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성불한 해룡족을 뒤로하고 요한은 엘레노아와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작전을 짜 보았다.
이미 정보는 충분했기에 좋은 작전만 짤 수 있다면, 생각보다 훨씬 더 쉽게 녀석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왕족들이 빠져 있는 틈을 노려야겠어요.”
“역시 그렇지?”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가장 까다로운 적들이 빠져 있는 본진이라니.
이 틈을 놓친다면 바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다가 저희가 의도했던 대로 영국 길드와 공격대가 녀석들의 시선도 분산시키고 있고요.”
“뭐, 이번 요새 함락으로 딱히 의미는 없어졌겠지만.”
“뭐, 아예 없는 것보단 낫잖아요. 아무리 우리가 주공이란 것을 눈치 챘다고 해도 자기들 앞마당에서 적들이 설치는데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없을 테니까요.”
으쓱-.
“뭐, 그렇지. 저들에겐 해룡족 전사를 공격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한 말이야.”
엘레노아는 정말 오랜만에 머리에 쥐가 나도록 전략과 전술을 연구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좋아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그녀가 게임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당시엔 말 잘 듣는 아이 코스프레를 하고 있을 때라 어쩔 수 없이 게임을 그만두어야 했다.
독립 이후엔 게임을 해 봤지만, 전략을 짜는 건 재밌었지만, 게임 자체에 흥미가 없었다.
헌터 훈련을 받으며 실제 전투를 겪어 보니 게임 속의 가짜만으론 전혀 만족할 수가 없었다.
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마우스만 클릭하는 것도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진 어쩔 수 없이 몬스터와 싸울 때 전술을 짜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실제 전쟁을 마치 과거의 군사처럼 판을 짜고 있으니 엔도르핀이 도는 것 같았다.
덕분에 그녀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요즘 아가씨 좋은 일 있나?”
“그러게. 그 무뚝뚝하고 무서웠던 아가씨는 어디 가고 부드러운 아가씨만 계시네.”
엘레노아는 타국에 있으면서도 가문과 교류가 아예 없던 것이 아니었기에 가문 사람을 지키며 직속 부대의 역할을 하는 그들이 엘레노아의 성격을 모를 리가 없었다.
얼음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차가운 엘레노아가 최근 밝은 표정으로 다니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저분이 답일 수밖에 없네.”
수호자 1명이 한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그곳엔 깍지를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느긋한 표정으로 엘레노아와 얘기를 하는 요한이 있었다.
“하긴, 저분이라면……."
모든 수호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처음엔 요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러셀 가문의 혹독한 훈련 중엔 인터넷도 금지였기에 최근에 급부상하기 시작한 외국인 헌터에 대해서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또 시간이 얼마나 지났건 상관없이 대영 제국의 영광을 잊지 못하며 자국이 최고라는 영국인의 특성 상 외국의 일엔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
하지만 요한과 엮이기 시작하면서 수호자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아가씨 옆에 있는 남자의 정체를 파악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스카이 포탈을 나가자마자 스마트폰으로 요한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았다.
요한의 정보를 보기 시작한 수호자들은 쏟아지는 압도적인 정보에 입을 쩍 벌려야 했다.
정말 넘사였다.
그들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러셀 가문을 겨우 일개 개인이 넘어 버린 것이었다.
천공의 방어 요새의 존재를 보곤 입에 거품을 물어야 할 정도였다.
“아가씨는 반드시 미스터 킹과 이어져야 해!”
“그럼, 그럼. 딴 놈들은 다 도둑 놈이지만, 킹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그럼!”
이상한 일로 수호자들은 하나로 뭉쳤다.
정작 본인들은 조용히 있는데도 말이다.
***
요한은 엘레노아와 함께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과 싸움이었다.
“흠…… 오드리.”
[네, 요한 님.]
“이 에너지 공급기 말이야. 내가 이용할 수 없을까?”
[예? 아…… 그렇네요. 이 에너지 공급기는 애초에 해룡족의 물건이 아니라 우리 인어 종족의 물건이었으니까. 제어권만 가져올 수 있다면, 오히려 이 에너지 공급기를 적들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로도 쓸 수 있겠군요.]
