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쐐액-
금방이라도 놈의 목을 꿰뚫을 것만 같던 검 끝이 허공을 지나쳤다.
나는 그나마 이 모자란 몸으로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였는데도 간단히 피해버리는 놈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신체능력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이런 빌어먹을 몸뚱이 같으니.
능력치가 녀석의 반만 됐더라도 아주 가지고 놀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지금 이 상태로도 아주 못 이길 건 아니었지만, 그러려면 무조건 급소를 노려야만 했다.
하지만 자칫 그랬다가는 놈이 죽어버릴지도 모를 노릇이었기에, 나는 입술을 꾹 씹으며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후웅-
나는 한 방에 끝낼 심산인지 크게 원을 그리듯 휘둘러오는 녀석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며, 살짝 거리를 벌렸다.
“과연, 큰소리칠 만한 실력은 되는군. 인정하마. 꽤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하.”
감히 누가 누구를 인정한다는 건지.
나는 코웃음을 치며 놈을 바라봤다.
거기서 무식하게 큰 공격이나 날리는걸 보아하니, 여태까지 제 무식한 몸뚱이만 믿고서 달려온 놈 같은데.
혹시 머리가 모자라서 정찰대에 낀 건가?
음, 그럼 좀 곤란한데.
너무 무식하면 그건 그것대로 말을 안 들어먹으니까 말이다.
“너야말로 맨손으로 사람들을 찢어 죽였다던데, 그런 마초적인 취향을 가진 것치고는 고작 날붙이 하나를 무서워하는 게 꼭 계집애 같은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군. 굳이 계집애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목에 검이 박히면 죽… 음?”
나는 녀석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늘어놓는 동안, 처음에 놈의 공격을 맞고 날아간 용병이 있는 방향을 향해 눈길을 보냈다.
“네놈, 설마 이러려고 그런 쓸데없는 말을… 으음?”
녀석은 도중에 눈치를 챘는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내 시선을 따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저 고개를 갸웃하며 멍하니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거기엔 아까부터 계속 쓰러져 있는 녀석밖에 없었으니까.
단순한 속임수였다.
일부러 티 나게 시선을 흘려, 놈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속임수.
“이, 이런… 큭!”
촤악-!
“칫. 얕았나.”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뒤로 몸을 날린 녀석의 가슴팍에서 피가 팍 튀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빨라서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건 좀 아쉬웠지만…
“뭐, 상관없나.”
어차피 진짜로 노리고 있던 건 따로 있었으니까.
푹-
“윽! 무, 무슨….”
무언가 날카로운 게 살갗을 찢고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상처를 더듬으며 바닥을 짚고 무릎을 꿇고 있던 녀석이 짧게 신음을 터트렸다.
“흐흐흐… 잡았다! 어이, 형씨! 빨리 튀자고!”
나는 자신의 등에 꽂힌 무언가를 빼내기 위해 더듬거리는 놈에게서 빠져나오는 키 작은 용병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린 부자야! 금화 백 개면 둘이 나눠도 평생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다고! 으하하핫!”
녀석은 탐욕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슬쩍 기절해있는 제 동료를 훑고선 그대로 지나쳐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입은 적으면 적을수록 더 좋은 거 아니겠어? 흐흐….”
“확실히. 셋보단 둘이 더 많이 가져갈 수 있겠죠. 금화 오십 개라….”
“그래. 원할 때마다 여자를 안고 놀아도 죽을 때까지 차고 넘치는 돈이라고! 흐흐… 여하튼, 계속 그렇게 멍하니 서 있지 말고….”
“하지만 혼자 먹으면 백 개잖아?”
푸욱-
“…어?”
“쓰레기 같은 놈. 함부로 동료를 배신하면 쓰나. 마음씨 좀 곱게 쓰라고. 뭐, 이젠 그럴 수도 없겠지만.”
나는 울컥 피를 토해내며 앞으로 쓰러지는 녀석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봤다.
배신이라니.
