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뭐, 뭐야?’
갑작스러운 현상.
인어의 몸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오자 요한은 당황했다.
이런 전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
‘제발, 귀찮은 일만 아니어라!’
빌고 또 빌었다.
여기서 일이 더 꼬이는 것은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
하지만 세상은 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아아, 드디어…… 제가 깨어났군요.]
“에?”
오드리라고 이름을 지은 인어의 분위기가 180도 변했다.
지금까진 질문에만 대답하며 그 어떤 말도 스스로 하지 않았던 인어였다.
그야말로 감정이 없는 인형과도 같았던 오드리였는데, 갑자기 생기가 돌며 표정도 살아났다.
다만, 지금은 눈, 코, 입 전부에서 빛이 나는 중이라 썩 유쾌한 모습은 아니었다.
[드디어 찾았군요.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
"......."
‘젠장, 또 구원자라고?!’
제발, 제발! 그만하고 싶었다. 구원자고 나발이고 그냥 마음 편하게 사냥하고, 마음 편하게 돈이나 듬툭 벌고 싶은 마음이었다.
인류를 구하는 영웅이니, 차원을 지키는 구원자니 다 싫었다.
[제발, 저희 인어족을 해룡족 손에서 구원해 주세요. 사실 그들은 미지의 존재로 인해서 만들어진 종족. 원래 이곳은 저희 인어족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곳이랍니다.]
“뭐, 그게 정말이야?”
그의 귀찮은 마음과는 별개로 스토리 자체엔 흥미가 돋았다.
[네, 원래 이곳은 인어족이 해양 몬스터를 상대로 지키는 성스러운 곳. 과거 지상의 인간들이 수수께끼의 유적과 함께 가라앉으면서 신성한 성역을 지키는 수호자들이 되는 저주 아닌 저주를 받았지요. 하지만 어느 날 미지의 존재가 나타 나곤 상황이 180도 달라졌어요. 그 존재는 기존의 세력이었던 저희를 탄압하고 죽이고 봉인해 겨우 텔레파시나 사용하는 인형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와 대립했던 사악한 해룡들은 미지의 존재가 주는 힘을 받아서 거대한 몸체를 버리고 우리와 비슷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노예로 삼았지요. 부디, 구원자시여. 우리 인어족을 구원하시고 신성한 땅의 축복이 돌아오게 해 주소서.]
띵-!
요한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안 봐도 비디오겠지.’
역시 스마트폰 화면엔 인어가 내어 주는 퀘스트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주의 표시가 있었다.
※ 주의: 이 퀘스트를 수락할 시 기존에 받았던 모든 퀘스트는 무효화되며 오직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퀘스트뿐입니다. 하지만 상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ES / NO
‘……그렇단 말이지?’
인어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여기는 게임 속 세계가 아니었다.
설사 퀘스트를 주는 NPC라고 해도 진실만 말하라는 법은 없었기 때문.
하지만 요한은 어쩐지 이쪽이 더 끌렸다.
‘왕위 계승권이고 뭐고, 주변 몬스터 퇴치고 뭐고 다 필요 없지. 그냥 쿨하게 이곳에 있는 몬스터를 조지면 되는 거 아니야?’
자잘한 퀘스트보다 그게 더 매력적인 방법이 아닐 수가 없었다.
‘시간 낭비는 딱 질색이니까.’
다른 걸 다 떠나서 이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는 게이머가 아니었다.
한국인이었지만, 딱히 게임이 취향은 아니었다.
다른 평범한 한국인 헌터였다면, 게임 같다며 즐거워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나에겐 극단적인 효율이 더 중요해.’
결국, 결정했다.
'YES.'
띵-!
[인어족 부활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모든 퀘스트는 사라집니다. 조심하십시오. 이번 퀘스트로 외면당한 일부 해저 생물들은 이유도 모른 채 당신을 증오할 수도 있습니다.]
‘그딴 거 아무렇지도 않아.’
어차피 그는 부모님을 여읜 이후로 쭉 혼자였다.
무시와 천대를 받아 온 세월이 얼마던가.
증오와 분노는 익숙한 감정이었다.
특히 네크로맨서가 된 이후 그가 죽이거나 모은 영혼들이 자연스럽게 내뿜는 원한과 증오, 고통으로 더욱 그의 감정은 메말라 가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몇 번은 더 고백했을 엘레노아와의 관계도 여전히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과거엔 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하고 건조한 인간관계를 가졌지만, 그래도 감정 자체엔 충실했다.
그래서 연애도 2번 정도 했었다.
다만, 그의 건조한 성격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하고 차였지만.
하지만 최근엔 엘레노아를 포함해 다크 엘프와 같이 빼어난 미모를 가진 존재를 보면 예쁘다는 생각은 가져도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뭔가 특별한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금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져도, 제일 중요한 연애 심리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
뭐랄까, 아름다운 예술품을 감상하는 느낌이랄까?
아무리 예술을 사랑하는 이라도 이상 성도착증이 아닌 한 예술품과 연애는 하지 않지 않는가.
현재 요한이 그런 상태였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저 엘레노아가 너무 아름다워서 연애 심리보다는, 경애나 존경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레아.”
“네, 요한 씨.”
‘역시, 레아는 언제 봐도 예뻐.’
이런 미인이 자신과 함께한다는 것에 오늘도 헌터가 된 것을 감사했다.
이런 감정을 느낌에도 정작 사귀자거나 좋아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엘레노아는 적당한 짝일 수도 있었다.
감정이 점점 메말라 가는 요한과 비슷하게 감정이란 것을 별로 느껴 보지 못하며 자란 여인.
