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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4화 (4/200)

제4화

건물 안으로 들어선 나는, 곧장 위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놓인 데스크로 향했다.

시끌벅적한 길드 내부를 둘러보며 찢어지듯 하품을 늘어놓던 직원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나를 발견하고선 삐져나온 눈물을 슥슥 닦았다.

“무슨 일로 오셨소? 의뢰라면 2층에서 받고 있소만.”

그는 내 행색을 한 번 훑고선 턱으로 옆의 계단을 가리켰다.

뱀파이어라는 종족 특성상 호리호리한 몸과 창백한 피부 때문인가.

떡하니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데도 이렇게 무시를 당할 정도로 나약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잘된 일이었다.

오히려 그 편이 상대방한테서 방심을 이끌어내기 좋은 조건이었으니까.

“용병으로 등록하고 싶습니다.”

나는 검집을 툭툭 쳐 절그럭거리며 직원을 바라봤다.

“후우… 이보시오. 칼밥으로 먹고 사는 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아쇼? 거 날붙이 하나 들고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오. 항상 자기 목을 담보로 내놓는 일이란 말이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몸에 난 상처들을 내비쳤다.

왼쪽 어깨에서 팔꿈치 아래까지 이어지는 상흔들을 비롯해, 크고 작은 흉터들이 단단해 보이는 육체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본래 현역으로 활동하다 은퇴한 용병인 듯했다.

그것도 꽤나 험한 의뢰들을 여럿 수행한, 베테랑 출신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끽해야 용병 나부랭이일 뿐이었다.

마왕군과의 전장, 그 최전방에서 수년을 굴렀던 나다.

필요에 의해선 혼자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가 적장의 목을 따오기도 했던 내게, 고작해야 영지전에 고용되어 병사나 용병들과 검 좀 나누며 생겼을 상처 따윈 별로 대단해 보일 게 못됐다.

“…동화 서른 개만 내시오.”

나는 주머니에서 동화를 꺼내, 데스크 위에 놓인 쟁반에 올렸다.

짤그랑-

“신분패는 없소?”

“예. 오던 길에 잃어버린지라.”

“…그러면 좀 곤란한데. 실력이 보증이 안 되면 적어도 신원이라도 확실해야 받아줄 수 있소. 미안하지만 그게 규칙이오.”

그는 쟁반 위에 놓인 동전들을 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실력만 되면 괜찮은 겁니까?”

“뭐, 그야 그렇지. 하지만 괜찮겠소? 다들 조절은 하겠지만, 아무래도 실력을 제대로 알아보려면 시험이 좀 거칠어질 수도 있다 보니 조금 다칠 수도 있는데.”

괜찮다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본 직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오시오.”

그는 데스크 안쪽에 기대어 세워져 있던 목검을 들고서 뒤편에 뚫린 문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원하는 무기를 들고 올라오시오. 무엇하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그것도 괜찮소.”

나는 꽤 널찍한 방 안에 마련된 경기장 위로 먼저 올라선 그를 보며, 종류별로 늘어선 목제 무기들 중에 단검을 골라 계단을 올랐다.

용사 시절에 쓰던 것보단 조금 작은 녀석이었지만, 손에 익지 않은 크기라고 해도 일개 퇴역 용병 하나를 상대로는 과분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지금 이 몸뚱이가 보잘것없는 능력치를 가졌다고 한들, 내가 그간 익혀온 기술들까지 잊은 건 아니었으니까.

“시험은 간단하오.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내게 닿으면 통과시켜주겠소. 지금은 이렇게 길드 구석에 앉아 업무만 보고 있는 몸이라지만, 이래 뵈도 왕년엔 귀족 나리들한테서 러브콜 좀 받았던 몸이니까 말이오.”

그는 양껏 부푼 자신의 근육을 과시하며, 언제든 들어오라는 듯 여유로운 미소로 나를 기다렸다.

솔직히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비록 끝내 빌어먹을 연합 놈들한테 놀아나긴 했어도 적어도 겉으로는 역대 최강의 용사 중 하나라며 추앙받던 내가, 이제는 이런 용병 나부랭이한테 선수를 양보 받는 꼴이라니.

쐐액-!

“음? 아, 아니!”

