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1]
[힘 : 5] [민첩 : 5][체력 : 7][마력 : 5]
척 보기에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능력치.
길바닥에 드러누운 노숙자들만 못한 절망적인 신체였지만, 내 입가엔 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뱀파이어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이상 자그마치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까지 산다는 장수종이 아닌가.
그 말은 즉, 수명을 대가로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이루어내는 상태창을 사실상 아무런 리스크 없이 써먹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까득-
나는 빌어먹을 연합의 수뇌부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비록 전에는 죽기 직전에야 놈들에게 완전히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터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기필코 다 죽여주마.”
나는 길게 자란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맺힐 정도로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며, 복수심을 불태웠다.
남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소환해놓고 이방인이라 배척하며 강제로 전선에 밀어 넣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런 끔찍한 저주를 축복인 척 속여 넘기다니.
언젠가 마왕을 암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며, 곧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서로를 다독이던 모습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가증스러운 놈들.
죄다 붙잡아 찢어 죽여, 그 사체를 개먹이로 던져 주리라.
“윽….”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곧장 근처에 있던 다른 시체 앞으로 다가갔다.
처음 깨어났을 때부터 엉망진창이던 몸을 전부 회복시키기 위해선, 몇 명은 더 피를 빨아야 될 거 같았다.
“우욱….”
하지만 막상 이를 박아 넣으려는 순간,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거부감에 우뚝 멈춰 섰다.
분명 아까 그 임프 녀석을 흡혈할 때만 해도 아무런 문제 없었는데.
조금 살만해졌다고 이제 와서 갑자기 거부 반응이라니.
빌어먹을 몸뚱이 같으니라고.
“큽….”
나는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내며 억지로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목구멍에서 자꾸만 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뱉어내려고 했지만, 난 기어코 몸이 받아들일 때까지 절대로 입을 떼지 않았다.
그 씹어 죽여도 모자랄 연합 놈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고작 흡혈 하나 못해서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덜떨어진 병사, ‘페리시’를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힘이 ‘1’ 증가합니다.]
“흐으….”
난 곧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들을 보고선, 이를 떼고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보아하니 흡혈이 단순히 상처를 치유하고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뱀파이어는 피만 먹어도 강해진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비록 대상이 나보다 더 강한 상대여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긴 했지만, 그 정도야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용사 시절, 도적으로 활동했던 내 특기가 바로 그거였다.
나보다 더 강한 놈들 넷이서도 잡지 못했던 나태의 마왕 휘하의 사천왕들마저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내 날붙이에 하나씩 픽픽 죽어 나갔으니까.
“크흐흐.”
좋군.
아무래도 생각보다 복수가 좀 더 수월해질 거 같았다.
툭-
나는 반쯤 말라붙은 시체를 바닥에 던지고선 주변을 둘러봤다.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번지는 인적이 드문 널따란 평야 한가운데.
아직 근처에는 시체를 던져놓은 구덩이가 몇 개는 남아있었다.
* * *
짤랑-
나는 시체들을 모두 털고서 두둑해진 주머니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끽해야 이런 보잘것없는 마족들한테 모두 당했을 정도로 형편없는 실력을 가진 병사들이니만큼 금화는커녕 은화조차 하나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열 명이 넘는 놈들의 주머니를 다 합치니 나름 써먹을 만한 액수가 됐다.
절그럭-
난 마지막으로 가장 상태가 멀쩡해 보이는 검 하나를 골라서 허리춤에 채운 뒤, 시체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1]
[힘 : 13] [민첩 : 12][체력 : 16][마력 : 7]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자그마치 26이나 오른 능력치를 보고 있자니 절로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비록 그래 봤자 이제야 평범한 병사들과 다를 바 없는 수준밖에 못됐지만, 처음 그 길가의 걸인만 못한 몸뚱이에 비해선 장족의 발전이었다.
검 한 번 휘두르기를 낑낑대야 하는 몸으로 강해져야 하는 것과, 적어도 변변찮은 무기 하나라도 쉬이 다룰 수 있는 수준으로 시작하는 건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정지! 신원과 용건을 밝히시오.”
금방 큰길로 빠져나와 자그마한 도시 앞에 도착해 줄을 선 나는, 성문을 지키며 검문을 하는 병사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떡하지?
용사 시절에는 딱히 신분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냥 지나가면 됐지만, 생각해보니 지금은 마땅히 내 신원을 증명할 패조차 하나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이제 거의 다 차례가 와서는 수상쩍게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나.”
나는 과거 전쟁 초기 마왕군에게 마을을 잃은 화전민 출신으로 시작해 기사까지 올랐던 남자에게 얼핏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전쟁 전의 평화로웠던 시기에는 그다지 검문을 빡빡하게 하지 않았기에, 보통 적당히 돈 좀 쥐여 주면 들여보내줬다고 했던가.
“다음!”
어느새 차례가 돌아 경비병의 앞에 선 나는, 적당히 동화 세 닢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이거 참, 날도 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신원과 용건.”
…싸가지 없긴.
나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나갔는데도 오히려 인상을 팍 쓰고선 선을 그으려는 녀석을 보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자르드에서 온 가젤이라고 합니다. 도시에는 일거리가 좀 있지 않을까 싶어 오는 길입니다.”
난 옛적에 주워들었던 마을이름을 밝히며, 병사로부터 뺏어 찬 검을 톡톡 가리켰다.
“자르드? 아, 동쪽에 있는 그 작은 마을 말이군. 그래, 자르드의 가젤. 용병인가? 신분패를 보여라.”
“하하… 그것이, 제가 오던 길에 도둑을 맞아서….”
나는 신분패를 요구하며 내민 경비의 손에 아까 꺼내 들었던 동화를 쥐어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약소하지만 나중에 맥주라도 한 잔 사는데 보태시지요.”
