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복수를 불태우는 주체는 요한이었지만, 이번엔 엘레노아가 나섰다.
아무래도 가문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인보다는 내부인이 좀 더 충격이 덜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정말이냐. 정말…… 브루마 그 녀석이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고?”
"네."
엘레노아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형제의 끔찍한 죄를 말하는 여동생의 태도가 아니었다.
끔찍하게 건조했으며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무슨 소설 속 얘기를 하는 것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러셀 가주에겐 너무나도 치명적인 현실이었다.
부들부들-.
가주의 얼굴이 시뻘게졌고 분노로 볼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이, 이, 이!! 빌어먹을 브루마 놈!!”
콰강-!
가주의 기운이 순식간에 주변으로 폭사했다.
쿵-!
“가주님!!”
가주의 기운이 폭주하는 것을 느낀 호위 헌터들이 다급하게 내부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주가 분노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후우, 후우.”
가주의 분노는 곧 진정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겉으로 표현된 분노만 가라앉은 것뿐, 정제된 분노는 여전히 가주의 가슴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지독한 독을 품고 있는 뱀은 언제든지 상대방을 물어뜯어 죽일 준비가 되었다.
휙휙-!
가주는 손짓을 했고, 호위 헌터들은 고개를 숙이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레아야.”
“네, 할아버지.”
“어떻게 하고 싶으냐?”
가주는 자식들보다 손자, 손녀들을 더 사랑하고 아꼈다.
자식들을 키울 때는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그리고 한창 러셀 가문을 성장시켜야 할 때였기에 엄하게만 대했다.
하지만 자식들이 장성하고 이젠 가주 1명이 가문을 이끄는 게 아니라,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자식들 그리고 지금껏 키워 온 가문 소속의 장학생들까지 함께 가문을 성장 시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손주들은 엄하게 키울 대상이 아니라, 예뻐해야 할 보석 같은 존재였다.
‘그게 실수였던가.’
가주는 브루마가 유달리 욕심이 많고 좀 부족한 손주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손주들의 교육 상태나 그런 부분들을 보고받았으니까.
하지만 그가 받은 보고엔 이 정도는 아니었다.
테러라니!
영국에 새롭게 떠오르는 명문 가문이며 여왕 폐하의 먼 친척이기도 한 러셀 가문에서 테러라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한다는 전통적 귀족인 그에겐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오죽하면 엘레노아와 요한이 브루마를 쳐내기 위해서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런 기색을 요한은 읽을 수가 있었다.
그에게 남의 생각을 읽는 재주는 없었지만, 힘들게 살았던 청소년기로 인해서 눈치는 거의 100단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헌터로서의 능력은 아니고, 순수한 그가 키운 능력이었다.
“증거를 보여 드릴까요?”
“증……거가 있나?”
꿀꺽-.
가주는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망설여졌다.
과연 증거를 봐야 할까?
지금은 그저 의혹일 뿐이었다.
엘레노아의 말이었기에 어느 정도는 믿고 있었지만, 부족한 녀석이지만 손자였다.
비록 최근 들어서 후계 구도에 많이 밀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러셀 가문은 후계자가 아니어도 가문 소속으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가 있었다.
가주가 아니라고 해서 목숨이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러셀 가문의 가주가 워낙 매력적인 자리다 보니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테러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요한이 제시하는 증거를 봤다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는 가주였다.
가주는 절대 감정에 휘둘려선 안 됐다.
자식에게 늘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던가?
“보여 주게, 보겠네.”
“알겠습니다.”
요한도 가주의 굳건한 눈빛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3마리의 아직 언데드가 되지 않은 영혼을 불러냈다.
꿈틀.
갑작스러운 영혼의 등장에 가주의 미간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들은 뭔가?”
“테러의 직접적인 주동자들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네크로맨서고 네크로맨서는 죽음을 지배합니다. 죽음엔 시체도 있고, 영혼도 있죠. 저들을 죽이고 영혼을 거둬들여 고문해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어이!”
[우으…….]
[제발, 소멸시켜 줘…….]
킬러 영혼들은 제발 좀 고통에서 해방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너무나 끔찍한 곳이었다.
죽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닌 상태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에 빠져서 24시간 고통받아야 했다.
어둠뿐인 공간에서 그저 고통만 느끼다 보니 녀석들의 정신은 서서히 붕괴하는 중이었다.
“너희들이 저질렀던 사건 개요에 대해서 천천히 설명해.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빠진 게 있다간, 고통의 강도를 2배로 늘려 줄 테니까.”
[히…… 히익!!]
고통 강도 2배라니, 킬러 영혼들은 기겁했다.
지금도 미치듯이 괴로운데 2배라니!
그들은 횡설수설하는 것 같으면서도 고문당하며 내뱉었던 모든 사실을 단 하나의 빠트림도 없이 모두 실토했다.
이미 한 번 요한에게 실토한 후 라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어둠밖에 없는 공간에서 고통받기 전에 했던 말은 그것이 전부였으니까.
“끄응.”
가주는 킬러 영혼들의 증언에 신음을 홀려야 했다.
증언에 조작이나 빈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녀석들은 정확하게 브루마의 특징에 관해서도 이야기했고, 당시 브루마가 운영하던 통장의 자금 흐름도 딱 떨어졌다.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증거였다.
“그래서 어찌하고 싶은 거냐.”
“뭘 어쩌겠습니까. 열 받아도 러셀인데. 그냥 이렇게 소심하게 복수나 하렵니다.”
“웃기는 소리!! 이번 통보는 나를 끌어내기 위한 것임을 모를 줄 알았더냐!!”