딱-!
오드리의 답변이 마음에 든 요한은 손가락을 튕겼다.
“바로 그거야! 그들의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무기가 역으로 자신을 찌르면 어떤 기분일지. 흐흐흐.”
[……이론적으로 가능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까지 구한 인어 종족들 사이에선 에너지 공급기 기술자가 없어요. 에너지 공급기는 워낙 중요한 기술이라 일부 장인들에게만 소수로 이어져 왔는데. 아무래도 그런 장인들까지 통신 노예로 사용할 수는 없었던지. 아마 해룡족 본진에 있겠죠.]
“흠, 그렇단 말이지?”
어지간하면 기술자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없다고 해서 요한이 포기할 리는 없었다.
“내가 처리해야겠네.”
[네?! 불가능해요. 에너지 공급기는 아주 정교한 장비이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기술자가 있어야…….]
띵-!
“오, 됐다.”
위이이잉-!
해룡족 전사들이 입구를 무너트려 가면서 지키려고 했던 에너지 공급기가 오드리가 말하는 사이에 다시 재가동됐다.
[.......]
“뭐야, 복잡하다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오드리를 쳐다보았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오드리가 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요한을 보았다.
그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에너지 공급기는 정말 인어 종족 최고의 기술 중 하나였다.
이것 하나만 있어도 단체 통신이 가능했고, 공간 이동에 다른 곳의 마나를 한쪽으로 몰아줄 수도 있었다.
그런 예민하고 정교한 장비를 단 몇 초 만에 기술이 전혀 없는 사람이 가동했다?
눈앞에서 보지 않았다면 무조건 믿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어, 어떻게 에너지 공급기가 이렇게 쉽게…….]
“아니, 전원이 꺼져 있어서 전원만 넣은 건데?”
[그게 그거죠! 요한 님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모르긴 왜 몰라. 이렇게 정보가 떡하니 나오는구먼. 아니, 오히려 내가 더 어이가 없네. 이거 보안이라곤 단 1도 설정해 두지 않았잖아.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니 딱 나오는데?”
[.......]
오드리는 더 열을 낼 힘도 없었다.
[하아, 정말 괴물이세요.]
한숨을 쉬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하하! 새삼스레 뭘.”
요한의 작업은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전원만 가동하고 끝나는 게 아니고 오히려 해킹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본진을 칠 때 에너지 공급기를 완전히 장악하면 지원군이 올 수 없겠지. 원정에 나가 있는 왕족들의 전쟁이 끝나도 빠르게 귀환할 수 없을 거야. 녀석들은 이것만 철석같이 믿고 있을 테니까.’
샥샥-!
그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너지 공급기의 링크 프로그램을 분석해 완전히 해킹해 버리기 위함이었다.
“흐흐흐흐.”
이번에도 요한 특유의 사악한 웃음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
위이잉-!
“응?”
에너지 공급기를 담당하는 해룡족 기술자는 갑자기 가동되는 에너지 공급에 당황했다.
“어이!”
“예, 예!”
기술자의 부름에 조용히 밥을 먹던 노예가 얼른 다가와 대답했다.
“지금 시간에 출입 일정이 있었나?"
“아, 아뇨. 없습니다. 제일 빠른 일정이 3시간 후 북쪽으로 갔던 정찰 팀 복귀입니다.”
“뭐지, 긴급 사용인가?”
에너지 공급기는 아주 예민한 장치였기에 철저하게 사용이 제한 되어 있었다.
반드시 사전에 신고해야 하며, 신고했더라도 신고한 시간에 타지 못하면 다시 신고해서 타야 하는 게 원칙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긴급 사용이라고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큰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신고 없이 사용을 허가해 주었다.
하지만 어지간하면 이 긴급 사용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긴급 사용을 한 번이라고 사용했다간 몇 달 동안 조사관에게 시달리며 철저하게 수사를 받아야 했으니까.
때문에, 최근 몇 년간 긴급 사용을 사용한 일은 없었다.