“흠흠. 거 아무리 그래도 신분은 확실하게 증명해야 들여보내주지 않겠소. 혹 그쪽이 안에 들어가서 사고라도 치는 날엔, 우리가 책임을 져야한단 말이오.”
나는 슬쩍 자신의 동료가 받은 동화를 살피고선 목을 가다듬으며 한 마디 건네는 경비병을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뒤에서 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도록 슬쩍 한 손을 이쪽으로 빼고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자기한테도 달라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놈들.
벼룩의 간을 빼먹어도 유분수지.
급여보다 이렇게 뒷구멍으로 해먹는 돈이 더 많겠어.
“너무 그리 걱정하지 마시지요. 얌전히 있다 가겠습니다.”
“으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구려. 좋소, 들어가시오. 다음!”
난 결국 그의 손에도 동화 세 닢을 얹혀주고 나서야 도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의 곁을 스치듯 지나간 나는, 성문을 지나기가 무섭게 곧장 저 멀리 눈에 들어오는 광장을 향해 걸었다.
쏴아아-
금방 광장에 도착해 잠시 중앙의 분수대에 걸터앉은 나는, 품에서 꽤 묵직하게 부푼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짤그랑-
“쯧. 많이도 해먹었군.”
동화가 스물에 은화도 하나 섞여있나.
설마하니 눈을 감아주는 몫으로 은화를 받았을 것 같지는 않고, 그냥 평소에 쟁여놓던 비상금 같은 거겠지.
슬슬 눈치 챘으려나.
받아 챙긴 돈을 넣어야 할 주머니가 사라졌으니, 지금쯤이면 꽤나 당황하고 있을 테지.
그래 봤자 근무시간이라 제멋대로 자리를 비울 수도 없을 테고, 그저 그 성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으리라.
딸랑-
나는 주머니를 다시 품에 집어넣고선 근처 주점으로 들어왔다.
마왕군 침공 이전의 일에 대해선 그다지 아는 바가 많진 않았지만, 그래도 전쟁통에 주워들었던 얘기들 중에 지금 써먹을만한 게 좀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이곳이 어디인지, 또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를 알아야만 했다.
“여기 맥주랑 괜찮은 안주 하나만 좀 주시오.”
“맥주랑 안주 하나. 조금만 기다리쇼. 금방 내올 테니.”
아무래도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을 시간인지라, 손님이라고는 지금 막 들어온 나를 포함해 세 명밖에 없었다.
적당히 빈 테이블에 앉아 주문을 마치고서 기다리기를 잠시.
나는 금세 달짝지근한 냄새를 풍기는 꼬치안주와 함께 나온 맥주를 들이키며, 주인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거 뭐 좀 물어도 되겠소?”
“좋을 대로 하쇼”
“음. 내가 오늘 막 시골에서 올라온 참이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여기가 어딘지 좀 알 수 있겠소?”
“…뭐요?”
딱히 손님도 남은 주문도 없고 내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은 주인장은, 내 물음에 당황한 듯 멍하니 눈을 꿈뻑였다.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구먼. 그럼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왔다는 말이요?”
“뭐든 제대로 배우려면 일단 도시로 가란 말이 있지 않소? 그래서 그냥 가장 가까이 보이는 도시로 왔을 뿐이라오.”
그는 허리춤에 찬 검을 톡톡 두드리며 답하는 나를 보고선,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뭐 잘 알아보지도 않고 어디서 이상한 소리나 듣고선 무작정 도시로 올라오다니. 이건 뭐 어디 가서 돈이나 떼먹히지 않으면 다행이겠구먼. 어쨌든 맥주 말고 안주라도 하나 팔아줬으니, 다음 손님이 오기 전까진 좀 어울려드리리다.”
* * *
“잘 먹었소.”
“무얼. 궁금한 게 있으면 또 오쇼. 그때도 사람이 없으면 아는 선에서 다 답해드리리다.”
딸랑-
음식 값을 지불하고 주점을 나온 나는, 그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며 큰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제국력 116년이라….”
내가 용사로 소환됐던 해가 120년이었고 첫 용사 소환이 마왕군에 맞서 연합이 결성된 직후였으니, 아직 본대가 넘어오기까지 일 년 가까이 시간이 남은 셈이었다.
“흐흐흐….”
그 말은 아직 인간, 엘프, 드워프, 수인의 네 나라가 연합조차 이루지 않은 때라는 얘기겠지.
그렇다면 미리 이들 사이를 이간질해놓는 것만으로도 훗날 연합을 이룰 적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으리라.
분명 제국 서쪽, 엘프들의 엘븐하임과 국경이 맞닿은 지역에 엘프들이 몇몇 넘어와 살고 있었다고 했었지.
“그래… 에리안이라고 했던가.”
나는 에리스, 내 미간에 화살을 박아 넣은 그 빌어먹을 귀쟁이를 떠올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허구한 날 에리안, 에리안.
뭐만 하면 그놈의 자기 동생 자랑을 늘어놓느라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지.
그리고 분명, 그 동생이라는 년이 전쟁 전에 잠시 제국에 나가있었다고 했던가.
보통 인간들을 싫어하는 엘프들과 달리, 유별나게 그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던 철없는 하이엘프.
배다른 어미를 둔 자신의 동생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이복언니.
아쉽지만 이번에는 그 눈물겨운 자매애를 끊어야 할 시간이었다.
“부디 곧 보낼 선물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죽기 직전, 마치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빌어먹을.
기다려라, 곧 그 빌어먹을 상판대기가 펴질 날이 없도록 만들어줄 테니까.
난 삐뚤어진 미소를 지으며, 용병 길드라고 적힌 간판이 올라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일을 시작하기 전, 약간의 준비를 마치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