, 푸하! 네놈, 도대체 언제까지 입을 틀어막고 짐짝처럼 들어서 옮기려는 거냐! 이 몸도 발이 있다!”
나는 동굴 벽에 기대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방금 전까지 계속 발라크의 어깨에 들쳐 매어있던 용족을 바라봤다.
굳이 힘들일 필요 없이 대신 산을 올라줬는데 뭐가 그리 성이 났는지, 녀석은 고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발라크는 그러건 말건 그녀의 말은 무시한 채, 고개를 숙이며 이죽거릴 뿐이었다.
발록은 강자를 존중하는 만큼 그들에게 인정받는 것 또한 최고의 가치 중 하나로 친다고 하니, 자기가 형님으로 인정한 내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큰 녀석이 부끄러움을 타는 모습은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무례한 놈,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 몸은 시기의 마왕, 카르카쉬 레비아탄의 독녀. 카렌 레비아탄이란 말이다!”
나는 몸에 묻은 흙과 나뭇잎을 털어내며 투덜대는 그녀를 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해라. 네가 용족이든 마왕 딸내미든, 뭐가 됐던 고작 인간 놈들한테 잡혀서 노예로 살고 있었던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뭐, 뭣? 네놈, 일개 뱀파이어 주제에….”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용사 시절 들었던 미치광이 붉은 용에 대한 얘기는 오로지, 눈에 보이는 건 뭐든 흔적도 없이 부수고 다니는 파괴 신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보니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아가씨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그 아가씨가 터무니없이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거였지만 말이다.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인간 놈들을 그대로 두고 도망친 것만 해도 아직 화가 안 풀리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대로 두면 본대가 넘어오기도 전에, 이 썩을 용족 때문에 분명 무슨 사단이 날 것만 같았다.
“어쩌면 평생을 인간의 노예로, 그것도 언젠가 노리개로 전락할지도 모를 녀석을 위험부담까지 안고서 구해줬거늘. 넙죽 엎드려서 감사하다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자꾸 시끄럽게 앵앵대는 꼴이라니. 발라크.”
“예, 형님.”
“잡아.”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싸가지 없는 용족 공주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뭐, 뭐냐! 이거 놔라! 이… 읍!”
“쉿. 조용히 해. 다시 이대로 구속구를 채우고 그 도시 앞에 버리고 오기 전에.”
“흐읍….”
이제 좀 조용해졌군.
하지만 벌은 받아야겠지.
아무리 마왕 딸내미라고 해도, 다음에 또 다시 이렇게 기어오르지 않도록.
“으읍, 으으읍!”
나는 발라크의 손에 잡힌 채로 발버둥 치는 카렌의 목에다 날카롭게 세운 이를 박아 넣었다.
“흐으, 흐으으….”
푸슛-
이빨이 연약한 피부를 뚫고 혈관을 찢어내자마자 달콤한 핏물이 훅 튀어 올라 입천장에 부딪혔다.
이게 용족의 피…
단언컨대 여태까지 맛본 모든 음식들 중에서 단연 최고로 칠 수 있을 만큼 진한 달콤함이 입안을 맴돌았다.
꿀꺽-
“아으, 흣… 히이이….”
“형님, 이제 그만… 형님!”
입술에 닿은 살결이 애처롭게 부르르 떨리며, 따뜻한 액체가 자꾸만 내 볼을 치고 내려갔다.
“스읍….”
나는 계속 마시고 싶다는 욕구를 가까스로 끊어내고서 이를 빼냈다.
“에윽….”
카렌의 얼굴은 이미 숨넘어가기 직전의 사람처럼 망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아마 내 볼에 흘러내렸던 걸로 보이는 눈물에, 콧물과 침까지 아주 범벅이었다.
툭-
그렇지 않아도 늘씬했던 몸이 이젠 아주 삐쩍 말라보일 정도로 피가 빨린 카렌의 몸뚱이가 힘없이 떨어졌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녀의 얼굴을 보자니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용족이니만큼 한 번 푹 쉬고 일어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철없는 용족의 공주, ‘카렌 레비아탄’을 흡혈했습니다.]
[대상의 모든 피를 마시지 않아, 흡혈의 효과가 감소합니다.]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힘이 ‘1’ 증가합니다.]
[마력이 ‘10’ 증가합니다.]
차가운 동굴 바닥에 쓰러진 채 움찔대는 카렌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것도 잠시, 눈앞에 주르륵 떠오른 메시지들을 보자니 금세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었다.
그 맛만큼이나 너무나도 달콤한 보상에,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다시 이를 박아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9]
[힘 : 38] [민첩 : 32][체력 : 40][마력 : 27]
나는 단번에 20을 넘어 어느덧 30에 가까워진 마력을 보며, 기분 좋게 벽에 등을 기대었다.
“발라크.”
“예, 예….”
카렌이 흡혈을 당하고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선 트라우마라도 떠오른 걸까.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흠칫 몸을 떠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한데 망 좀 봐라.”
“예, 예! 형님.”
빌어먹을 후작 놈.
그나마 묽어 보이는 스프에도 더럽게 독한 걸 넣어놨네.
나는 슬슬 저릿저릿 독이 들기 시작하는 몸에 힘을 풀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 * *
“카렌, 여기가 확실한가?”
발라크를 미끼로 파비앙 후작에게서 카렌을 구출해 도망친 지도 어느덧 열흘째.
