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먼저 나와 계셨네요.”
근처 여관방에서 하루를 지내고 밖으로 나온 나는, 먼저 동문 앞에 서있는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아직 약속한 시간까지는 5분 정도 남았을 텐데, 생각보다 성실들 했다.
“아, 오셨소?”
“왔으면 긴말할 거 없이 바로 출발하자고. 마을이 하나 당했다고 해도 세금도 제대로 안 내는 화전민들이라 정규군이 움직일 일은 없겠지만, 우리 같은 용병들은 또 모르니까.”
“그럼 바로 출발하시지요.”
나는 모이기가 무섭게 곧장 성문을 나서기 시작하는 일행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질질 끌지 않아서 좋네.
“근데 뭐 뿔 달린 이종족이 나온다는 얘기 말고, 다른 정보는 더 없습니까? 이를테면 동료가 있었다던가.”
“없어, 없어. 거기서 도망친 놈이 말하기를 딱 한 명이었다고 했대. 거기에 맨몸으로 들어와선 두 손으로 다 찢어버렸다는 모양이야.”
한 명이라.
그것도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사람을 찢어버렸다는 걸로 봐선, 생각보다 그리 약한 놈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리 작은 화전민 마을이라고 하더라도, 힘 좀 깨나 쓰는 청년들이 아주 없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어째서 그런 놈이 이 몸뚱이의 원주인 같은 떨거지들만 모아 보낸 정찰대에 끼어있는 거지?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이거 생각보다 훨씬 강한 놈인가 본데. 그러면 고작 셋이서는 좀 위험하지 않겠소?”
“흐흐,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설마 그런 놈을 상대로 아무런 준비도 안 해 왔을까봐?”
키 작은 용병은 품에서 날카로운 침이 담긴 작은 상자를 꺼내 보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뭐요? 그런 바늘 같은 걸 어디에 써먹겠다고….”
“어휴, 이 무식한 놈. 이걸로 말할 거 같으면….”
“샐러맨더의 독액을 바른 침이군요. 오래돼서 독액이 조금 마른 거 같긴 하지만, 뭣 모르는 이종족 하나 골로 보내기엔 충분하겠어요.”
“어? 어어… 그렇지. 형씨, 생각보다 똑똑한데?”
나는 상당히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조용히 어깨를 으쓱였다.
용사로 불리던 시절에 분노의 마왕이 점령한 도시를 탈환하기 위해, 그곳의 수로로 침입해 딱 한 번 저 침에 발린 독액을 풀어본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준비를 위해 화산으로 샐러맨더를 잡으러 갔을 때도, 빌어먹을 연합 놈들의 군대는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던가.
그때는 병사들이 그 도마뱀에게서 나오는 열기를 버티지 못해 녹아내릴 거라는 말에 다들 그냥 넘어가긴 했었지만, 돌이켜보면 애초에 기사나 연합의 간부들을 데리고 왔으면 될 일이었다.
개자식들.
나를 비롯한 이방인들이 힘겹게 샐러맨더의 몸을 감싸고 있는 불길 속에서 죽을 고생을 하는 동안, 자기들은 뒤에서 편히 뒷짐이나 지고서 기다리고 있었겠지.
“슬슬 해가 질 때가 다 됐는데, 얼마나 더 가야 하오?”
“음. 방금 전에 집채만 한 바위가 놓인 갈래 길을 지났으니까, 곧 도착할 때가 되긴 했는데… 아, 찾았다. 저기 있네.”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아침 일찍 성문을 나서고서도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한참을 걷고 나서야, 예의 그 화전민 마을이 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끔찍한 악취로군. 코가 떨어져나갈 거 같소.”
“윽… 시체조차 치우지 않은 모양이네. 형씨, 그쪽은 괜찮아?”
“뭐, 이정도야 익숙합니다.”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면 이게 익숙할 수가 있는 거야? 이쪽은 머리가 다 아파 죽겠는데.”
