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좋아. 그럼 슬슬 계약 얘기로 들어가 보는 게 어떤가.”
“큭… 죽여 버리겠다! 네까짓 놈, 이것만 풀면….”
후작은 목줄을 잡아당기며 씨익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뒤에서 마왕 따님이 표독스러운 얼굴로 죽일 듯이 그를 노려봤지만, 오히려 그런 반응을 즐기는 듯 입 꼬리가 더 위로 솟았다.
“물론이지요.”
찰그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슬을 잡아당기면서 발라크에게 눈짓을 줬다.
여기까지 그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를 박박 갈고 있는 철없는 여인에게 한 번, 그녀의 시선을 받아주며 삐뚤어진 웃음을 짓고 있는 후작에게 한 번.
난 이 모자란 발록이 알아서 내 뜻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고개를 슬쩍 저었다.
혹시나 저 복수심에 불타는 용족이 괜한 사단을 일으키지 않기를 말려주는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래, 얼마를 원하나. 금화 백 개? 이백 개?”
“오백 개 어떻습니까. 저 뿔만 달린 노예도 삼천 개를 주고 사셨다지요? 비록 이쪽은 칙칙한 남정네긴 해도, 날개까지 달려있으니 말입니다.”
“으음… 오백?”
나는 순간 후작의 입 꼬리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선 속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좋아, 걸렸군.
“뭣하면 나중에 귀부인들께 파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 커다란 덩치에 튼튼한 몸을 보십시오. 생긴 것도 썩 나쁘지 않으니, 분명 괜찮게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좋네. 그럼 오백 개로 하지. 데겔!”
“예, 후작님.”
후작은 눈가를 좁히며 슬쩍 불편한 낌새를 드러내면서도, 사람을 시켜 돈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자네, 이것도 인연인데 여기서 하룻밤 머물고 가는 건 어떻겠나. 마침 저녁때가 됐기도 하고, 내 저 노예를 사는 김에 도대체 놈을 어떻게 잡은 건지 얘기를 좀 듣고 싶은데 말이야.”
그는 집사가 잠시 방을 나간 사이, 사람 좋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은 그저 얘기를 듣고 싶다고 하지만, 실상은 주제 넘는 금액을 입에 담은 나를 몰래 죽이고 노예만 꿀꺽하려는 속셈이겠지.
제국의 후작인 그에게, 그럴싸한 뒷배도 없는 용병 하나 치우고 먹을 것만 날름 삼키는 건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닐 테니까.
이런 일이 있기에 파벨이 내게 용병 길드를 통해 거래하기를 권했던 것일 테지만, 오히려 나로서는 바라마지않던 일이었다.
“하하, 저야 영광이지요.”
설마 식사자리까지 노예를 데리고 들어오진 않을 테니, 적어도 그 동안은 발라크가 편하게 일을 치를 수 있으리라.
똑똑-
“후작님.”
“그래. 어서 손님께 돈을 지불하게.”
차르르륵-
나는 곧 집사가 가져온 주머니를 건네받고선, 대강 눈대중으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온통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금화가 안을 수북하게 채우고 있었다.
“하하하! 아주 좋습니다. 자, 받으시지요. 후작님.”
난 탐욕스러운 미소와 함께 주머니를 챙기며, 구속구와 연결된 쇠사슬을 후작에게 건넸다.
“크흠, 따로 개수는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겠나?”
“저 같은 무지렁이가 어찌 후작님을 의심하겠습니까.”
“허허, 그것도 그렇구먼. 그럼 슬슬 저녁이나 먹으면서 얘기 좀 들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자, 어서 가시지요.”
나와 후작은 그길로 그의 방을 빠져나가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마다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감춘 채로.
* * *
“젠장… 젠장, 빌어먹을!”
흔히들 버림패라고 부르던 정찰대에 나선 것까진 좋았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쓸모없는 놈들로만 채워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랬다가는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사실에 의욕을 잃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는 아버지의 말에, 내가 그들을 이끌겠노라고 한 걸 후회하진 않았다.