비록 그게 나를 향한 건 아니었지만, 꼭 어떤 빌어먹을 놈들을 보는 거 같아서 괜히 기분이 더러워졌다.
털썩-
놈의 심장을 꿰뚫은 검을 쑥 빼내자, 시체가 실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퓻- 하고 튀어 뺨에 묻은 핏물을 슥슥 닦으며,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살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기습으로 쓰러트렸습니다.]
[민첩이 ‘1’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음, 좋아.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떨어진 시체를 들어올렸다.
“크으… 어째서냐. 너희는 동료가 아니었나?”
“동료라니,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애초에 이럴 용도로 데리고 온 거라고, 이 녀석들은 말이야.”
그저 그 용족을 노예로 사들였다는 후작을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잠시 이용했을 뿐이다.
겸사겸사 돈도 벌고 말이야.
콰악-
축 늘어진 시체의 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자, 곧 따뜻한 액체가 한 가득 입안에 들어찼다.
꿀꺽-
나는 연신 목울대를 움직이며 달큰한 핏물을 삼켰다.
그럴 때마다 이미 죽은 몸뚱이가 움찔움찔 떠는 모양새가 퍽 우스꽝스러웠다.
[기회주의 용병, ‘케딜락’을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힘이 ‘1’ 증가합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툭-
“흐으….”
나는 어느새 말라비틀어진 시체를 놓으며, 입가에 묻은 피를 슥 닦았다.
금방 죽은 시체를 흡혈한 건 이번이 처음인데.
생각보다 달콤해서 자칫 중독이라도 될 것만 같았다.
산 채로 마시면 더 좋을까?
난 곧 일어나려는지 구석에서 꿈틀거리는 거구의 용병을 보며 입술을 핥았다.
“너, 너… 뱀파이어였나?”
“그럼 남의 목에 이를 박아 넣고 피를 마시는 게 뱀파이어 말고 또 있겠나?”
나는 정신을 차렸는지 옅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려는 용병의 목에 이를 박으며, 짐짓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발록을 향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으으… 컥!”
[둔하지만 우직한 용병, ‘바몬드’를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힘이 ‘2’ 증가합니다.]
이쪽은 좀 더 향이 짙은 느낌이네.
아직 산 놈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개인마다 맛의 차이가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꽤나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본대가 넘어오기 전까지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전초기지를 세워놓는 것임을 잊은 건가! 어째서 인간들과 편을 먹고 나를 습격한 거지?”
“웃기는군. 그런 놈이 혼자 돌아다니면서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마을 하나를 박살낸 건가? 할 거면 제대로 했어야지. 생존자가 남아서 근처 도시에 얘기가 들어간 줄도 모르고 말이야. 하다못해 짐승의 짓으로라도 포장해놓던가. 오히려 네놈의 소식을 듣고 용병들이 팀을 꾸리려는 걸 발견하고, 그들 사이에 숨어들어 자칫 독에 당할 뻔한 너를 살려준 내게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헌데 오히려 책망을 하려들다니.”
“읏, 그….”
그는 날카롭게 밀어붙이는 내 말에 흠칫 몸을 떨며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애초에 놈들을 정리하고 들어와도 됐던 것 아닌가!”
“적을 속이려면 먼저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지. 그랬다가 한 번에 끝을 보지 못하면 내가 독에 당할 수도 있었을 거 아닌가. 난 뭐든 확실한 걸 좋아하는 편이다.”
“으음….”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을 보며, 속으로 씨익 삐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녀석.
보기 좋게 늘여놓은 궤변에 홀라당 넘어갔군.
당연한 일이었다.
난 이런 어수룩한 놈 하나 구워삶지 못할 정도로 물러터지지 않았으니까.
용사 시절, 여러모로 뒷공작에 능해야 하는 도적으로 몇 년을 구르며 체득한 기술들이 몸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라질 리가 있나.
한때는 마왕군이 점령한 도시에 들어가 그곳을 다스리는 놈의 목을 따오기 위해, 오로지 언변만으로 경비를 구워삶아 상인으로 위장해 독대까지 따냈을 정도였는데 말이다.
