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8화 (8/200)

제8화

[질투심 많은 용병, ‘하빕’을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흐으….”

나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라붙은 시체를 구석에 던졌다.

툭-

이미 구석에 산처럼 쌓여 천장에 닿을 듯한 시체들 앞에 던져는 미라는, 힘없이 바닥에 붙어 축 늘어졌다.

“히익, 히이이… 도, 도망….”

옆에서 발라크에게 잡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용병이 겁에 질린 채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어딜 가려는 거냐.”

“으, 컥!”

물론 한 걸음 떼기도 전에 목을 잡혀서 내게 보내졌지만 말이다.

“아, 악마… 이, 이 미친 살인귀… 노예가 아니라 둘이 한통속이었다니!”

“이제 와서 그걸 알면 뭐가 달라지나? 그러게 왜 남의 물건을 탐내고 그래. 가만히 있었으면 이렇게 잡힐 일도 없었을 텐데.”

나는 나와 구속구 없이 자유롭게 풀려있는 발라크를 번갈아보며 분을 터트리는 녀석을 보고선, 삐뚤어진 미소와 함께 놈의 목에 이를 박아 넣었다.

“아, 아아아….”

꿀꺽- 꿀꺽-

따뜻한 피가 달큰한 맛과 함께 목구멍을 지났다.

이걸로 오늘만 해도 벌써 여섯 명 째.

남의 것을 빼앗아 한탕 해먹으려는 놈들이 왜 이리 많은 건지.

뭐, 나야 편하게 강해질 수 있으니 좋지만.

[한탕주의 용병, ‘첸’을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민첩이 ‘1’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형님, 전부터 궁금했는데 배 안 부르십니까?”

“그럭저럭. 흡혈한다고 해서 다 배로 들어가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

정확히는 들어가자마자 영양소가 되듯이 분해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한 번에 많은 양의 피를 한 자리에서 흡혈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9]

[힘 : 37] [민첩 : 32][체력 : 40][마력 : 17]

나는 꽤나 그럴싸해진 상태창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하나 같이 몸만 쓰는 용병들이라 그런지 아무리 흡혈을 해도 마력이 하나 오르지 않은 건 좀 아쉬웠지만, 지금 당장은 마땅히 쓸 수 있는 마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았다.

이 몸뚱이의 기억에 의하면 뱀파이어는 어느 정도 강함을 갖췄을 때 스스로 박쥐화나 혈마법을 터득할 수 있다고 하니 언젠간 마력이 필요한 순간도 오겠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참 편리하군.

그저 성장할수록 알아서 깨우치듯 능력을 쓸 수 있게 된다니.

이것도 어찌 보면 드워프들이 처음 보는 도구들도 어지간한 장인급으로 다룰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 걸까.

“형님, 그런데 그 귀족 인간은 언제쯤 온답니까?”

“벌써 사흘이나 지났으니 곧 오겠지. 그렇지 않아도 그저께 후작의 마차가 자기 영지에서 출발했다고 하니까, 어쩌면 번거롭게 할 필요 없이 바로 후작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어제 용병 길드에서 파벨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며, 쭈글쭈글 말라비틀어진 시체를 또 구석에 던졌다.

똑똑-

“저… 손님. 누가 아래에서 손님을 찾고 있습니다요. 딱 보니까 옷차림이 어디 귀족 나리 아래에서 일하시는 분 같던데….”

왔군.

“예. 금방 내려간다고 전해주십시오.”

나는 주섬주섬 시체들의 품을 뒤져 꺼내놓았던 은화와 동화들을 챙긴 뒤, 발라크를 바라보았다.

“뭐해, 빨리 구속구 안 쓰고.”

“예? 아, 예!”

띨띨하긴.

뭐 그래도 그만큼 다루기 쉬우니까 됐나.

나는 내가 눈치를 주고 나서야 허겁지겁 스스로 구속구를 차기 시작하는 녀석을 바라보다, 곧 시체들을 차곡차곡 마대자루에 담아 꽉 묶어서 문 옆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아, 나오셨습니까? 지금 바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대충 무슨 용무로 절 찾은 건지 예상이 가는데… 그동안 방 잘 썼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화덕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예? 화덕 말씀이십니까?”

