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죽어라, 마왕!”
짧은 기합과 함께 쏜살처럼 달려 나간 영호의 창이 릴리스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과연, 그 둘을 죽인 게 마냥 우연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막 허리춤에서 채찍을 뽑아 들려던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다가온 창날에 손을 거두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파앙-!
“칫….”
“그렇게는 안 되지.”
이윽고 거리를 벌리기 위해 날개를 펼치려던 녀석의 머리 위로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서큐버스인 녀석의 특기는 강력한 정신마법과, 빠르고 날카로운 채찍술.
둘 다 지근거리에선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미리 짜온 작전대로, 쉼 없이 놈을 몰아붙였다.
“마르코스!”
“알고 있어, 헨리!”
헨리와 마르코스.
두 쌍둥이는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는 릴리스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계속해서 시퍼런 검기를 휘둘렀다.
“좋아, 그대로 붙들고 있어.”
나는 다섯이 녀석을 압박하는 동안, 몰래 뒤로 돌아가 놈의 등을 노리고 단검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성가시게… 읏!”
펄럭-
“…스쳤나.”
난 시커먼 독액이 묻은 날이 살갗을 파고들기 직전, 황급히 날개를 펼치며 허공으로 도망친 녀석을 보고선 아쉬움에 짧게 혀를 찼다.
역시, 무투파가 아니라도 마왕은 마왕이라는 건가.
쉽게 당해주질 않는군.
“전설! 어떻게 됐어?”
“제대로 찌르진 못했지만, 긁혀서 상처가 났으니 얼마 못 가 떨어질 거다. 달라지는 건 없어. 여기서 놈을 잡는다.”
나는 새카만 날 끝에 묻어 흐르고 있는 붉은 핏물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한 방울이면 그랜드 마스터조차도 얼마 못 가 칠공에서 검은 피를 쏟아내며 죽는다는 극독이다.
앞으로 놈이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는 건 길어야 5분 정도일 터.
[동료와 함께 터무니없이 강한 적을 상대로 몰아붙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민첩이 ‘1’ 증가합니다.]
“큿….”
독에 당한 녀석이 입술을 꾹 깨물며 양쪽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간간이 아래에서 내질러오는 날붙이들을 피해 어떻게든 채찍 뽑아 휘둘렀지만, 다들 가볍게 다리를 놀려 그녀의 공격을 피해냈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들!”
“천천히 몰아붙여! 아직 시간은 많아!”
릴리스는 마법까지 써가며 반항해왔지만, 제아무리 마왕이라고 한들 독에 중독된 상태로 지금도 여신의 축복으로 인해 더욱더 강해지고 있는 우리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게 서서히 놈을 말려 죽이기 위해, 퇴로를 막으려 대열을 갖추던 찰나.
“좋아, 민첩이 더 올랐으니 이젠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던 것도… 커헉!”
“헤, 헨리!”
갑작스레 헨리의 신형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헨리! 왜 그래? 헨, 그륵….”
“뭐, 뭐야? 대체 무슨 일… 컥!”
“컥, 어윽….”
곧이어 나머지 세 사람도 차례차례 풀썩 쓰러졌다.
마치 누군가 꼭두각시 인형의 실을 잘라낸 듯, 아무런 전조도 없이 말이다.
“마, 말도 안 돼… 마르코스, 라엘라, 영호….”
나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당연히 마왕을 쓰러트리고, 생포해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네년… 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거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거짓말. 그럼 이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자기 혼자 픽픽 쓰러져나가기라도 했다는 거냐!”
나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슬슬 독이 퍼지는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내려온 릴리스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녀 또한 정말로 당황한 듯,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내 동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어찌 이리 끔찍한….”
녀석은 곧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젓고선, 인상을 찌푸리며 에리스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래, 그런 거였나. 어쩐지 이방인이라는 놈들이 하나 같이 너무 빨리 강해진다 싶더니. 연합 놈들. 아주 더러운 수를 쓰고 있었구나. 이토록 끔찍한 저주라니.”
“뭐? 저주?”
저주라니.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뱉는 릴리스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럴 리가 없다.
우리가 원주민들보다 빨리 강해질 수 있었던 건 여신의 축복이 있었기에…
피슛-
“큭!”
“에리스!”
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릴리스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화살을 보며, 곧장 뒤를 돌아봤다.
“전설 씨! 마왕의 간계에 놀아나지 마세요!”
간계…
나는 곧바로 다음 화살을 시위에 메기는 에리스를 말없이 바라보다, 파리해진 안색으로 찢어진 어깨를 붙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릴리스와 바닥에 차게 쓰러진 동료들을 번갈아 보았다.
“하아, 하아… 불쌍한 것. 그간 연합의 장기 말로 이용당한 걸로도 모자라, 제 처지가 어떤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냐. 강해질 때마다 제 수명을 깎아 먹는 저주라니. 참 악질이군. 그렇지 않아도 찰나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수명을….”
“저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계속 듣고만 계실 거예요? 시간이 없어요. 곧 근처에 있는 마족 놈들이 들이닥칠 거예요!”
콱-
“전설!”
