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남들처럼 평범하게 군대를 제대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복학을 준비하던 나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던 귀갓길에 난데없이 낯선 타지로 떨어지게 되었다.
“뭐, 뭐야? 여긴 어디야?”
“난 분명 집에 돌아가려고 지하철을 타고 있었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처음 보는 풍경을 둘러보던 내 눈에 비친 것은, 나와 마찬가지로 당황한 듯 연신 주변을 살피는 이들과 저 멀리 보이는 단상 근처에 중세 유럽에서나 볼 법한 육중한 갑옷을 입고 서 있는 수상한 사람들이었다.
“…뭐야 이거 지금? 막 어디 촬영장 같은 건가?”
“저 사람들은 누구야? 스텝인가?”
“조용!”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잔뜩 혼란스러워하던 사람들은, 단상 앞에 선 기사의 외침에 흠칫 몸을 떨며 그쪽을 돌아봤다.
“정신 차렸으면 그만 떠들고 빨리 움직여라. 다들 이 앞에서 줄을 맞춰 선다.”
쿵-
그는 등에 지고 있던 철퇴를 뽑아 바닥을 내리치며 가만히 우리를 바라봤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에 다들 덜컥 겁을 집어먹고선 주춤주춤 기사의 말대로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갑자기 웬 이상한 곳에 떨어져서 머리 아파 죽겠는데, 뭐? 여기가 무슨 군대고 아니고, 그쪽이 뭔데 우리 보고 이래라 저래라야. 아니, 그보다 그 꼴은 또 뭐요? 그게 그 코스프레인지 뭔지 하는 그건가? 당신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이 요상한 곳으로 데려온 건진 모르겠지만, 이거 범죄야 범죄! 납치라고!”
“그래, 맞아! 우린 그쪽들 장단에 맞춰줄 시간 없으니까, 빨리 풀어주고 돌아가는 길이나 알려달라고!”
“우리 아빠가 누군지는 알고 이런 짓을 벌인 거예요? 당장 돌려보내 주지 않으면 당신들 다 감방에서 평생 썩게 만들어줄 테니까 각오해요!”
하지만 그중에 몇몇 정신을 차린 이들이 이 부조리한 처사에 잔뜩 성을 내며 따지기 시작하면서, 단상 앞으로 향하던 사람들까지 걸음을 멈추고 점점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쯧. 이번엔 좀 조용한 놈들이 왔나 했더니, 이래서 이방인 놈들은….”
결국 다시금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진 공간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젓던 기사는,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와 가장 처음 불만을 드러냈던 나름 거대한 체구의 남자 앞에 섰다.
“계속 그렇게 입 닫고 있을 거요?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어서 돌아가는 길이나….”
쩌억-
“아, 아아아악!”
“꺄아아악!”
“조용.”
그는 마치 두꺼운 철판 같은 신발 끝으로 남자의 정강이를 강하게 걷어차고선, 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흐으윽… 다, 다리… 내 다리가… 커, 컥! 컥….”
“히, 히익….”
뼈가 부러졌는지 그새 퉁퉁 부어오른 정강이를 붙잡고 눈물콧물을 질질 흘리는 남자의 가슴팍을 꾹 밟으며 말없이 단상 앞을 가리키는 기사의 모습에, 그제야 다들 무언가 상황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서 재빨리 줄을 맞춰 서기 시작했다.
“다해서 몇이지?”
“총 오백일흔아홉입니다.”
“이번엔 좀 많군. 좋아, 지금부터 너희들을 부른 이유를 설명하겠다.”
뒤늦게 깽깽이발로 뛰어와 힘겹게 가장 뒷줄에 붙은 남자를 마지막으로, 단상 가운데에 올라가 있던 노기사의 설명이 시작됐다.
평화롭던 대륙, 갑작스러운 마왕군의 침공.
이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연합군은, 고민 끝에 다른 세상에서 자신들을 도와줄 이방인들을 소환했다고 한다.
[여신의 축복, 상태창이 활성화됩시다.]
“뭐, 뭐야 방금?”
“눈앞에 웬 글자가….”
“여신님께서 너희 나약한 이방인들에게 친히 내려주시는 축복이다. 그것만 있으면 이 땅의 그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지. 감사한 줄 알도록.”
그는 축복을 이용해 충분히 강해져 마왕군을 이끌고 있는 일곱 마왕을 모두 처치하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허억, 헉….”
“이건 미친 짓이야! 무기를 만 번이나 휘두르라니!”
“고작 이걸로 앓는 소리하지 마라! 마왕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렇게 나를 포함한 수백 명의 사람들은 강제로 무기를 손에 쥐었다.
매일매일 지독한 훈련이 우리를 기다렸다.
끼니마다 배식되는 맛대가리 없는 꿀꿀이죽을 몇 번이나 게워내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밤새 끙끙 앓기를 반복했다.
물론 중간에 너무 힘들어서 밤새 몰래 도망친 사람들도 많았으나, 그들은 모두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주린 배를 부여잡으며 돌아와야만 했다.
“아윽….”
“가만히 좀 있어! 약이 지워지잖아!”
매일 연고와 붕대를 달고 살았다.
하루라도 좋으니 푹 쉬고 싶었지만, 훈련에 나오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지워지면 다시 바르면 되지. 왜 그런 걸로 성을 내고 그래, 라엘라.”
“뭐? 야, 이것도 이제 사흘 치밖에 안 남았어. 다음 보급까지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되는데….”
“사흘… 벌써 그렇게나 많이 썼단 말이야?”
그래도 같은 처지에서 고생하는 동료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날붙이가 무섭다며 고민 끝에 활을 집어든 라엘라.