난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종종 아침으로 직접 구운 빵이 나왔던 것을 떠올리며, 슬쩍 마대를 들어올렸다.

“태울 게 좀 있어서 말입니다.”

“그, 하지만….”

“물론 맨입으로 빌려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짤그랑-

“…1층으로 내려가시면 구석에 주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 있을 겁니다. 다만 너무 오래는 안 됩니다.”

나는 여관주인에게 은화를 두 개 쥐어주고선, 사슬을 끌고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오늘도 빵을 굽고 있었나보군.”

바로 구석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화덕을 발견한 나는, 들고 있던 마대자루를 불길 속으로 집어던졌다.

시체들 모두 흡혈로 인해 바싹 말라붙어있던 덕분인지, 금세 재가 되어 마대가 폭삭 주저앉았다.

이걸로 뒤처리도 완벽하군.

나는 곧 마대자루까지 전부 타버려 없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선, 천천히 여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쪽이 절 찾으신 분 맞습니까?”

저쪽인가.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딱 봐도 나 집사요 하고 티를 내고 있는 사람이 하나 보였다.

“예, 반갑습니다. 전 파비앙 후작님을 모시고 있는 데겔이라고 합니다. 듣자하니 귀인께서 아주 특별한 노예를 데리고 계신다던데….”

귀인이라.

후작가의 집사, 그것도 후작이 직접 이렇게 보낼 정도라면 적어도 평민은 아닐 테고.

남작이나 자작가의 자제들 중에 후계서열이 뒤로 밀려난 이들 중에서 뽑았을 테니, 못해도 귀족은 될 텐데.

아무리 후작이 시킨 일이라고는 해도 일개 용병을 그리 높게 불러주는 걸 보면, 일전에 무언가 언질을 좀 받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무슨 수를 써서든 꼭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하던가 하는, 그런 것 말이다.

이거, 굳이 귀찮게 기 싸움 할 필요도 없겠어.

나는 슬그머니 내 뒤쪽에 얌전히 서 있는 발라크를 살피는 그를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자그마치 혼자서 화전민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놈이지요. 이놈을 잡으려고 동료가 둘이나 당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군요.”

“윽….”

차르륵-

나는 일부러 보란 듯이 발라크의 몸이 순간 휘청거릴 정도로 세게 사슬을 잡아당겼다.

“으음, 확실히. 지금껏 전혀 본적 없는 종족이로군요. 뿔이 달린 걸 보면 수인인 거 같긴 한데, 날개를 보아하니 돌연변이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마을 하나를 지워버렸다는 녀석치고는 굉장히 얌전하군요.”

“하하. 한 번 보기 좋게 눌러주니까 더는 대들지 않더랍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놈을 이리 노예로 끌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난 일말의 반항조차 하지 않는 발라크를 보며 신기해하는 그를 두고선, 슬쩍 입구 앞에 놓인 마차를 확인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놈을 보고 찾아오셨다는 건 아무래도 이 녀석을 구매하시려는 모양이지요?”

“예. 실은 저희 후작님께서 요즘에 특이한 노예들을 수집하시는데 취미를 가지셔서 말입니다. 물건이 확인된다면 그분께서 꼭 좀 직접 보고 싶으시다 하셨는데, 혹시 같이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값은 분명 섭섭지 않게 치러주실 테니, 그 부분에 있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물론이지요. 후작님께서 뵙자는데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가시지요.”

나는 공손하게 마차를 가리키는 그를 보며, 환한 미소와 함께 여관 밖으로 향했다.

힘들일 수고를 덜었군.

“허허. 말씀이 잘 통하시는 분이라 아주 좋군요. 그럼 곧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거기, 출발하거라!”

히힝-

나는 집사를 따라 칸에 오르기가 무섭게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는 마차를 보며, 편안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곧 노예로 붙잡힌 용족이 누군지 볼 수 있겠군.

