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으윽….”
“일어났나?”
나는 제 머리를 싸매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발라크를 보며, 손질하던 검을 집어넣었다.
딸랑 보잘 거 없는 평범한 검 하나만 차고 있던 몸뚱이는 어느새, 지금은 말라비틀어진 정어리가 되어버린 두 용병의 시체에서 벗겨낸 장비들로 꽤나 그럴싸한 베테랑 용병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못해도 해가 뜨기 전까진 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체력이 형편없군.”
회복력이 흡혈한 뱀파이어나 보름달 아래의 늑대인간들만큼은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훌륭한 육체 덕분에 꽤 상당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뭐, 어쩔 수 없나.
그래 봐야 메시지에 치기어린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걸 생각해보면, 아직은 좀 미숙한 놈이었을 테니까.
“으으… 아….”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마.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는 줄 알겠어. 같은 마족인데 말이야.”
나는 아직 흡혈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지, 나와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도 마치 사자 앞의 토끼마냥 벌벌 떠는 놈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괜한 혈기로 또 덤벼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어느 정도 두려워하는 편이 써먹기 편할 터.
“일어났으면 슬슬 출발하지. 따라와.”
“예… 예? 어, 어딜….”
“또 다른 동족을 구하러가야지. 아, 종족이 다를 테니 동족은 아닌가? 어쨌든, 멍청하게 노예사냥꾼한테 잡힌 녀석이 있다고 해서 말이야.”
동굴 밖은 조금 전에 잠깐 나와 봤을 때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일단 도시로 돌아가야겠지.
그래야 파비앙인지 파브르인지, 그 용족 노예를 사들였다는 후작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그 작은 용병 놈이 아마도 발록을 붙잡았을 때 쓰려던 용도로 구비해놓았을 구속구를 꺼내 들고서, 조심스럽게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발라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저, 그….”
“에릭이다. 에릭 가이오스. 아, 인간들 앞에서는 가젤이라고 부르도록. 일단 그렇게 가명을 쓰고 있으니까.”
“예… 그런데 에릭 형님. 그, 손에 들고 계신 건 어째서….”
형님?
아, 그러고 보니 발록들은 강자를 존중하고 대우하는 특성이 있던가.
적을 사로잡더라도 그 상대가 누구나 인정할 만한 강자라면 풀어주기까지 하는 놈들이니만큼, 자기도 꼴에 발록이라고 형님 대우를 해주려는 듯했다.
형님이라… 그래, 좋지 그런 것도.
“별 거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하, 하지만 이걸 어떻게 신경을…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형님! 형….”
“가만히 있어.”
“읏….”
구속구를 채우려고 하니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던 발라크는, 조금 짜증 섞인 내 날선 경고에 흠칫 몸을 떨며 체념한 듯 힘을 풀었다.
“옳지.”
철컥-
차르르-
이후 가뿐하게 구속구를 모두 채운 나는, 연결된 사슬을 쥐고서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 형님. 어째서입니까?”
“방금 전에 말한 그 노예로 잡힌 마족을 구하기 위해선, 먼저 그놈을 사간 녀석부터 만나야지 않겠나. 그걸 위한 준비라고 생각해라.”
“그 준비라는 게 제가 이렇게 노예처럼 묶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래, 그게 핵심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렇다고 진짜 널 팔아버릴 생각은 아니니까. 미끼라고 생각해.”
“으음… 예, 알겠습니다.”
고분고분 말도 잘 듣는군.
물론 아직 의구심이 남아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거야 무슨 꼭두각시 인형도 아니고 당연한 일이겠지.
“정지! 거기 옆에 있는 그 녀석은 뭐지? 커다란 뿔에 검은 날개. 처음 보는 종족이군.”
“최근에 저 숲에 화전민 마을을 하나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던 그놈입니다. 지금 막 사로잡고 오는 길이지요.”
차르륵-
“큭….”
어느덧 도시 앞에 도착한 나는, 검문을 하는 경비를 향해 보란 듯이 구속구를 매단 사슬을 잡아당기며 미소를 지었다.