나는 고고한 용족.
여타 다른 마족들과는 달리, 태생부터가 고귀한 최강의 종족이었다.
그만큼 중간계에 떨어져서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고, 일족을 마주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전공을 세워 올릴 각오가 되어있었다.
빌어먹게도 바로 수십 명이나 되는 인간들 사이에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노예로 붙잡혀 치욕을 겪을 일은 없었을 텐데.
하다못해 조금만 거리가 있었어도, 평소 매사에 무심한 아버지께 유일하게 인정받았던 마법으로 놈들을 찍어 누를 수 있었을 텐데.
콰앙-!
나는 마치 새장처럼 나를 가두고 있는 철창을 걷어차며 울분을 토해냈다.
씹어죽일 놈들.
여기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가만히 좀 있어라. 그러다 놈들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네놈은 화도 나지 않는 거냐! 하찮은 인간 놈들한테 붙잡혀서, 이렇게 노예로 사는… 어?”
무식하게 덩치만 큰 발록 놈.
마치 마계의 흡혈귀 놈들이 떠오를 정도로 창백한 인상의 남자에게 붙잡혀 팔려온 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어찌된 일인지 온몸을 묶고 있던 구속구를 벗고서 철창을 나온 놈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네, 네놈… 어떻게….”
“시끄럽다. 그리고 네놈이 아니라 발라크, 하찮은 인간이 아니라 에릭 형님이다.”
끼기기긱-
녀석은 무어라 투덜대며 우악스러운 손길로 날 잡아두고 있던 철창을 구부렸다.
“나와라, 시간이 없다. 형님께서 그 우두머리 인간을 붙잡고 계시는 동안, 우린 빨리 이곳을 빠져나간다.”
철컥- 툭-
놈의 솥뚜껑만 한 손이 내 몸을 스칠 때마다, 갑갑하게 내 몸을 감싸고 있던 구속구가 벗겨져 나갔다.
…정말, 이렇게 쉽게?
나는 점차 몸에 마력의 흐름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환희를 지었다.
항상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삼엄한 경비와 도저히 혼자서는 풀 수 없는 구속구 때문에 반쯤 포기하고 있던 찰나에 이런 기회가 올 줄이야.
“하, 하하! 아하하핫!”
당장 죽여 버리겠어.
나는 주먹을 꾹 쥐며 그 빌어먹을 인간 귀족 놈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히 이 몸을 관상품 취급하며 철창에 가둬놓고, 그걸로 모자라서 틈만 나면 불러다가 음흉한 눈길로 훑다니.
그 녀석뿐만 아니라, 그 옆에 있던 망할 자식들 전부 제 입에서 제발 죽여 달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괴롭혀주겠어.
“거기, 발록. 네놈도 어서 나를 도와서 이 저택의… 읍!”
“발록이 아니라 발라크. 그리고 조용히 하라고 했다. 게다가 지금 네 시답지 않은 복수를 도울 여유 따윈 없다.”
“우웁! 우으으읍!”
이 무식한 발록 놈이!
나는 제멋대로 내 입을 틀어막은 녀석의 손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오히려 더 힘을 주어 얼굴을 콱 잡아채는 놈을 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게 같은 마족이라고 해서 봐줬더니 내가 누군지 알고…
으득-
“커헉!”
“함부로 마법 쓰지 마라. 네가 함부로 복수심에 소란을 피우면 우리는 물론이고 형님께서도 곤란해지니까.”
이, 이 자식… 진짜로 쳤…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과 함께 머리를 찡하게 울리는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다.
진짜,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발록 놈들…
“조용히 나가는 길만 가리켜라. 그렇지 않으면… 아쉽지만 죽이는 수밖에. 아무리 같은 마족에 용족이라고는 해도, 너 때문에 나와 형님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 녀석, 진짜로 죽일 작정이야…
나는 슬쩍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그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간다.”
드르륵-
“자, 잠시만… 으읍!”
