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요한은 다크 엘프와 인어 종족이 부탁하는 의뢰를 수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 엘레노아와 함께하는 시간을 줄인 건 또 절대 아니었다.
요한은 엘레노아와 쭉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비 신부는 예비 신랑보다도 훨씬 바쁜 몸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요즘엔 혼자 노는 게 재미가 없단 말이지.’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혼자 조용히 휴식하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다.
하지만 어쩐지 요즘엔 유달리 혼자 있는 게 외롭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외롭다고?’
부모님이 막 돌아가셨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오묘한 감정이었다.
‘나는 혼자 있는 게 익숙한 사람 아니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전했다.
그는 대인 기피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었으니까.
그의 인생에서 그가 쳐 놓은 바운더리 안에 들어왔었던 인물은 오직 유나와 미연 엘레노아 딱 3명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중 1명인 엘레노아가 그의 가치관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그렇다고 해서 나쁜 감정이 드는 건 아니었다.
그저 외롭다는 감정에 신기할 따름이었다.
‘후우, 차원 마스터가 됐어도 여전히 나는 인간이구나.’
오히려 안심되기도 했다.
어떨 때는 자신이 정신병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으니까.
덕분에 정신병자가 아니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니면, 차원 마스터가 되면서 정상이 됐던가.’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신과 비슷한 존재가 되었더니 오히려 더 인간적인 사람이 되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쩐지 최근에 욕심이란 게 생기기 시작했었지.’
그는 지금까진 별다른 욕심이란 게 없었다.
특히 자리 욕심이나 명예욕은 더더욱.
하지만 차원 마스터가 된 이후엔 슬슬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K&S를 유나한테 양보했냐고?
단순히 돈에 대한 욕심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탕탕-!
“자자, 다들 정숙해 주시고 금일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극동 아시아 지역 담당자님?”
“아아, 저희 극동 아시아 지부는 아시다시피 중국의 피해가 가장 막심합니다. 지금은 되찾았지만, 북경과 상해가 함락된 탓에 피해가 가장 막심합니다. UN의 긴급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푸핫! 이봐요, C. 지금 장난합니까?”
극동 아시아 지부장이 대답한 동시에 흑인 여성 1명이 폭소를 터트렸다.
“뭐요?”
극동 아시아 지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C지부장의 발언은 극동 아시아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조국인 중국을 대표하는 사람의 발언이었어요. 당신이 자랑스러운 대(大)중국인인 건 알겠는데. 당신은 지금 이곳에 중국 대표가 아니라, 극동 아시아 대표로 와 있는 거란 걸 잊지 않았으면 하는데요?”
“뭐라고, 이 천박한 X이. 뭐?!”
“뭐, 천박한 X? 대두 주제에!!”
둘의 감정싸음이 격해지려고 하고 있었다.
탕탕-!
“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 이곳은 감정싸움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C와 M 두 분은 자중해 주세요.”
“흠흠.”
회의가 열릴 때마다 벌어지는 감정싸움이었다.
지금 전 세계는 복구 작업에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고 있었다.
선진국, 후진국 할 것 없이 대대적인 비용이 필요했다.
마석을 팔아서 충당하면 안 되냐고?
복구 작업에 가장 막대한 소모가 되는 것이 바로 마석이었다.
기계를 돌리거나 복구 작업에 드는 에너지를 보충할 때 마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집을 잃고 떠도는 유민들도 구호해야 했고,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도 거둬들여야 했다.
돈 들어갈 곳, 마석 소모는 나날이 늘어 가는 데 포탈 폭주로 헌터의 숫자는 적게는 1/3, 많게는 1/2이 날아간 나라도 있었다.
또 복구 작업에 헌터가 동원되기도 했는데, 필요한 마석은 많으니 미칠 노릇.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C지부장이 말씀하신 지원금은 당장 무립니다. 우리 연합에서도 이번 폭주 사건 때 너무 많은 것을 잃지 않았습니까. 이곳 본부까지 점령당했지요. 그래서 직접적인 자금이나 마석 지원은 힘듭니다. 그것 말고 뭔가 획기적인 아이디어 없으십니까?”
"......."
"......."
지원금은 제외하라고 하니 할 말이 없어진 지부장들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꾹 다문 입술이 좀체 떨어질 줄 몰랐다.
“하아.”
연합의 국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부장들이 한심해서가 아니었다.
그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번 문제는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란 것을.
하지만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이대로 둔다고 해도 언젠가는 해결될 문제였다.
인구는 다시 늘어날 테고 천천히지만 마석은 꾸준히 공급되고 있었다.
인류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 정도 복구 속도라면 해결이 될 때까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희생될 수도 있었다.
이미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소국들 같은 경우엔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이번 재앙으로 인해서 공장이 파괴되고 유통 라인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나라라면 어느 정도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은 가난한 나라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복구 작업 중에 십수 개의 나라가 사라질 판이었다.
말 많고 탈 많은 온두라스는 이미 인구의 2/3가 대대적인 탈온두라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끄응.”
국장은 답답해 아무것도 없는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냉수를 들이켰다.
그때였다.
샤아아아-!
그때 국장은 뭔가 차갑고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휙-!
“후후후.”
“으헉!”
“으악!”
갑자기 회의실 한쪽에서 누군가 나타나자 국장과 지부장들은 뒤로 넘어갈 정도로 깜짝 놀랐다.