마을은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을 했다.
생존자가 근처 도시로 가서 경비한테 자초지종 얘기를 했다더니, 따로 와서 확인은 안한 모양이었다.
그랬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마을 밖까지 악취가 새어 나오진 않았을 테니까.
“우욱! 흐, 젠장… 오늘 뭘 더 먹긴 글렀네.”
“…정말로 사람을 반으로 찢어놨군. 직접 보니까 솔직히 겁이 날 정도구려.”
안쪽 상황은 더 가관이었다.
차마 눈 뜨고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몰골을 한 시체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특히 출발할 때 얘기를 들었던 대로 과연 맨손으로 이렇게 만든 건진 모르겠지만, 세로로 찢어져 바닥에 다 썩어 거뭇해진 내장을 내놓고 있는 건 내가 봐도 눈살이 다 찌푸려질 정도였다.
“이제 여기서부터 어떻게 할 거요? 일단 그 마을이라는 곳에 오긴 했는데, 놈이 이곳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건 벌써 며칠 전의 얘기잖소. 따로 찾을 방법이 있는 거요?”
“그러니까, 그런 건 다 준비해왔다니까 그러네. 이미 어제부터 오늘 새벽까지 조사를 다 마쳤다고. 덕분에 지금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말이야. 어쨌든, 그놈이 아직 이 마을 근처를 돌아다닌다는 모양이야. 이건 오늘 새벽에 남쪽 경비대장이 또 다른 생존자한테서 들은 정보니까 믿어도 좋아.”
“으음, 마을 근처라.”
나는 두 사람이 서로 얘기를 나누는 동안, 옆구리가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잘려나간 시체 앞으로 다가갔다.
덩치가 상당한 게, 살아생전에 힘 좀 깨나 썼을 것 같은 놈이었다.
“으음… 퉷!”
나는 혹시나 싶어 바닥에 눌어붙은 피를 조금 떼어내 삼켜봤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이 속에서부터 훅 올라오는 역겨움에 곧바로 뱉어냈다.
직접 흡혈한 게 아니라서 메시지가 안 뜨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너무 오래돼서?
어쨌든 정말 끔찍한 맛이었다.
“어이, 형씨! 지금 바로 출발할 거야.”
“예,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아까 뱉은 핏덩이가 살짝 묻은 신발 윗부분을 바닥에 슥슥 문지르고선, 둘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이 넓은 숲을 다 뒤지려면 며칠을 새도 모자를 텐데. 뭐 또 준비한 거 없소?”
“어… 윽, 그것까진 생각 못했는데. 그래도 혼자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정도면 굉장히 흉포한 놈일 테니까, 이 숲 어딘가에서 야생동물이나 몬스터라도 사냥하고 있지 않겠어?”
“으음… 그것도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찾을 방법이 없을 텐데. 그럼 정말로 발로 뛰는 수밖에 없겠구먼.”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요. 그렇게 아무런 단서도 없이 무작정 찾으려고 하면, 며칠이 걸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놈이 숲을 벗어날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요? 우리라고 뭐 마구잡이로 찾고 싶겠소?”
“그래, 맞아. 아니면 형씨,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어?”
“따라오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지나쳐 앞장섰다.
대상의 흔적을 찾고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야말로 도적의 특기 아니겠는가.
한때 거의 열흘은 더된 흔적을 가지고도, 부하를 모두 잃고 설산에 숨어들었다던 마왕군 간부를 기어코 찾아냈던 나다.
눈발이 거세 10분도 안 돼서 발자국이 덮이는 극악의 환경조차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물며 이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숲에, 드문드문 남아 있는 흔적들을 가지고 못 찾을 리가.
“어이, 형씨! 정말로 이쪽이 맞….”
“쉿. 찾았어요.”
마을을 벗어나고부터 대략 한 시간쯤.
나는 꽤 커다란 곰을 어깨에 둘러멘 채, 커다란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을 찾을 수 있었다.