“푸핫, 역시 눈치 정말 빠르시네. 맞아요. 그냥 대뜸 찾아가서 말하는 것도 웃기고 하니까, 이곳까지 직접 찾아오게 만들기 위해서 통보한 거긴 하죠.”
“흥, 어서 원하는 걸 말해 보아라.”
“둘 중 하나를 정하시죠. 완전한 사회적 죽음, 또 다른 건 육체적인 죽음.”
"......."
가주는 말문이 막혔다.
둘 중 아무거나 골라도 그는 소중한 손자를 잃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 참, 사회적 죽음을 선택하시면 제가 직접 허리를 끊어 버릴 겁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건가?”
“피의 복수는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아.”
가주는 고민에 빠졌다.
가주로서의 생각과 할아버지로서의 가치관이 부딪혔다.
“브루마 러셀은 저를 죽이려고 했고, 저 말고도 수많은 민간인의 피를 보게 했습니다. 솔직히 바로 죽이지 않았던 게 자비였죠.”
“어째서 바로 죽이지 않았나. 아무리 우리가 러셀이었어도 자네라면 충분히 무마할 능력은 있었을 텐데.”
“킥킥, 글쎄요. 단순한 복수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뭐?”
“그렇잖아요. 그때도 제 영향력은 어마어마했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부끄러울 정도잖아요?”
"......."
가주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확실했다.
당시엔 요한의 영향력은 S급 중에서 조금 뛰어난 정도였다.
능력만큼은 확실했지만, 든든한 세력이 없었으니까.
아무리 1명이 강하다고 해도 S급 헌터 여러 명이 힘을 합치고 정부와 협회가 힘을 합치면 제압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동남아시아에서 맹활약 중인 프링고 공격대, 그리고 천공의 방어 요새까지.
굳이 인간이 아니더라도 요한의 세력은 전 세계와 맞짱을 떠도 될 정도로 막강해졌다.
이젠 요한 그 자체가 세력이자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이젠 어느 국가나 세력도 요한을 감히 업신여길 수가 없어졌다.
만약에 그때 당시에 브루마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면 가주도 어떻게든 협상을 걸어 보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요한에겐 굳이 허락이 없더라도 일을 행할 힘이 있었으니까.
“레아야.”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브루마 러셀 그놈은 죽어도 싸요.”
가주는 간절한 눈빛으로 엘레노아를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목소리였다.
엘레노아는 그 누구보다 브루마를 싫어했다.
어렸을 때 그녀가 애지중지 키웠던 고양이를 장난삼아서 태워 죽였을 때부터 그녀는 브루마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봐도 브루마는 죽어도 되는 쓰레기였다.
‘내가 죽이지 못하는 게 아쉬우니까.’
그녀는 언젠가 브루마를 직접 죽이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죽기만 해준다면야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하아, 어찌 내 손으로 손자의 죽음을 결정해야 하는가. 그건 불가능하네.”
“음, 그러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참견만 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직은 러셀 가문을 적으로 두고 싶지 않으니까요.”
"아직......인가......."
어쩐지 가주는 ‘아직’이란 표현이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킴을 데릴사위로 삼으려고 했던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군.’
이젠 러셀 가문도 감당하기 힘든 거물이 된 그였다.
존중의 표현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전혀 아랫사람 같지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어투엔 조심성이 있던 것과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하아, 제발. 브루마, 살아남거라.’
아무리 손자가 귀하고 예뻐도 이번 일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었다.
요한이 아무 죄 없는 브루마를 죽이려 했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손자를 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명분이 너무 명확했다.
테러에 대한 응징.
헌터 테러범은 블랙 헌터로 분류되며, 블랙 헌터는 즉결 처형이 가능했다.
아니, 오히려 정부나 협회에선 즉결 처형을 유도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처럼 능력자의 능력을 봉인하는 기술은 없었기 때문에 블랙 헌터를 교도소에 가두려면 정말 엄청난 액수가 들었다.
특히 파괴적인 블랙 헌터는 구금이 거의 불가능했다.
모든 게 비효율적이었기에 블랙 헌터는 어지간하면 즉결 처형을 했다.
법대로라면 브루마 러셀은 블랙 헌터였고, 즉결 처형의 대상이었다.
만약에 요한이 여론전이라도 벌인다면 러셀 가문의 위상은 하루 아침에 쓰레기가 될 게 분명했다.
러셀 가문은 독보적인 가문이 아니었다.
경쟁자는 많았고 조금의 약점만 생겨도 물어뜯을 게 분명했다.
특히 3대 가문이라고 일컫는 포터 가문이 건재했고, 포터 가문의 가주는 러셀 가문을 합병하고자 하는 인물.
절대 약점을 주면 안 되었다.
“……대신 이번 일을 공론화만 시켜 주지 말게나.”
가주의 두 눈이 꽉 감겼다.
입은 분통과 회한으로 부르르 떨렸다.
가주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가주로써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가문, 브루마 둘 다 살릴 수 없다면 가문만이라도 지켜야 하는 게 가주였기 때문이다.
“오, 결정 잘하셨습니다. 확실히 그 부분은 제가 책임지고 비밀에 부쳐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차마 고맙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가주는 인사도 없이 행하니 돌아갔다.
“할아버지 괜찮을까요?”
브루마 러셀은 죽일 만큼 싫어했지만, 가주이자 할아버지는 아니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냉정한 척 굴었지만, 노인인 할아버지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S급 헌터시잖아. 잘 이겨 내실 거야."
빈말이었다.
요한은 러셀 가주에 별 관심도 없었다.
43장. 브루마의 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