그리고 감정 표현 자체가 드물기도 한 여인.
그게 바로 엘레노아였다.
그녀 또한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릴 때마다 왜 그런지 잘 이해하질 못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사랑이란 것을 모르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저 그냥 아는 것과 몸으로 느끼는 것의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계획이 바뀌었어.”
“네?”
어쨌든 잘 어울리는 남녀 한 쌍은 오늘도 진도는 단 0.1도 진행되지 않았다.
“그게 말이야……."
요한은 오드리에게서 받은 새로운 퀘스트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다.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속한 길드 마스터고 함께 싸우는 전우로서 그녀를 존중하고 있는 그였다.
말해 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기에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된 거야. 알았지?”
다만, 결론은 의논이 아니라 통보였다.
“네, 알겠어요.”
엘레노아도 그 부분에 관해선 딱히 불만이 없었다.
이 무리의 리더를 요한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음, 그러네. 인어족 해방 퀘스트를 받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뭐,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지?”
어차피 이곳 세인트 포탈은 밝혀진 게 거의 없는 곳.
뭘 알아야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런 부분에선 요한보다 엘레노아가 훨씬 더 능숙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제왕학을 공부했다.
거기에다가 사관학교를 조기 입학해 장교로서 능력과 소양을 쌓았다.
“요한 씨.”
“응?”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뭘?”
“인어족 부흥 퀘스트잖아요.”
“그렇지.”
“그렇다면, 다른 인어를 먼저 구출해서 전력에 더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오?”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인어들은 현재 구슬로 봉인된 상태로 휴대 전화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휴대 전화를 회수해 전력으로 사용한다면, 길잡이 역할과 동시에 훌륭한 병사로도 쓸 수 있으리라.
“괜찮죠?”
“괜찮네. 오케이!”
"?"
갑자기 소리친 요한.
엘레노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금부터 레아 네가 참모 역할 좀 해 줘.”
“네?”
당황한 엘레노아.
그냥 간단한 의견 개진 정도만 한 것인데 대뜸 참모를 하라니?
“전략은 확실히 마음에 들어. 하지만 전략만 좋아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잖아?”
“네. 뭐, 그렇죠.”
전략 또는 전술만으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이건 아주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레아 네가 전략&전술이 나보다 나은 것 같으니까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 줘. 내가 그것대로 해 볼 테니까.”
“정말요?!”
엘레노아의 눈빛이 갑자기 눈에 띄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마치 장난감을 앞에 둔 강아지 같은 얼굴이었다.
‘귀, 귀엽다.’
“어, 그, 그래.”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엘레노아의 이런 풍부한 표정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
“네, 지금부터 제가 전략을 짜도록 할게요. 잘 따라 주셔야 해요?”
“그럼, 나보다 훨씬 더 잘할 텐데. 따라야지.”
그녀는 살짝,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다.
요한의 눈엔 그게 훤히 보였다.
‘이게 그렇게 좋은가?’
어떻게 보면 귀찮은 일을 던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자, 그러면 일단 처음은 그 해구 근처로 가서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도록 해요.”
“그래, 그러자.”
이미 잔자클은 충분히 얻었다.
이젠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할 때였다.
***
엘레노아의 전략&전술대로 일단 해구 아래쪽의 주변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요한, 저쪽 배 무덤은 안 가?]
“안 가.”
[왜?]
“전략&전술이 바뀌었거든. 이제는 이 포탈 공략이 아니라, 해룡족과 해저인들 틈에서 인어족을 구하는 것으로. 그렇다면,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곳은 건드릴 필요가 없어.”
[아하, 그렇구나.]
하늘은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기에 궁금증이 해결 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해룡족이나 해저인들을 공격할 거야?]
“아무래도 그렇지. 녀석들을 죽이고 녀석들이 가진 수정 구슬을 파괴해 그곳에 봉인된 인어족을 구출해 전력으로 삼을 예정이니까.”
[오호?]
“자, 가 볼까?”
[가자, 가자. 재밌겠어!]
아무리 요한의 언데드가 는다고 해도 가장 가까운 존재는 하늘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야말로 요한의 옆에 딱 붙어서 말동무를 해 주는 언데드 동료였으니까.
또 외모도 인간 소녀의 모습이라 딱히 혐오감도 생기지 않았다.
엘라드는 너무 푸르딩딩하고 눈도 눈동자가 없이 흰자위만 있는 귀신.
류페이는 얼굴의 절반에 살이 없이 뼈가 훤히 드러나는 얼굴에 몸도 비슷하게 살 반, 뼈 반이었다.
언데드로선 훌륭한 외견이었지만, 평범한(?) 인간인 요한에겐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띵-!
[오, 요한. 찾았어.]
“어디야?”
[이곳에서 3시 방향 2.7km 떨어진 곳에 해룡족으로 보이는 녀석 3마리가 있어.]
“오케이!”
요한은 언데드 군단을 이끌고 하늘이 알려 준 방향으로 전진했다.
언데드 군단의 숫자는 많았지만, 모두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진 언데드들.
빠르게 움직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가자, 팬텀 스티드.”
“이히히힝!!”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음, 저건 뭐지?”
오늘도 더러운 잔자클을 사냥하고 막 마을로 귀환하려던 해룡족 전사 3명은 지평선 너머에서 까맣게 뒤덮은 무엇인가를 볼 수가 있었다.
“죽음의 기운!”
“제기랄, 적인가?”
“잔자클의 기운도 있어!”
“모두 전투 준비!!”
“젠장, 마지막 잔자클 무리한테 힘을 너무 많이 썼는데!!”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