나는 곧장 그의 미간을 향해 들고 있던 단검을 던지며 바닥을 박찼다.

카앙-!

“허허, 설마 다짜고짜 무기를 던질 줄이야. 나름 허를 찔리긴 했지만, 그래도 결국 이렇게 상대가 막아버리면 다음은… 어?”

그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라며 황급히 검을 휘둘러 단검을 쳐내고선, 곧바로 나를 찾으려고 고개를 돌리다 곧 당황한 표정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어, 어떻게….”

분명 허공에서 쳐냈을 단검이 내 손에 쥐어진 채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며 다급히 뒤로 몸을 날려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 실력이 좀 보증이 되겠습니까?”

“어, 어어… 그, 그렇소.”

나는 자신의 목에 닿은 서늘한 나무의 느낌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그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믿을 수 없는 업적!]

[자신보다 훨씬 강한 적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이루어내셨습니다.]

[힘이 ‘3’ 증가합니다.]

[민첩이 ‘3’ 증가합니다.]

[체력이 ‘3’ 증가합니다.]

나는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들을 바라보며,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능력치가 아주 쭉쭉 오르는군.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1]

[힘 : 16] [민첩 : 15][체력 : 19][마력 : 7]

아직 레벨도 하나 오르지 않았건만, 벌써 체력은 20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래 봤자 아직 전쟁에서 한 사람 몫을 하기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이대로라면 적어도 그때가 오는 반년 안으로는 충분히 만족할만한 선까지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바로 등록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알았소. 젠장,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얘기해놓고 5초도 안 돼서 쓰러지다니. 쪽팔려 죽겠구먼. 그쪽, 보기와 달리 굉장한 실력자였구려. 그런데 혹시 아까 그거, 어떻게 한 건지 좀 알 수 있겠소? 분명 내가 쳐냈을 텐데… 혹시 나 몰래 하나 더 가지고 올라오기라고 했던 거요?”

“별 거 없습니다. 그냥 당신이 쳐낸 걸 잡아서 다시 휘둘렀을 뿐이에요.”

“그, 그걸 말인가? 아니, 그게 어디로 튈지 알고….”

나는 이후 계속 주절주절 말을 걸어오는 그를 보며, 그저 조용히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자, 다 됐소. 혹 잃어버리면 다시 동화 스무 개를 내고 재발급 받아야 하니, 어지간하면 돈 낭비하지 말고 잘 간수하시오. 뭐, 그쪽 실력이라면 은화짜리 의뢰도 곧잘 받겠지만 말이오.”

E급 용병 가젤.

나는 조명에 비쳐 반짝이는 금속으로 된 용병패를 품에 넣고선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만간 마왕군 본대가 넘어오면서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되면 용병이고 뭐고 곧 연합에 묶여 사라지게 될 터였지만, 그래도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로는 충분히 계속 써먹을 수 있었다.

뱀파이어는 다른 마족들과 달리 겉으로 보기엔 크게 티가 나지 않는 편이니, 이것만 있으면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는데 문제가 없으리라.

“그러니까, 이번에 파비앙 후작이 아주 특별한 노예를 손에 넣었다는 모양이야. 듣자하니 노예상한테서 금화를 3000개나 주고 사들였다더군.”

“그 노예수집가 파비앙 말인가? 듣기로는 하이엘프 노예도 몇 명이나 가지고 있다던데. 그런 양반이 특별하다고 할 정도라니, 뭐 전설속의 드래곤이라도 얻은 건가?”

“음, 그렇다고 하는 거 같던데? 정확히 말하면 드래곤은 아니겠지만….”

나는 건물을 나서려다 옆에서 들려온 얘기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드래곤?

진짜 드래곤이라면 이미 수백 년도 더 전에 멸종됐다고 알려진 터라 만나볼 수 없겠지만, 그 비슷한 거라면 짐작이 가는 놈들이 있었다.

뱀파이어와 함께 마계의 7대 종족 중 하나인, 강력한 마법능력과 저항력 그리고 튼튼한 육체를 갖춘 무시무시한 용족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못해도 수백만은 될 마왕군 내에서도 고작해야 스물이 안 되는 녀석들은, 적은 개체 수에도 불구하고 연합에 가장 막대한 피해를 끼쳤을 만큼 하나하나가 무지막지한 강함을 갖추고 있었다.