난 곧이어 날아온 화살을 중간에 낚아채며, 더이상 버티기 힘든지 바닥에 쓰러진 릴리스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방금 그 말, 전부 사실이냐?”
“후욱, 흐으….”
“말해!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나는 핏발이 선 눈으로 그녀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울컥하고 시커먼 피를 한 움큼 뱉어낸 녀석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그 시뻘건 눈동자로 흔들림 없이 나를 마주보았다.
“보아하니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는 모양….”
푹-
“…에리스!”
난 말을 꺼내다 말고 미간에 구멍이 뚫려버린 마왕을 보며, 바로 내 뒤에 서서 활을 집어넣고 있는 에리스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방금 그 말, 사실이냐? 연합이 말한 여신의 축복이 수명을 대가로 쓰는 저주였다는 게!”
나는 대답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그녀를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에, 에리스… 너, 너….”
어렴풋이 무언가 이상하다고는 느끼고 있었다.
분명 나보다 앞서 용사로 불렸던 이들의 죽음.
왜 그토록 많은 이방인들이 그랜드 마스터의 벽을 앞두고 모두 세상을 떠났는가.
어째서 연합은 그들을 모두 사지로 내몰았는가.
하지만 그만큼 전선이 위태로웠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헌데…
“에리….”
푹-
가슴 깊이 끓어오르는 분노에 악귀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악에 받친 소리를 내뱉던 나는, 갑자기 목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통증에 슬며시 눈을 아래로 내렸다.
“컥….”
난 내 목을 뚫고 나온 날카로운 화살촉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수많은 화살이 연이어 내 몸뚱이에 틀어박혔다.
“에리스 님! 이제 가야 할 시간이십니다.”
나는 무심하게 나를 지나치고선 에리스의 앞에 무릎을 꿇는 엘프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오늘 출정할 때만 해도 반짝이는 눈으로 몇 번이고 존경의 말을 내뱉던 녀석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슬쩍 훑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늘 그랬던 대로 처리해.”
“예, 알겠습니다.”
휘익- 휙-
난 태연히 명령을 내리고선 천천히 기울어지는 내 몸뚱이를 내려다보며 조소를 짓는 에리스를 보며 무어라 저주의 말이라도 내뱉고 싶었지만, 피거품으로 가득 찬 입안에선 그저 맥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왜, 그동안 같이 다녀주니까 네까짓 게 정말 뭐라도 된 줄 알았어?”
촤악-
나는 내 몸에 박힌 화살을 하나 우악스럽게 뽑아내고선, 시뻘건 피를 뚝뚝 떨어트리는 화살촉으로 내 머리를 겨누는 그녀를 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하찮은 이방인 주제에.”
에리스는 진심으로 역겹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손을 움직였다.
난 두 눈을 부릅뜬 채, 이 빌어먹을 하이엘프의 모습을 끝까지 노려보았다.
복수하리라.
눈앞의 엘프도, 그간 우리를 속이고 장기 말로 이용해먹은 망할 연합의 쓰레기들도 모두 다.
악령이 되어서라도 기필코, 지옥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리라!
푹-
* * *
“허윽….”
나는 전신을 마치 불에 달군 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끔직한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슬며시 눈을 떴다.
“괴, 로워….”
숨을 헐떡이며 몸부림치던 나는, 눈앞의 모래를 움켜쥐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아윽!”
한 걸음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무언가에 걸려 다시 엎어진 나는, 온몸을 찌르르 울리는 격통에 짧은 비명을 터트렸다.
곧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을 살핀 나는, 아래에 깔린 장애물의 정체를 확인하고선 두 눈을 깜빡였다.
“…시체?”
죽은 지 얼마 안 된 모양인지, 아직 굳지 않은 피가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읏, 어째서… 하아….”
나는 코끝을 간질이는 비릿한 혈향에, 본능적으로 입을 벌려 시체의 목에 이를 박아 넣었다.
“아, 아아아….”
꿀꺽-
달콤해…
나는 목을 타고 넘어가는 뜨뜻한 액체가 점점 배를 채울수록, 고통이 가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푸하….”
툭-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미라처럼 삐쩍 마른 시체를 바닥에 놓고선, 만족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분명 에리스에게 죽임을 당한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
말똥말똥 정신이 돌아온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황할 만도 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방금 전의 흡혈로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덕에 흘러들어온 기억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에릭 가이오스.”
일곱 마왕을 배출해낸, 마계의 강력한 장수종 중 하나.
뱀파이어의 귀족 가문인 가이오스가의 셋째.
자기보다 어린 동생에게는 물론, 보잘것없는 사용인에게도 멸시받는 가문의 그리고 종족의 수치.
피를 두려워하는 반쪽짜리 뱀파이어.
가문에서 내쫓기듯 정찰대라는 이름의 허물만 좋은 버림 패로 마계에서 쫓겨난 쓰레기.
이게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난 죽음 이후 그의 몸에 들어오게 된 모양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임프, ‘레기시’를 흡혈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체력이 ‘2’ 증가합니다.]
“음? 이, 이게 왜 아직도….”
그것도 상태창이라는 저주를 그대로 간직한 채, 마왕군 침공 이전의 과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