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여왕님께서 두 분의 결혼식 주례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주례?”
뜬금없는 주례 타령에 요한과 엘레노아는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주례 타령이야?’
물론 아직 결혼식을 어떻게 올릴지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다.
결혼식은 내년 5월로 잡혔고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
둘은 돈이 넘치도록 있었기에 급하게 정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
그런데 대뜸 영국 왕실에서 주례를 요청하다니.
굉장히 뜬금이 없었다.
“레아.”
“네.”
“왜 저럴까?”
“글쎄요......."
별로 사이도 좋지 않은 왕실의 저의를 알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볼게요. 아직 어디서 결혼식을 올릴지도 정하지 않았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당연히 영국에서 올릴 거로 생각했군요. 이건 제 명함입니다. 뭔가 결정이 되면 이쪽으로 연락해 주십시오.”
“알겠어요.”
“그럼.”
영국 왕실 직원이 떠나고 둘은 서로 마주 보며 바람 빠진 미소를 교환했다.
“뭐, 이런 것도 나름대로 재미라면 재미겠지?”
“그러게요.”
***
요한의 결혼이 준비되는 사이에 인류의 재건도 무척이나 빨랐다.
많은 것이 부서지고 파괴되었지만, 모든 재건의 핵심이 되는 마석이 오히려 풍부해졌기 때문이다.
인구 감소도 타격이 컸지만, 아직 인류는 수십억 명의 사람이 생존해 있었다.
포탈 폭주가 심해졌다면 훨씬 더 줄었겠지만, 다행히 그렇게 오랜 시간을 폭주하진 않았으니까.
힘든 시기를 겪었지만, 인류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복구 작업에 몰두했다.
“어이, 거기 좀 잡아당겨!!”
위이잉-!
“에라이, 저 로봇이 또 말썽이네!!”
무인 굴착기가 또 작동을 멈추었다.
“저거 수리하려면 2~3일은 족히 걸릴 텐데.”
“뭐, 어떻게 하긴. 사람도 많은데 직접 파야지.”
“쩝, 어쩔 수 있나.”
“다들 비켜.”
사람들을 뚫고 키가 2m는 넘는 거한이 맨손으로 나왔다.
“오오, 마커스!”
주변 인부들은 거한의 등장에 일제히 환호했다.
“흐읍!”
우웅-!
거한이 양손에 힘을 주자 푸른빛이 손을 감쌌다.
쾅-!
손과 팔을 이용해 땅을 내려치자 굴착기가 30분은 작업해야 할 양이 단 1번에 된 것이었다.
휘이익-!
“와우, 마커스!”
“대박이야!!”
“그런데 마커스가 저렇게 강했나?”
마커스는 이곳 공사 팀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은 각성자였다.
F급 중에서도 가장 하급으로, 쓸 수 있는 스킬이라곤 보통 사람보다 힘을 10배 이상 내는 게 전부였다.
몬스터와 싸우기엔 적합하지 않았기에 10년 전부터 쭉 공사 팀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었다.
다른 전투 헌터와 비교하면 연봉은 적은 편이었지만,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고 일하는 시간과 강도에 비해선 높은 편이었기에 미인 일반인과 결혼해 1남 2녀의 자녀를 둔 행복한 가정을 꾸린 상태였다.
주변 동료들은 마커스의 힘을 보곤 깜짝 놀랐다.
10년간 함께하면서 마커스의 힘은 충분히 겪어 보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인간의 10배라고 해 봤자 10명과 붙으면 겨우 이기는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마커스가 보이는 힘은 10명 몫의 힘이라고 하기엔 너무 강했다.
“족히 100명은 될 것 같은데?”
“100명은 무슨, 이런 구덩이를 만들려면 20명이 1시간은 파야 한다고!”
“허허……. 마커스 그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2차 각성이라도 한 거야?”
“글쎄다……. 포탈 폭주 이후에 갑자기 힘이 강해졌어. 뭐, 겨우 힘 만 좀 강해진 거라 여전히 레이드는 뛸 수 없겠지만, 연봉은 더 올라가겠지?”