한때 사라진 드래곤들의 후손이라도 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돌았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용족이 노예로 잡혔다고?

“…이상하군.”

애초에 버림패로 넘어왔을 마족들 사이에, 그 강력한 용족이 끼어있을 리가.

곰곰이 이 몸뚱이의 기억을 떠올려봤지만, 단순히 정찰대로 보냈다고 하기에는 그 수가 꽤 되었던 터라 알 길이 없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이놈도 같은 7대 종족 중 하나인 뱀파이어면서 버려지듯 이곳에 떠밀려왔으니, 아주 가능성이 없는 얘기도 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켈빈 숲에서 산양 같은 뿔하고 검은 날개가 달린 이종족이 화전민 놈들 마을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모양이야. 만일 이게 사실이면 후작이 비싸게 쳐줄 게 같은데… 어때?”

“뿔하고 날개가? 으음… 세상에 그런 놈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뭐 동화책에서 나오는 악마들도 아니고 말이야.”

“어허, 드래곤도 잡힌 마당에 악마가 뭐 어때서? 잘 생각해봐. 어쩌면 금화를 백 개도 넘게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그, 금화를 백 개나?”

산양 같은 뿔에 검은 날개라.

용족에 이어 이번엔 발록인가.

명색이 7대 종족이라는 놈들 중에 뭐 이리 선봉으로 버려진 놈들이 많은 건지.

그래도 일단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어쩌면 아직 살아있는 놈들 중에 쓸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고, 훗날 연합 놈들을 제대로 엿 먹이기 위해선 마왕군에서 한 자리 차지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러려면 우선 내 공적을 증명해줄 녀석들을 만들어야겠지.

“거기, 아까부터 아주 흥미로운 얘기를 하고 계신 거 같던데. 혹시 저도 좀 껴도 되겠습니까?”

나는 곧장 열심히 상대를 설득하고 있던 남자에게 다가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슬쩍 끼어들었다.

“응? 어, 그게….”

“으음… 뭐, 화전민들이 모인 곳이라 작긴 해도 마을을 하나를 밀어버렸을 놈이니 사람이야 많으면 좋겠지만….”

나는 슬쩍 내 모습을 훑고선 난색을 표하며 에둘러 거절하려는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입술을 씹었다.

귀찮게.

이렇게 된 이상 그냥 혼자서라도 알아볼까.

“거기 호리호리한 형씨 실력이라면 내가 보증하겠네. 생긴 거랑 다르게 솜씨가 아주 기가 막히더구먼.”

그렇게 그만 자리를 피해, 켈빈 숲이라는 곳부터 좀 알아보려고 걸음을 옮기던 찰나.

저 멀리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이 이쪽을 가리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그래요? 뭐, 파벨 씨가 인정할 정도라면 실력은 더 볼 것도 없겠네.”

“음. 파벨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확실히 한가락 하는 모양이군. 좋소. 그러면 내일 아침 9시에 동문에서 봅시다. 보수는 공평하게 셋이서 정확히 나누도록 하고.”

나는 갑자기 확 달라진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며, 짐짓 놀란 표정으로 데스크 쪽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왕년에 귀족들한테서 러브콜 좀 받았다는 게 마냥 허풍은 아니었던 듯했다.

설마 저쪽에서 먼저 보수를 공평히 나누자고 권해올 줄이야.

옛적에 용병들은 자기 잇속 챙기는데 신물이 난 사람들이라고 들었는데.

“좋습니다. 그럼 그때 뵙지요.”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파벨을 향해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숙인 뒤, 곧장 길드 밖으로 나섰다.

발록이라.

커다란 덩치에 검은 뿔과 날개를 단 놈들은, 흔히들 악마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에 가장 어울리는 종족이었다.

강인한 육체와 준수한 마법적 능력을 바탕으로 끈질기게 달라붙어오는 녀석들은, 다들 용족 다음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모을 정도로 호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강자라면 그게 사로잡은 적이라고 해도 또 싸우게 될 날을 기대하며 풀어줄 정도라, 마왕군에서도 다루는 데 골치 좀 썩였더랬지.

상대하는 재미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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