“아, 그 사람을 반으로 찢어버렸다던 그놈 말인가. 흐음… 당연히 과장이 있었을 줄 알았는데, 확실히 덩치를 보아하니 진짜로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대단하구만. 이런 놈을 잡아오다니. 혼자 잡은 건가?”
“아뇨, 동료가 있었지만….”
“으음, 미안하군. 나도 참, 입이 방정이야. 그럼 그 녀석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마침 적지만 현상금이 걸리긴 했는데, 우리 경비대에 넘길 텐가?”
찰그락-
나는 경비대에 넘길 거냐는 얘기를 듣자마자 고개를 휘휘 저어 사슬을 흔드는 발라크를 보며, 속으로 몰래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운 놈.
“죄송합니다. 듣자하니 파비앙 후작님께서 요새 특이한 노예를 사들이셨다고 하던데. 그분께 한 번 팔아볼 생각이라서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소문도 있었던가. 뭐, 확실히 그놈이 특이해보이긴 하는구먼. 그래, 신분을 증명할 게 있나?”
“여기 있습니다.”
나는 경비의 물음에 품에서 용병패를 꺼내 들었다.
“용병인가. 하긴, 그런 놈들을 잡으러 다닐 사람이 용병 말고 더 있을 리가 없지. 통과.”
“하하… 고생하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앞을 가로막은 창을 회수하는 그를 지나쳐 도시 안으로 들어선 나는, 곧장 용병 길드로 향했다.
일단 무작정 파비앙 후작이 다스리는 도시를 찾아 그리로 가는 것보다는, 좀 더 정보를 얻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끽해야 고작 일개 용병신분일 뿐인 내가 지금 그를 찾아가봐야, 후작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아랫사람한테 대금을 받고 물건을 넘길 뿐일 터.
그래서야 그가 사들였다는 용족은 구하기는커녕 만나볼 수도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우선은 후작이 직접 사람을 보내게 만들 작정이었다.
원래 협상이라는 건 먼저 손을 건넨 쪽이 반은 지고 들어가는 거였으니까.
“뭐야 저거. 야, 저기 웬 날개 달린 수인이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수인한테 날개가 달려있다니. 차라리 하피한테 뿔이 달렸다고… 어?”
발라크한테 꽂히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만끽하며 천천히 거리를 거닐자, 금세 용병 길드의 건물이 보였다.
이 정도면 따로 소문을 내고 다닐 필요는 없겠어.
딸랑-
맑은 종소리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저 앞에 반쯤 졸고 앉아있는 파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저번에 그 빌어먹을 활잡이 때문에… 어? 저, 저게 뭐야….”
“거기 형씨. 도대체 뭘 잡아온 거야? 뭐 하피랑 살림 차린 양 수인 꽁무니라도 쫓아다니다가 발견한 거야?”
나는 바깥과 마찬가지로 발라크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용병들을 지나치고서, 곧바로 데스크 앞에 섰다.
근무시간에 이렇게 졸아도 되는 건가.
월급 도둑도 이런 도둑이 따로 없군.
“파벨 씨.”
“으음….”
“파벨 씨!”
콰앙-!
“흐억! 까, 깜짝 놀라라. 누구요? 할 말이 있으면 그냥 좀 불러서 깨우면… 어? 아, 이게 누군가! 가젤, 그 친구들이랑 볼일은 다 끝냈나?”
나는 책상을 쿵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꿈뻑이며 일어선 파벨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볼일이라면 지금 막 마치고 돌아왔죠. 아쉽게도 두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내 혹시나 노파심에 묻는 건데, 뒤통수를 친 건 아니겠지? 그건 엄연히 금기를 깨는 짓이야. 뭐, 자네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지만 말이야.”
뒤통수라니, 그럴 리가.
앞에서 심장을 꿰뚫었으니, 적어도 뒤통수는 아니겠지.
나는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것으로 그의 의심을 흘려보냈다.