이곳은 연합 본부 내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보안이 철통같은 곳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곳이 누군가에게 뚫린 적이 없었다.
포탈 폭주 때도 본부는 지켜 냈고, 본부 안까지 뚫렸을 때도 회의실만큼은 지켜 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곳에 갑자기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나타났으니 기겁하지 않으면 이상하리라.
“다, 당신은?”
그나마 국장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미스터 킴?”
“뭐, 킹이라고?!”
“키, 킹?”
요한의 정식 별명은 역시 유럽에서 떨친 위명인 킹!
왕이라는 별명은 어지간하면 붙지 않는 문화임에도 요한의 강력함은 그런 문화도 무시할 정도였다.
어쨌든 세계 최강의 헌터의 등장에 놀라움과 당황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했다.
적어도 킹은 블랙 헌터는 아니었으니까 그들의 목숨을 앗아 갈 일은 없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아아, 들리십니까?”
“예?”
“아, 다들 너무 놀라지 마시고요. 이건 제 본모습이 아니라, 홀로그램 같은 겁니다.”
더 정확히는 환영이라는 스킬이었지만,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쉬운 단어를 채택했다.
“호, 홀로그램?”
“그, 그걸 어떻게?”
“그리고 어떻게 이곳에?”
의문이 드는 게 하나둘이 아니었다.
요한은 네크로맨서로 홀로그램 스킬을 쓸 수 있는 클래스도 아니지만, 문제는 이곳에 어떻게 흘로그램을 보냈느냐가 더 의문이었다.
‘이곳 위치를 아는 사람은 여기 있는 사람이 전부인데?’
삐질삐질-.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도대체 킹은 모르는 게 뭔가.......'
가장 경이로우면서도 두려운 존재였다.
“아아,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제안할 게 있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제안 말입니까?”
“하하, 네. 들어서 절대 나쁠 거 없을 겁니다.”
“흠흠, 들어 보도록 하지요. 모두들 자리에 앉아 주세요.”
“끄응.”
“알겠습니다.”
드르륵-! 힐끔-!
지부장들은 요한에 대한 두려움으로 힐끔거리며 뻣뻣하게 자리에 앉았다.
“무슨 제안입니까?”
“여러분들이 가장 필요한 게 돈 혹은 마석 아니겠습니까?”
“아, 뭐……. 흠흠.”
국장은 당장이라도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 싶었지만, 약점을 함부로 내밀 수는 없었기에 초인적인 힘으로 막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아주 괜찮은 제안이 있는데, 제가 여러분들이 필요한 마석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그런!!”
“그게 정말입니까?”
“후후, 네. 당연하죠. 물론 공짜는 아니지만.”
“흠흠, 저희도 정말 탐이 나는 제안이긴 하지만, 마석을 살 만큼 재정이 풍부한 국가는 몇 없습니다.”
현재 재정 상황이 좋은 나라는 이탈리아뿐이었다 .
하필이면 G3 국가인 미국, 중국, 한국도 아니고 이탈리아냐고?
이탈리아는 특이하게 영토, 헌터 대비 포탈 밀집도가 낮은 국가였기 때문이다.
보통 포탈 밀집도가 낮은 국가는 영토가 작거나 땅은 큰데 인구가 적은 국가였다.
때문에 헌터의 질도 별로였고.
하지만 이탈리아는 영토도 작지 않고, 인구도 많아서 헌터 수준이 괜찮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포탈 밀집도가 굉장히 낮은 편.
이탈리아가 예전과 비교하면 유럽 내에서 힘은 별로였다.
헌터 수준은 비슷했지만, 문제는 포탈이 적은 편이라 마석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선진국 중에서 해외 파병이 가장 많은 국가가 이탈리아였다.
부족한 마석을 해외 파병으로 보충한 것.
이탈리아 용병 헌터는 세계적인 수준.
덕분에 이번 포탈 폭주 사건에 가장 피해가 적을 수가 있었다.
포탈이 적은 만큼, 폭주 때 쏟아져 나온 몬스터의 숫자가 적었다.
또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수도가 몬스터에 짓밟히지 않은 국가였다.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자체 능력으로 복구가 가능한 국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요한이 제시한 공짜가 아닌 마석 공급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후후, 당장은 어렵겠죠. 압니다. 하지만 당장 대금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복구가 다 끝나고 대금을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흥분한 몇 명의 지부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흠흠.”
하지만 곧 쏟아지는 눈길로 인해서 무안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자는…… 없다고 했으면 좋겠지만, 저도 이익은 봐야 하니까요. 대신, 합리적인 이자로 빌려 드리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네, 제가 지금부터 만들 조직을 국제적인 단체로 허락해 주십시오.”
“조직?”
“단체?”
“허락?”
지부장들은 잠시 요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조직이라니?
지금까지 요한은 그야말로 독고다이 그 자체였다.
러셀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만, 정식으로 활동한 적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게 무슨?”
“이제 좀 제대로 활동해 보려고요. 곧 결혼도 하니까, 훌륭한 남편이 되어야죠.”
“……!!”
꿀꺽-!
지부장들은 미래가 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바로 요한이 호령하는 세계 질서가.
“키, 킹?”
“제가 발족하는 기구가 정식으로 등록되면 곧바로 필요한 마석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예.”
회의장 모두가 울상이 되었다. 어쩐지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