“그… 미안하군. 아무래도 내가 생각이 좀 짧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 독 좀 어떻게 해주겠나? 슬슬 숨을 쉬는 것도 벅차오는군.”
“널 잡으려고 준비한 물건이었을 텐데 따로 해독제까지 챙겨왔을 리가 있나. 그냥 조금 기다리면 나아질 거다. 극독이긴 해도 오래돼서 좀 말랐던 데다가, 애초에 발려있던 양도 극소량이었으니까 말이야.”
“으음, 그헌가….”
슬슬 때가 됐나.
나는 이제 발음마저 흘리기 시작할 정도로 확실히 중독된 돈 놈을 보며, 슬그머니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 머햐? 아으….”
난 확실하게 혀가 뿌리까지 마비된 듯, 쌔액쌔액 말이 되지 못한 숨을 뱉어내는 것밖에 못하는 녀석의 뒤에 서서 입을 쩍 벌렸다.
“그럼 네 목숨 값 좀 받아가마. 너무 걱정하지 마. 조금 따끔할 뿐일 테니까. 아마도.”
콰악-
“으으… 에으으….”
달다.
나는 이전의 두 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척이나 달콤한 피를 정신없이 탐하다, 곧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이를 빼냈다.
“…이런.”
그 짧은 사이에 피부가 쪼그라들어 몇 배는 더 늙어보이게 된 녀석을 보며, 머쓱함에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적당히 마시고 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빨아먹어버린 모양이었다.
이거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치기어린 발록, ‘발라크’를 흡혈했습니다.]
[대상의 모든 피를 마시지 않아, 흡혈의 효과가 감소합니다.]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힘이 ‘3’ 증가합니다.]
[민첩이 ‘1’ 증가합니다.]
[체력이 ‘2’ 증가합니다.]
[마력이 ‘2’ 증가합니다.]
나는 순간 시야가 다 가릴 정도로 주르륵 길게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녀석의 몸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흡혈하지 않은 탓에 효과가 감소했음에도, 단번에 능력치가 도합 8이나 오르다니.
“스읍….”
혹시 지금이라도 나머지를 다 마시면 더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입맛을 다시며 바닥에 쓰러진 놈을 바라보기도 잠시, 곧 고개를 저으며 녀석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럴 거면 애초에 아까 맞붙었을 때 숨통을 끊어서 승리 보상과 함께 경험치까지 타먹었겠지.
애써 살려놓은 이유가 없던 것도 아니고.
게다가 흡혈이 목적이라면, 나중에 놈이 쌩쌩해졌을 때 한 번 더 시도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4]
[힘 : 25] [민첩 : 20][체력 : 25][마력 : 12]
어느덧 벌써 총합 80을 넘긴 능력치를 보자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용사 시절의 내가 이루어놓았던 것에 비하면 아직도 비루한 벌레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때는 거의 제국 교관의 아래에서 두 달을 뼈 빠지게 구르고서야 만들 수 있었던 것을 이번엔 고작 이틀 만에 닿아버리고만 것이다.
“파비앙 후작이라고 했던가.”
기억에 없는 이름인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마왕군의 침공 이후 멸망당한 가문의 사람인 듯했다.
용족 노예를 사들였다고 했던가.
처음엔 도대체 얼마나 못났기에 용족임에도 정찰대에 끼었을까 싶었지만, 지금 옆에 쓰러져있는 이 녀석을 보아하니 생각 외로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실패를 위해 꾸린 것 같은 정찰대에 몇몇 쓸 만한 놈들이 끼어있었다.
아무래도 윗대가리들 사이에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놈을 구할 수만 있다면, 훗날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굳이 녀석이 아니더라도 용족들은 그 적은 개체 수만큼이나 서로의 유대가 긴밀하다고들 하니, 언젠간 다른 녀석의 도움을 바라도 될 터.
“으음….”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어수룩한 발록이 정신을 차리면 계획을 더 구체화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