“그래. 그보다 옆의 녀석이 전에 말하던 그건가? 마을 하나를 아주 작살내버렸다던 그놈 말이야. 으음… 확실히, 두 사람이나 목이 날아갔을 만하군. 저 솥뚜껑만 한 두 손으로 사람을 찢어버렸단 말이지.”
파벨은 내 옆을 흘끗 바라보며 나지막이 감탄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굳이 저놈을 데리고 길드를 찾아왔다는 건, 중매를 부탁한다는 걸로 봐도 되겠나? 하긴, 수수료가 좀 많이 떼이긴 해도 귀족을 상대로 한 거래는 일개 용병보단 길드의 이름으로 하는 편이 안전하겠지. 하물며 그 파비앙이라면 말이야.”
뭐야, 길드에서 중매도 맡아주는 건가?
확실히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수수료가 좀 많이 떼일지라도, 귀족한테 팔아넘길 정도의 물건이라면 나머지만 해도 충분히 평생 먹고 살 돈이 될 테니 말이다.
귀족 입장에서도 용병 길드 자체와 거래를 한 셈이니, 함부로 수작을 부릴 수도 없을 테고.
아쉽네.
단순히 물건만 넘기면 되는 일이었다면 이쪽도 나쁘지 않았을 터.
“아뇨. 그보다는 그쪽에 소문을 좀 내주시죠. 여기 아주 특별한 이종족 노예가 있다고.”
“…괜찮겠나? 그랬다간 자네 물건을 채가려고 별의 별놈들이 다 들러붙을 텐데 말이야. 그냥 안전하게 가는 게 어떻겠나?”
“괜찮습니다. 어지간하면 여관방 안에만 있을 생각이니까요.”
“으음… 그런다고 포기할 놈들이 아닐 텐데. 뭐, 자네도 다 생각이 있겠지. 그럼 그렇게 해주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파벨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굳이 여관방까지 쳐들어와준다면야 이쪽은 오히려 환영이지.
들켰을 때의 페널티를 감수하지 않고 마음대로 죽일 수 있으니 말이다.
적어도 이 세계는 귀족이 아닌 평민끼리, 남의 물건을 강제로 뺏으려는 녀석을 좀 잘못해서 죽였다고 죄를 묻진 않으니까.
물론 확실하게 상황을 입증할 수 있어야만 했지만, 내가 머무는 여관방 안에 함부로 들어온 놈을 상대로 굳이 입증이 필요하진 않겠지.
“방 좀 있습니까?”
“방이야 많지. 옆의 그 이상한… 아니, 무슨 뿔이랑 날개가 같이 나있소? 혹시 장식이요? 크흠… 어쨌든. 노예도 같이 묵는 거요?”
“예. 2인실로 주시죠. 사흘 정도.”
“동화 서른 개만 주쇼.”
짤랑-
금방 근처 여관에 도착해 동화를 건네고 열쇠를 받아 든 나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끼익-
“이제 잠시 풀어주마. 굳이 안에 있을 때까지 차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그… 감사합니다, 형님.”
아침부터 시작해 이제 거의 저녁때가 다되어서야 구속구를 푼 발라크는, 스트레칭을 하듯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뚜둑 소리를 냈다.
많이 불편했던 모양이네.
“그럼 이제 그 후작이라는 사람이 찾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겁니까?”
“그래. 정확히는 후작이 직접 오지는 않겠고, 따로 사람을 보낼 테지만 말이야.”
아마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다.
정확히 그 후작이 다스리는 도시가 어디에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직 정찰대가 넘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용족 노예를 사들였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면 적어도 머지않은 곳에 있다는 뜻이겠지.
“그전까진 종종 날 죽이고서 널 가져가려고 습격해올 놈들이나 상대하고 있으면 된다. 될 수 있으면 너도 좀 도와라. 어차피 할 것도 없을 텐데 말이야.”
“예, 형님.”
자, 어느 놈들이 먼저 오려나.
되도록 많이 좀 왔으면 좋겠는데.
이번 기회에 레벨 좀 많이 올리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