처음에 검을 들었다, 초심자에겐 창이 가장 익히기 쉬울 거라는 교관의 말에 흠뻑 넘어가 단창을 잡은 이영호.
나를 포함한 셋은 매일 가축처럼 축사 한구석에 박혀 밤을 보냈다.
그나마도 우리는 형편이 좋은 편이었다.
덮고 잘 짚더미라도 옆에 있었으니까.
“흐흐, 흐흐흐….”
“넌 뭘 잘했다고 그렇게 웃어!”
짜악-!
“아악! 쓰읍… 야, 나 환자야 환자.”
“그러니까, 왜 쓸데없이… 어?”
“야, 약이잖아! 그리고 전투식량까지… 저, 전설이 너 그거 어디서 난 거야?”
“점심때 자고 있던 교관 주머니에서 슬쩍했어. 두둑해 보이는 게, 한두 개 정도는 빼와도 괜찮을 거 같더라고.”
“쩌, 쩐다! 안 들켰어? 어떻게 한 거야? 다음에 나도 가르쳐주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빌어먹을 곳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풋내기 이방인 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카앙-!
“져, 졌습니다.”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 승리를 이루어내셨습니다.]
[힘이 ‘1’ 증가합니다.]
“허억, 헉….”
처음 단상 가운데 섰던 기사가 했던 말마따나, 여신의 축복은 고작 몇 달 만에 십수 년을 검에만 매달려온 기사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 만큼 빨리 강해질 수 있게 해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날붙이를 손에 쥐는 게 어색했던 우리는, 금세 전장에서도 충분히 몇 사람 몫은 해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훌륭하군, 아주 훌륭해! 자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전설입니다.”
“전설… 으하하! 그래, 과연 이름만큼이나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군. 아직도 한 사람 몫을 못하고 밥만 축내는 다른 이방인들이랑은 달라! 이번 기수들 중에 단연 최고… 아니, 여태껏 내가 봐온 모든 이방인들 중에서 첫째라 할 수 있겠어. 어쩌면 네가 우리의 숙원을 이루어줄 용사일지도 모르겠구만.”
기사단장이라는 노인네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그날부터, 우리는 다른 이들과 달리 짐짝 취급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실력 있는 자는 대우받을 수 있다.
우린 그날 처음으로 축사를 벗어나 허름한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그간 먹여주고 재워준 은혜를 갚을 시간이다!”
훈련소를 졸업하면 곧장 전장으로 보내졌다.
웃기게도 마차를 타고 사지로 끌려가던 그때가,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마음 놓고 쉬어본 순간이었다.
그마저도 자리가 없어, 그간 두각을 드러낸 몇몇을 제외하고선 모두 닳은 신발로 몇 달을 하루에 열 몇 시간이나 걸어야 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선 다행스럽게도, 나는 단검술과 암행에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라엘라, 한센 아저씨는….”
“…죽었어. 마법인가, 그 불덩이에 맞아서.”
전장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오백이 넘던 이방인들 중 절반이 사흘을 버티지 못했다.
“내가, 내가 바보 같이 멍하니 서 있는 바람에….”
“네 잘못이 아니야, 라엘라!”
“아니, 내 잘못이야. 내가 정신만 바짝 차렸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하루, 이틀.
우리는 매일 전쟁터 속에서 사선을 넘으며 각오했다.
강해지겠다고.
그 누구보다 강해져서, 이 빌어먹을 전쟁을 끝내고 반드시 안락했던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가겠다고.
[끊임없는 적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생존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체력이 ‘3’ 증가합니다]
“오오… 전설 님, 라엘라 님, 영호 님! 무엇들 하느냐! 구국의 용사님들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는데, 어서 받들어 모시지 않고!”
“라엘라, 전설. 봤어? 황제 폐하께서 직접 우리를 맞으러 나오시다니. 그 궁둥이 무거운 양반이 웬일이래? 진짜 우리가 출세하긴 출세했나 보다.”
“그러게. 이 정도면 굳이 지구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는데?”
“…라엘라.”
“치, 농담이야. 농담.”
강해질수록 점점 좋아지는 연합의 대우에 잠시 마음이 다른 곳에 가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우린 다시금 서로를 격려하며 각오를 다졌다.
“릴리스, 네 목을 가지러 왔다.”
그렇게 7년.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에 걸쳐서도 닿지 못한 경지를 고작 몇 년 만에 닿을 수 있었다.
자그마치 여럿이서 마왕을 암살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너희구나. 마몬과 벨제붑을 죽인 아이들이.”
나를 비롯해 이곳에 모인 이방인의 수는 다섯.
하나 같이 연합군에서 각 종족의 정점이라 불리는 그랜드 마스터에 비견될 정도의 강함을 쌓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거기에 우리를 도와 그간 암살 임무에서 합을 맞춘, 엘프의 그랜드 마스터 에리스까지.
나는 과연 색욕의 마왕답게 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팍 구기는 그녀를 보며, 옆에선 동료들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라엘라, 영호, 헨리, 마르코스. 그리고 에리스. 빨리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다.”
“이 녀석까지 처리하고 나면 이제 네 명만 남는 건가.”
“빨리 다 끝내고 좀 쉬었으면 좋겠네.”
우리는 말없이 접어놨던 날개를 펼치며 천천히 손을 올리는 릴리스를 보고선, 슬슬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부디 다치지 않게 조심해요.”
“걱정 마, 에리스. 금방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뒤로 물러서 화살을 메기는 에리스를 두고서, 천천히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았다.
곧 있을 소란에 대비해 릴리스를 죽일 시간을 벌어줄 엘프들의 실력을 생각하면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10분 남짓.
“가자.”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저마다 무기를 꼬나 쥐고서 릴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