“이…… 욕심쟁이 녀석 안 그래도 우리보다 훨씬 많이 벌면서 더 벌려고 그러나. 으하하하!!”
주변 동료들은 진심으로 마커스의 변화를 축하해 주었다.
처음에야 부럽고 질투가 났었다.
하지만 각성자를 질투해 봤자 변하는 건 없었고, 마커스 자체도 워낙 좋은 사람이라 금방 주변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또 워낙 배포가 커서 주변 사람들에게 술도 자주 사는 물주였기에 싫어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유후! 오늘 일찍 끝내고 술이나 빨자고!!”
“오오오!!”
힘들지만, 인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
“역시 인간들의 삶이란 정말 다이나믹하다니까.”
요한은 턱을 관 채로 관찰용 포탈에서 비추는 인간들의 삶을 구경했다.
그 어떤 예능이나 드라마, 영화 보다도 재밌는 게 많았다.
가끔은 끔찍한 스릴러물도 있었지만, 요한은 굳이 간섭하지 않았다.
그들 개개인에겐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차원 마스터로 해야 할 일은 개입이 아니라 방조였다.
힘 자체는 신이랑 비슷했지만, 관리자는 그저 존재하는 존재였으니까.
‘나도 언젠가 플래닛 프레데터처럼 미쳐서 차원 정복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언젠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정신이 온전한 지금은 모든 것을 즐길 때였다.
‘아니지, 아니지. 타 차원을 여행하면서 영생을 즐겨도 되잖아? 플래닛 프레데터야 생긴 거 때문에 그럴 수 없었지만, 나는 아니지!’
플래닛 프레데터의 지식을 흡수하면서 수많은 차원의 모습도 함께 볼 수가 있었다.
지구에 열린 포탈들은 플래닛 프레데터가 약탈하고 파괴한 차원 일 부분이었으니까.
그리고 아직 차원은 무수히 존재했다.
플래닛 프레데터도 얼마나 많은 차원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으니까.
그렇다면 굳이 청승 떨 일이 아니었다.
차원 1곳에 300년 정도 있을 수 있으니 300년마다 차원을 이동하며 삶을 즐기면 그만이었다.
‘귀찮으면 차원 마스터 포탈에서 드라마 보듯이 다른 차원을 구경하면 되는 일이고.’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그거야. 영생을 얻었으니 영생 동안 즐기며 살 수 있겠어. 흐흐흐흐.'
부정적인 성격의 요한이었지만, 사람이란 게 자기 자신에겐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존재였다.
휙-! 지잉-!
요한은 손바닥을 휘저어서 화면을 바꾸었다.
원하는 장면을 마음대로 볼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었기에 랜덤으로 화면이 바뀌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관음증이라고, 불법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새롭게 생긴 이 취미로 인해서 관음증이 생긴 건 사실이었으니까.
“음, 얘는 재미가 없네. 얘는 어제 봤던 녀석이고. 다음은……."
지잉-!
화면이 바뀌고 나타난 것은.......
“으헉!”
약혼자이자 곧 결혼할 엘레노아의 샤워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그가 차원 마스터라도 아직은 양심이란 게 있었기에, 깜짝 놀라 얼른 화면을 돌렸다.
“어후, 식겁했네.”
아무리 결혼할 사이라지만, 아직 키스 그 이상의 스킨십이 없었다.
또 상대방 허락 없이 알몸을 보는 건 매우 비상식적인 행동이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어차피 결혼한 후엔 매일 볼 텐데, 뭐.’
벌써 그때가 기다려졌다.
***
이후에도 요한의 삶은 단조로웠다.
레이드나 사냥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거의 일반인과 다름없는 삶을 영위했다.
물론 그 일반인이 헌터가 아닌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이지, 정말 일반적인 삶은 아니었다.
그가 가진 힘은 생명 창조가 아니면 거의 모든 게 가능한 준전능의 힘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콰강-!
“키에에엑!!”
“워후, 정말 대단한데!”
정식으로 다크 엘프 로드에 오른 루펜이 요한의 일격 1번에 최근 다크 엘프를 괴롭혔던 알루카 무리가 사라지자 감탄사를 터트렸다.