* * *

똑똑-

“후작님, 예의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마차를 타고 달린지 이틀.

금세 마을 두 개를 건너 후작이 다스리는 도시에 도착한 나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곧장 별채로 보이는 곳에 들어왔다.

“들어오게.”

끼익-

“실례하겠습니다.”

안쪽에서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방으로 들어선 나는, 곳곳에 꾸며진 화려한 장식들과 명화를 보며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용사 시절, 제국 황궁에서 봤던 것과 크게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군.

아무래도 수집하는 건 특이한 노예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후작님을 뵙습니다.”

“그래, 자네가 그 특별한 노예를 가지고 있다던 용병인가?”

“예. 아직 교육은 덜 되어있지만, 난폭하지 않고 얌전하니 안전하게 길들이는 맛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찰그락-

“호오… 이건 꽤나.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자네 솜씨가 좋은 건가.”

후작은 쇠사슬을 꽤 강하게 잡아당겨 상체가 휘청거림에도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가만히 있는 발라크를 보며,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이 크고 단단한 뿔, 튼튼해 보이는 날개! 흐흐, 정말이지 죽여주는군. 아주 환상적이야. 전에 구한 그년과 붙여놓으면 그림이 좀 살겠어.”

나는 자연스럽게 나를 지나쳐 발라크의 몸을 살피는 그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먼저 그 용족 노예에 대한 얘기를 꺼내주다니.

일을 보기가 어렵진 않겠어.

“그러고 보니 후작님께서 최근 훌륭한 노예를 하나 들이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혹시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듣자하니 이 녀석보다 훨씬 희귀하고 특별한 놈이라던데. 아무래도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소식이 거기까지 퍼졌나? 물론, 보여주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지. 이렇게 멋진 노예를 데리고 와줬는데 말이야. 다만 한 가지 약조를 좀 받아야겠는데….”

“혹시 이놈을 후작님께 팔아달라는 얘기시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애당초 그러려고 이리 온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이거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로구만. 길바닥 용병출신 답지 않게 아주 마음에 들어. 내 값은 섭섭지 않게 쳐주겠네. 데겔! 가서 그년을 데려오게.”

“예, 후작님.”

나는 후작의 명을 받아 방을 나선 집사가 곧 노예를 데려오기 전까지, 여유롭게 방을 둘러보며 슬쩍 발라크의 상태를 살폈다.

삶의 희망을 잃은 듯 이채 없는 눈동자를 띠고 있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순종적인 노예처럼 보였다.

물론 실상은 그저 내 말을 따라 그렇게 보이도록 연기를 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몸에 채워져 있는 구속구 또한, 그가 스스로 착용하면서 언제든 풀 수 있도록 느슨하게 되어있는 상태였다.

똑똑-

“후작님, 데려왔습니다.”

끼이익-

“음?”

곧 집사의 손에 붙잡힌 줄에 끌려 들어오는 여인을 본 나는, 표정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온몸에 대마법사용 구속구를 덕지덕지 찬 녀석은, 날카로운 눈매로 후작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크윽… 이거 놔라! 이 빌어먹을 놈들. 하찮은 인간주제에, 언제까지 이 몸을 잡아둘 셈이냐!”

“어떤가. 굉장히 아름답지 않나? 저 타오르는 불꽃같이 새빨간 머리 위에 난 단단한 뿔하며, 파충류처럼 날카롭게 찢어진 호박색 눈동자까지. 금화를 3000개나 주고 샀지만, 한 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 적 없다네.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젠 내가 가장 아끼는 보물 중 하나지.”

폭룡, 레비아탄의 역린. 미치광이 붉은 용.

나는 다른 용족들과 달리, 어째선지 유독 연합에 대한 분노가 엿보였던 최악의 여인을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굉장하군요.”

“하하! 이거 완전 넋이 나갔구먼, 그래.”

나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로 나를 살피는 후작을 보며,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이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주 잘됐다.

이 정도 거물이 어째서 정찰대에 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이놈을 구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이 용족은, 마왕의 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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