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쿠오오오오!!”
끝이 안 보이는 것 같은 거대한 절벽이 있는 협곡 같은 곳.
그곳엔 천지를 울리는 괴물들이 모든 것을 파괴할 듯이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팬텀 스티드 위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요한은 살짝 질릴 수밖에 없었다.
‘해룡족이든 잔자클이든 지금까지 상대했던 그 어느 적과도 차원이 다르네.’
괴물들의 축제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베트남이랑 이렇게 난이도가 다를 수가 있을까?’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사실 이 스카이 포탈도 정석대로 공략했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래 스토리는 수에트를 처음 만난 순간 그를 도와서 왕위를 잇게 해 주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뜬금없이 그가 인어 종족 해방 퀘스트를 받는 바람에 난이도가 완전히 꼬이고 말았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베트남보다 훨씬 더 강력한 포탈인 것은 확실했지만.
원래 포탈 수준이란 게 완전히 랜덤이었기에 난이도가 다르다고 해서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
듣기로도 유달리 영국 스카이 포탈의 수준이 높긴 했다.
수준의 끝을 보여 준 괴물들이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요한은 그런 그들의 뒤통수를 쳐야 할 때였다.
“준비 다 됐지?”
[그럼, 난 너무나 완벽해서 탈인 걸?]
휘잉-!
퀸 스피릿인 하늘이 상기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아까부터 불만이 가득한 류페이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보다 훨씬 강한 언데드의 출현이 영 반갑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레아, 조심해. 여기선 진짜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어. 수호자 단속도 잘하고.”
“네.”
엘레노아는 완전히 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수호자 관리도 하고 짬이 나면 전투에도 직접 참여했다.
물론 진짜 중요한 전투엔 끼지 못했지만, 일반적인 전투엔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레벨링은 착실하게 해 두었다.
딴 일 한다고 성장을 등한시했다간, 정작 중요할 때 도움이 되기는 커녕 방해만 될 수도 있었으니까.
“오드리, 너희들도 준비됐어?”
[네, 저희도 준비됐어요.]
물론 100%는 아니었다.
정말 오랜 시간을 봉인되어 있다가 갑자기 깨어나 싸우라면 누가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하지만 어차피 요한은 그들에게 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에 조금 강제력을 동원해서 인어 종족 전사들을 징집했다.
‘자기 힘으로 종족을 구해야 독립에 대한 좀 더 큰 애착이 생기지.’
독립 경험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의 말이니 설득력은 충분했다.
“다들 잘 살아남으라고. 가자!”
요한이 먼저 팬텀 스티드의 복부를 차고 날아올랐다.
촤악-!
그리고 앞으로 본 스피어를 날렸다.
“흡!!”
챙-!
정예 전사 1명이 본 스피어를 삼지창으로 튕겨 내었다.
“저, 저건?”
“적이다!!”
“후방에서 적이 나타났다!!”
“뭐, 뭐?”
해룡족 전사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앞에 있는 메가 잔자클 남작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후방에서 적이 나타났으니.
다른 전사들은 처음엔 다른 잔자클인 줄 알았다.
조금 귀찮긴 했지만, 어차피 상대하던 녀석들이니 좀 더 귀찮으면 끝이었으니까.
딱히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비명과도 같은 말에 바짝 정신 차려야 했다.
“그, 그 네크로맨서다!!”
“네크로맨서가 이곳까지 나타났다!!”
“뭐야?!”
해룡족 전사들은 기겁했다.
안 그래도 네크로맨서의 악명은 해룡족 본진까지 진동하고 있었다.
감히 동족들을 학살하고 긍지 높은 해룡족을 사냥감 사냥하듯이 죽이고 다닌 엄청난 악당이었으니까.
“젠장. 네크로맨서, 여긴 어떻게!!”
해룡족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뭐……?”
개중에 특히 크게 반응한 존재가 있었다.