현재 요한은 다크 엘프 포탈 안정화를 돕고 있었다.
비록 그가 한 일은 아니었지만, 요한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플래닛 프레데터가 다크 엘프가 있는 차원에 무슨 짓을 했는지.
다크 엘프가 있던 차원은 지구처럼 종족 하나가 지배하고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다크 엘프의 터전은 매우 넓고 풍요로웠다.
그런 곳을 플래닛 프레데터가 침략해 파괴하고 일부만 뚝 떼서 자신의 장난감으로 만든 것이었다.
요한의 탓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억을 모두 흡수한 탓에 어느 정도 죄책감과 연민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적극적으로 다크 엘프 포탈 복구 사업을 돕는 중이었다.
“여기 약속했던 물건. 역시, 구원자가 제일 믿음직스럽다니까?”
찰랑-!
“천만의 말씀.”
물론 보상은 철저히 생겼다.
차원 마스터가 됐는데 이런 게 왜 필요하냐고?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K&S는 이미 유나한테 100% 증여해 주었다.
판사가 꿈이었던 동생은 의외로 사업에 무척이나 재능이 있었다.
그녀의 수완은 어지간한 CEO보다 나았고 요한보다 훨씬 기업에 애정이 있었다.
사실 유나는 K&S가 오빠의 유산이라고 여기고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었지만.
어쨌든 요한은 유나가 CEO의 모습이 무척이나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대로 물려주었다.
엄청난 돈을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요한이 모아 둔 돈만 있어도 3~4대는 충분히 먹고살 수가 있었다.
또 가장 큰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집은 필요가 없었다.
하늘에 떠있는 천공의 방어 요새가 있는데 뭐가 걱정일까.
특히 방어 요새의 장점이라면 이사가 쉬워서 차원 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유용한 이동식 집이라는 점이었다.
‘대신 투명화는 시켜야겠지만.’
너무 커서 눈에 띄기 쉬웠다.
하지만 요한의 힘이라면 얼마든지 투명하게 만들 수 있었다.
‘투명 집이라니, 훌륭하네.’
어쨌든 요한은 다크 엘프 영역을 더욱 넓혀 주었다.
“후우, 안 그래도 힘든 상대였는데. 덕분에 좀 더 많은 영역을 가질 수 있게 되었어! 고마워 친구.”
“고맙긴 나야 뭐…. 심심풀이로 퀘스트나 깨고 노는 거지.”
힐끗-.
요한은 여전히 까맣기만 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는 각성몽도 꾸지 않았고, 일이 생길 때마다 울리던 알람도 더는 울리지 않았다.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이제 꿈에서 깨 현실을 살 때란 뜻이었다.
‘현실은 언제나 냉정하지.’
좋은 가장이 되려면 열심히 일해서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말이 그렇단 거지, 엘레노아 정도라면 그녀 혼자서도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자였지만.
“일 더 없어?”
“계속하려고?”
“응, 어차피 나가 봤자 미래의 마누라께선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면서 예비 남편을 바람맞혔거든.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사냥이나 즐기지 뭐.”
포탈 내의 몬스터는 이미 그의 손짓 1방이면 먼지로 만들어 버릴 수가 있었다.
스카이 포탈은 플래닛 프레데터가 만든 공간이고 그의 힘을 완전히 계승한 게 요한이었으니까.
하지만 요한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사람이 몸을 쓰고 다녀야지. 손짓 1방에 모든 걸 해결하면 재미가 없단 말이야.’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
“아, 흠흠.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희미하게 중얼거린 것이었지만, 청각이 예민한 루펜은 들을 수가 있었다.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의뢰할 거야, 말 거야. 없으면 인어 종족 도와주러 가고.”
“아아. 있어, 있어. 안 그래도 북 쪽에 빅맘이라는 거대한 뱀 몬스터가 나타났거든. 지능이 있으면 대화로 풀려고 했는데, 이 녀석들이 마법 내성 특성이 있더라고. 거기에다가 비늘도 3겹으로 두꺼워서 화살도 잘 통하지 않아. 우리만으로 벅찬데 좀 도와줄래?”
요한은 루펜의 말에 씩, 하고 웃었다.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