“산양 같은 뿔에 검은 박쥐 날개… 확실하구만.”
“…믿을 수가 없네. 진짜로 찾았잖아? 형씨, 혹시 나중에 어떻게 한 건지 좀 알 수 있을까? 난 여기까지 오면서 딱히 흔적이라고 할 만한 걸 본적이 없는 거 같은데…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나중에, 일이 다 끝나고 알려드릴게요. 일단 저놈부터 잡고 얘기하죠.”
“어, 약속한 거다? 꼭 알려줘야 돼!”
그래, 그때까지 네가 살아있으면 말이야.
나는 속으로 말을 삼키며, 앞서 나간 둘을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토옹- 통-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놈은 어디에 있으려나.
적어도 입구 근처에는 없는 걸로 보아, 꽤 안쪽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젠장… 더럽게 컴컴하군. 다들 조심해. 발밑에 뭐라도 걸리면 바로 들킬지도 모르니까.”
한치 앞도 잘 안 보이는 어두운 동굴 속을 조심스럽게 거닐며, 오감은 어디에 있을지 모를 발록을 찾기 위해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쯔으윽-
“…저쪽에 있는 모양이군.”
“실수하지 말고 한 번에 끝내자고. 내가 녀석에게 독침을 박아 넣을 수 있도록 둘이서 보조 좀 부탁할게. 그러고 나면 바로 도망치는 거야. 몇 분이면 알아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독침만 확실하게 맞추세요.”
우리는 각자 역할을 확실하게 하고서, 아까 소리가 났던 곳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으적- 쯔드득-
곧 모닥불에 올려놓은 곰 고기를 적당히 탄 부분만 떼어내고서 뜯어먹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그 모습에 꿀꺽하고 마른침을 삼킨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웅-!
가장 먼저 둘 중에 한 덩치 하는 쪽이 대검을 휘두르며 놈에게 달려들었다.
“우웁?”
쩌억-
“무, 무슨….”
나름 지근거리에서 소리 없이 달려든 꽤나 그럴싸한 기습이었건만, 녀석은 옆에 있던 곰의 사체를 들어 올려 늦지 않게 공격을 막아냈다.
“이, 이런 젠장… 더럽게 안 빠지는군!”
“뭐냐, 네놈들은. 중간계의 기사인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형편없을 정도로 약해 빠졌군.”
“…뭐? 중간… 흐, 흐억!”
발록은 무심한 눈으로 이쪽을 살피며, 방패처럼 들고 있던 사체를 옆으로 집어던졌다.
쿠웅-!
“커, 커억….”
방금 전에 있는 힘껏 휘둘러서 사체에 박혀버린 자신의 대검과 함께 날아간 용병이, 동굴 천장이 울릴 정도로 세게 벽에 처박히고선 바닥에 쓰러졌다.
…이거 위험한데.
이 녀석, 직접 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제대로 되먹은 놈이었다.
도대체 왜 버림패로 내몰린 정찰대에 끼어있었던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넌 덤비지 않는 건가?”
그는 움찔거리다 곧 축 늘어지는 용병을 슥 살피고선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치 밤중에 잠자리를 귀찮게 하는 벌레를 보는 것 같은 그 시선에, 속에서 울컥하고 무언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건방지게.
발록이라고 해봐야 마왕도 아닌 일개 마족주제에, 그런 눈으로 나를 보다니.
“…아무래도 교육이 좀 필요하겠군.”
스릉-
나는 천천히 무기를 뽑아 들고선 녀석을 향해 검 끝을 겨눴다.
적당히 하려고 했건만, 조금 손대중이 필요할 거 같았다.
놈이 말 잘 듣는 개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네놈이 나를? 그거 재미있겠군.”
투웅-
나는 비웃듯이 히죽이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바닥을 박차고 쏘아져나갔다.
꽤 날카롭게 날이 선 검 끝이, 금세 텅 빈 놈의 목 앞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