나는 곧바로 창문을 열어젖히고선 곧장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놈을 보고선 기겁을 하며 말리려고 했지만, 녀석은 다시금 내 입을 틀어막고선 망설임 없이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남한테 들키지 않고 도망치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던 건가?
아래에 정원사든 뭐든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나가다니.
쿵-
“어느 쪽이냐?”
“…왼쪽이다.”
나는 바닥에 착지하기가 무섭게 방향을 묻고선 곧장 그리로 달려가는 놈을 보며,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걸 느꼈다.
다행히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이게 정말로 몰래 도망치려던 놈의 행동이 맞단 말인가?
에릭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 형님이라는 놈도 참 대단한 놈이군.
이런 녀석을 데리고 인간 귀족 놈을 속이려 들어왔다니.
* * *
“자, 어서 들게나.”
나는 눈앞에 놓인 고급스러운 식기와 음식들을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망할 놈, 먹을 수도 없는 걸 참 빌어먹게도 먹음직스럽게 내놨군.
“왜 그러나. 혹 음식이 별로인가?”
“하하… 아닙니다. 그저 잠시 넋을 놓았을 뿐입니다. 전부 무척 맛있어 보이는군요.”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고기 위에 뿌려진 소스에서 희미하게 알싸한 냄새가 풍겼다.
마비독인가.
그렇게 강한 놈은 아닌 거 같았지만, 지금 이 신체로는 한 입만 들어가도 한 시간조차 버티지 못하리라.
나는 그나마 가장 약해보이는 스프를 한 숟갈 뜨며 후작이 눈치를 살폈다.
“흠흠.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그보다 이제 얘기를 좀 듣고 싶은데.”
“아, 물론이지요. 어디 보자… 어디서부터 말씀드리면 좋을까요.”
지금쯤이면 발라크가 용족을 데리고 도망쳤으려나.
나는 내가 후작과 함께 방을 떠난 직후, 발라크를 데리고 나온 집사가 어딘가로 향했던 방향을 흘끗 바라보았다.
“먼저 웬 뿔과 날개가 달린 특이한 이종족이 화전민 마을 하나를….”
똑똑-
“아, 잠시만 기다려주게. 무슨 일인가!”
“저, 후작님. 그것이….”
나는 밖에서 누군가 안절부절못하며 후작을 부르는 것을 보고선, 속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성공한 모양이군.
“…미안하군. 잠깐 자리 좀 비우겠네. 일단 배라도 좀 채우고 있게나.”
난 곧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하는 그를 지켜보다,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노예들이 도망을 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드르륵-
다행히 발라크가 일을 잘해준 모양이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열린 창문으로 몸을 내던졌다.
“이… 설마, 이 용병 놈이… 어억?”
탁-
그대로 잘 가꾸어진 정원 위로 떨어진 나는, 곧장 저택 밖을 향해 달렸다.
뛰기 직전, 당황한 후작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귓속을 맴돌았다.
“자, 잡아! 당장 저놈을 잡아라!”
“예, 예!”
그는 뒤늦게 기사와 사병들을 풀었지만, 그땐 이미 내가 저택을 둘러싼 철책 앞에 다다른 뒤였다.
“멍청한 놈.”
그러게 구속구가 잘 차여있었는지 꼼꼼히 확인했어야지.
뭐, 그 난폭한 놈이 거칠게 다뤄도 얌전히 있으니 당연히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형님, 이쪽입니다!”
“그래. 잘했다, 발라크.”
나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발라크의 손을 붙잡고 철책을 넘어섰다.
“이… 네놈! 이런다고 네까짓 게 도망칠 수 있을 줄 아느냐? 대륙 끝까지 쫓아가 주마!”
“오냐. 기다리고 있겠다.”
“으아아아악!”
대륙 끝까지 쫓기는 무슨.
끽해야 현상금이나 거는 게 전부일 거면서.
나는 철책 뒤에서 잔뜩 얼굴을 붉힌 채 괴성을 터트리는 후작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당분간 이 근처에서 용병패를 쓰기는 힘들겠군.
기껏 따놨는데 조금 아쉽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