‘뭐, 요즘엔 워낙 분위기가 뒤숭숭하니까.’
외부의 적이 사방에 존재했다.
긴급 사용이 발생했다고 해서 이상할 일은 없었다.
“어이, 노예.”
“예!”
“지금 당장 수사과랑 응급 팀에 연락……."
“주, 주인님!!”
빠직-!
“뭔……."
해룡족 기술자가 명령을 내리는 도중에 노예가 무엇을 보더니 깜짝 놀라 에너지 공급기를 가리켰다.
노예 주제에 감히 주인의 말을 끊은 불경에 화가 난 기술자였지만, 워낙 다급해 보인 노예의 태도에 고개를 돌려서 에너지 공급기를 보……려고 했다.
스걱-!
하지만 기술자는 더는 살아 있지 않았다.
에너지 공급기에서 나타난 무엇인가가 그대로 기술자의 목을 베고 지나갔기 때문.
푸하아악-!
머리가 떨어진 목에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으아아아……."
갑작스러운 사태에 노예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지르려고 했지만, 큰 소리를 치지 못하도록 설정된 그의 구속 목걸이는 강제로 그의 목소리 볼륨을 낮추었다.
“흐음.”
기술자의 목을 한 큐에 벤 존재가 노예를 내려다보더니 잠시 고민했다.
“요한, 얘 해룡족 아이가 아닌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너지 공급기에서 요한의 모습이 나타났다.
“뭐야, 왜 안 죽이고 있냐고 했더니. 딴 종족이라서 그랬어?”
“당연하지. 분명히 요한이 해룡족을 말살하라고 했지. 딴 종족도 죽이라곤 안 했으니까.”
“네이, 네이. 네가 언제 내 말을 그렇게 일일이 들었다고 이제 와 명령 핑계세요?”
“킥킥킥킥!”
척-!
“그래서, 이 녀석. 죽여, 말어?”
"흠......."
고민하는 도중에도 해킹으로 가동된 에너지 공급기는 끊임없이 언데드를 토해 내고 있었다.
“으으.......”
부들부들-.
아무런 힘도 없는 노예가 버티기엔 너무나도 사악한 힘이 아닐 수 없었다.
“흠, 오드리. 이 녀석 무슨 종족이야?”
[아, 음…… 청새치 종족인데 아직도 남아 있었네요. 우리 인어 종족과 든든한 동맹이었죠. 아무 래도 통신 노예로 쓰인 인어 종족과 달리 청새치는 속도가 빠르고 검을 잘 쓰니 육체 노예로 쓰는 거 같아요.]
“그래, 흠. 하지만 이 녀석은 어린 청새치 종족 같은데. 데리고 다니면 귀찮을 것 같단 말이지.”
[어차피 요한 님이 맡는 거 아니시잖아요.]
“하핫, 그렇긴 하지. 레아. 이 녀석, 수호자들에게 보내서 좀 돌 보게 해 줘.”
“네, 요한 씨.”
“자, 그러면 우리는 본격적으로 해룡족 격파를 시작해 볼까?”
[네!!]
이때만큼은 오드리도 텐션이 쭉쭉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철천지원수인 해룡족을 드디어 깨부술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다.
“아 참, 그냥 깨부수면 그야말로 시간, 힘 낭비지.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한단 말이야. 뭐 아는 것 좀 없냐?”
오드리에게 물었다.
[잠시만요.]
오드리는 기도하듯이 양손을 잡고 주문 같은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우우웅-!
그러자 그녀의 주변에서 맑은 하늘색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부드럽게 그녀를 감쌌다.
[아, 저쪽. 이곳에서 11시 방향 약 1.5km 지점에서 익숙하고 강한 기운이 느껴져요. 아무래도 봉인된 고위급 인어인 거 같아요.]
“오케이, 고위급 인어 하나 봉인을 풀어 주면 전투가 훨씬 더 쉬워지겠지.”
인어는 일반적인 인원의 전투력은 떨어지지만, 고위급 인어라면
해룡족과 당당하게 맞서 싸울 정도로 강력하다고 했다.
‘아군은 많을수록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