해룡족 중에서도 요한을 가장 증오하고 반드시 찢어 죽이겠다고 다짐한 존재.
“비켜라.”
쿵쿵-!
그저 가볍게 민 것만으로도 뛰어난 전사들이 픽픽 쓰러지는 존재.
바로 요한이 처음으로 만난 왕자 수에트였다.
까드득-!
수에트의 얼굴엔 짜증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의 난폭한 기운이 주변을 마구 강타하고 있었다.
“더럽고 긍지도 없는 인간이 잘도 이곳에 나타났군.”
그는 요한을 보곤 잔뜩 으르렁거렸다.
처음엔 수에트가 두려웠던 요한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는 당당하게 수에트와 눈을 마주쳤다.
씨익-!
그러곤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여어. 오랜만이야, 친구.”
“친구?”
수에트는 요한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역겹고 추악하게 느껴졌다.
“감히, 감히 네놈 같은 더러운 종자가 나한테 친구?”
만약에 요한이 본래 스토리대로 착실하게 수에트를 도왔다면 둘은 굉장히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요한이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요한은 해룡족 종족 자체를 적으로 돌리고도 여태껏 살아 있는 헌터.
안 그래도 강력한 수에트를 돕는 일을 못 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에 착실하게 스토리를 진행했으면 그래 봤자 수에트의 충실한 심부름꾼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요한의 위치는 인어 종족의 구원자.
차기 지도자인 오드리를 다루는 자.
그야말로 인어 종족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최강의 권력자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안정적인 용의 꼬리냐, 위험한 뱀의 머리냐.
물론 어느 것을 선택해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안정적인 용의 꼬리도 좋고, 위험한 뱀의 대가리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위험한 뱀의 머리가 아니라 위험한 용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전투만 성공적으로 치른다면.
쉬익-! 쿵-!!
수에트가 높이 뛰어올라 요한의 앞으로 다가왔다.
“네놈은 반드시 죽이겠다.”
“얼마든지 상대해 주마.”
"......."
둘의 대치가 점점 더 가열되기 시작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역시 가장 감정이 안 좋은 수에트였다.
파악-!
그는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요한의 앞으로 접근했다.
아니, 접근하려고 했다.
솨아아아-!
“흡!!”
하지만 요한을 3m 정도 앞두고 그의 속도 못지않은 존재가 나타나 그대로 강력한 냉기를 뿌렸다.
수에트는 깜짝 놀라 몸을 빼내서 냉기를 피했다.
냉기를 피하긴 했지만, 수에트의 표정은 진심으로 놀란 상태였다.
‘내 속도를 감당한다고?’
수에트는 속도 하나만큼은 해룡족 최강이라고 자부할 수가 있었다.
수에트는 형제들과 싸워서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형제마다 특출한 장점이 다르다는 것은 인정했다.
힘일 수도 있고 마법일 수도 있었지만, 수에트는 속도가 큰 장점이었다.
그런데 그 속도를 인지하고 분명하게 노리며 공격했다.
이건 그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않고선 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넌 뭐냐?”
[킥킥. 너, 역시 재밌는 녀석이었어. 너는 내가 상대해 줄게. 괜찮지, 요한?]
“얼마든지. 아니, 오히려 네가 맡아 주면 나야 고맙지.”
[들었지? 너는 지금부터 내 거야.]
“개소리!!”
수에트는 얼굴이 붉어지며 분노했다.
수치였다.
네크로맨서라면 언데드 군단의 규모가 힘 그 자체.
하지만 1:1로 붙인다는 건 그만큼 자신을 얕보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팍-!
수에트는 다시 땅을 박차고 요한을 향해서 쇄도했다.
‘이번엔 빌어먹을 유령까지 한 번에 베어 주마!!’
그의 삼지창은 왕이었던 아버지께 물려받은 황금 삼지창.
모든 것을 베고 찌를 수 있는 무적의 삼지창이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삼지창을 정확히 요한의 몸을 노리고 휘둘렀다.