흡혈의 충격에 꼬박 하루를 넘겨서야 정신을 차린 녀석을 데리고, 그녀의 안내에 따라 다른 마족들이 모여 있다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긴 지도 벌써 아흐레가 다 되어갔다.
“…확실하다. 그 빌어먹을 인간 놈이 특이한 노예들을 모으겠답시고 자기 가신들을 데려다가 수집한 소문들 중에, 분명 델리안 숲에서 형형색색의 머리칼을 가진 뿔 달린 수인들이 모여 산다는 얘기가 있었으니까. 그보다 네놈, 그렇게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지 않았느냐!”
형형색색의 머리칼이라.
거기에 뿔까지 달렸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악마족들이 모여 있는 모양이었다.
가진 머리색에 따라 대충 능력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7대 종족 중에선 그나마 가장 상대하기 쉬운 놈들이었지.
물론 그것만 믿고서 연합이 녹색 머리칼의 사천왕을 잡기 위해 화속성 마법에 능한 용사들을 모아 보냈다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수속성 마법에 쪽도 못쓰고 대부분이 시체가 됐던 일이 있었지만 말이다.
멍청한 연합 놈들.
제대로 적을 살피지도 않고, 염색한 놈의 머리색만 보고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다니.
정말이지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뭐, 덕분에 이번엔 내가 그걸 써먹을 수 있게 됐지만.
“알았다, 카렌. 솔직히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한 번 기회를 주는 셈 치지. 발라크, 혹시 그쪽에 악마족이 보이면 바로 말하도록.”
“예, 형님.”
“그러니까, 아까부터 함부로 이 몸을 이름으로… 히익!”
나는 숲을 거닐던 도중 발걸음을 확 멈추며, 카렌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부, 부르면 안 되지만… 정 부르고 싶으면 하, 한 번쯤은….”
“찾았다.”
난 마치 겁이라도 먹은 듯 혼자 몸을 수그리며 무어라 중얼대는 카렌을 옆으로 치우고, 울창하게 솟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인영을 향해 다가갔다.
부스럭-
“거기.”
“흐어어억! 까, 깜짝이야! 누구냐!”
순찰이라도 돌고 있었는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주변을 살피던 녀석은, 갑자기 수풀을 제치고 옆에서 나타난 나를 보고선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보면 모르나. 뱀파이어다. 이곳에 악마족들이 모여 산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는데, 다른 놈들은 없나?”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며,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 눌렀다.
그래, 정찰대에 뽑힌 놈들은 원래 이런 놈들이었지.
최근 발라크와, 조금 못 믿음직하지만 나름 마왕의 혈통인 카렌하고만 같이 다니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배, 뱀파이어… 후우, 다행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조금 떨어진 동굴에 모여 있어. 그나저나 우리들 말고 다른 녀석들도 살아 있었구나.”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부스슥-
“으아악! 이, 이번엔 또 무슨… 요, 용족?”
“다른 녀석들도 살아 있었냐는 건 무슨 소리냐! 혹, 다른 정찰대원들이 모두 죽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뒤늦게 발라크와 함께 수풀을 넘어온 카렌은 다짜고짜 남자의 멱살을 잡고선 흔들어댔다.
“그만. 그러면 누가 대답을 할 수 있겠어.”
“으… 안 된다. 병력을 모두 잃었다간 아버지를 뵐 낯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 노예로 잡혀있던 주제에, 무슨 이제 와서 지휘관이라도 되는 척 쓸데없는 걱정을 한단 말인가.
나는 제 머리를 쥐어 싸매는 그녀를 뒤로 물리고, 어지러운지 자꾸만 몸을 흔들거리는 악마의 앞에 섰다.
“설명해라.”
“아… 그, 그것이….”
이어진 그의 말을 정리하자면 간단했다.
새하얀 머리를 가진 악마족이 자신을 포함해 근처에 있던 동족들을 모아서 작지만 군을 이루었고, 다들 이 숲을 거점으로 혹시나 근처에 있을 다른 마족들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벌써 보름째 저희 악마족들 말고는 아무도 보이질 않아서… 혹시 다들 어떻게 된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긴 차원문을 이용해 중간계로 넘어오면 어느 정도 떨어질 줄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도시 몇 개를 낄 정도로 멀어질 줄은 몰랐겠지.
그런 상황에서 며칠을 찾아도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그래. 아, 혹시 지금 너희 악마족이 총 몇 명이나 모인 거지?”
“그… 오늘 아침까진 마흔두 명이 모였었습니다. 오늘은 또 누군가를 찾았을지도 모르고요.”
마흔둘이라.
썩 괜찮은 수였다.
마침 머리색만 어떻게 한다면 얼추 수인처럼 생긴 놈들이기도 하니, 꽤 괜찮게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용사 시절, 연합을 이루기 전에는 제국 북쪽에서 수인들과 꽤 잦은 분쟁이 있었다고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이제 그 동굴이라는 곳으로 안내해라.”
“예, 예!”
난 남자를 앞세우고선 천천히 뒤를 따라 걸으며, 머릿속으로 세세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이거, 잘하면 서로 크게 한 번 싸움을 붙일 수도 있겠는데?
“저… 바로 저기 보이는 동굴입니다.”
“음.”
나는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고선 저 앞에 보이기 시작하는 동굴을 가리키는 그를 보며,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지.”
“예, 형님.”
“…망할, 멋대로 이 몸에게 명령이라니.”
난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어느새 도착한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훗날 끈끈하게 뭉쳐야 할 연합의 사이를 시작부터 삐걱대게 만들, 너무나 달콤한 복수를 떠올리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