[어딜!!]
이번에도 하늘이 앞에 나타났다.
“감히!!”
이번엔 수에트도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삼지창을 정확히 하늘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대로 하늘과 요한을 동시에 꿰뚫을 생각.
성공만 하면 건방진 녀석 둘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지잉-!
하지만 수에트는 상대를 너무 얕보았다.
하늘의 주변에서 검은색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헉!”
“헙!!”
수에트는 물론이고 뒤에 있던 요한도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분명히 퀸 스피릿이 된 이후로 하늘은 쭉 하얀 기운만 뿜어 댔다.
그리고 하얀 기운에 맞게 그녀가 뿜어내는 얼음도 하얀색이었다.
요한은 블랙 아이스가 아닌 것에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녀가 검은 기운을 뿜어내더니 마찬가지로 검은 얼음, 즉 블랙 아이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촤자자작-!
그녀의 앞으로 날카로운 블랙 아이스가 솟아났다.
“커헉!”
본래라면 수에트는 이 정도 공격은 피해야 정상이었다.
그의 속도는 해저 최강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만과 자만 때문에 피할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생각이고 자시고, 너무 빠르고 직선적으로 접근한 탓에 피할 새가 없었다.
또 하늘의 공격 자체가 너무 빠르고 강력해서 그대로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 했다.
촤자작-!
“크아아아악!!”
수에트의 온몸에 날카로운 블랙 아이스가 빼곡하게 박혔다.
“쿨럭!”
일반적인 얼음 공격이었다면, 그대로 뽑아서 싸웠을 것이었다.
하지만 수에트는 단 한 번의 공격에 빠르게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수에트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강하다는 것은 그냥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끄으응.”
엄청난 고통도 동반했다.
이미 몸에선 힘이 다 빠져나가 억지로 풀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크옥, 젠장. 이 수모는 언젠......."
촤악-!
수에트는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을 다 꺼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목이 떨어져 나갔다.
“퉤! 뒈질 놈이 무슨 헛바닥이 길어. 그냥 뒈져!”
바로 류페이였다.
아까부터 뚱한 표정의 그녀는 어차피 죽을 수에트의 마지막 말도 들어 줄 마음이 없었다.
"......."
요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류페이를 보았다.
“뭐, 불만 있어?”
매우 건방진 태도.
하지만 요한은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
어차피 수에트 따위는 이제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만은 무슨, 그냥 다 때려 부숴.”
“히이, 그렇게 나와야지.”
류페이는 요한이 혹시라도 잔소리할 줄 알고 예민한 척을 했던 건 데 잔소리는커녕 오히려 원하는 명령을 내리자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이 금방 표정을 풀고 해룡족과 메가 잔자클 남작이 싸우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자자, 모두 돌격!”
“쿠에에엑!”
“으어어억!!”
언데드 군단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요한은 뒤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수에트의 시체로 다가갔다.
[……허무하군.]
그곳엔 방금 죽었음에도 뚜렷한 의식을 가진 수에트의 영혼이 여전히 허무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그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끝은 허무했지만, 수에트는 그래도 최강을 바라보았던 사나이.
높은 영혼의 격 덕분에 영혼 상태에도 자유롭게 생각하고 움직일 수도 있었다.
요한은 그런 수에트의 영혼에 다가갔다.
[네크로맨서여, 나는 정말 죽은 것인가?]
“그래, 맞아.”
수에트의 태도는 놀랍게도 얌전했다.
조금 전까지 미친 듯이 으르렁거린 사이로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하, 정말 허무하군. 오직 왕이 되기 위해서 살아왔는데. 최후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죽음이라…….]
원래 삶이란 게 그런 법이었다.
“수고가 많았다.”
[큭큭큭.]
수에트의 허무한 웃음이 주변을 조용히 울릴 뿐이었다.
46장.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