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이렇게 일이 진행될 거야.
기회를 줄게. 이 아래로 내려가면 아마 상상도 못 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겠지. 요한 씨는 포기하는 사람은 근처 길드에 인계해 주신다고 했어. 선택해.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우리와 함께할 건지. 아니면 안전하게 다른 길드에 합류할 건지.”
엘레노아치고는 꽤 긴 일장 연설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호자 예비대 중에서 그나마 대장 격인 1명이 앞으로 나섰다.
바로 36세 백인 남성이자 재능충만한 탱커인 B급 헌터 잭 모리슨이었다.
그의 눈엔 충성심이 줄줄 흐르는 중이었다.
“아가씨, 저희는 오직 러셀 가문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이렇게 선택권을 주시는 건 언제나 감사한 일이지만, 죽든 살든 아가씨와 함께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도 저희가 부족한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전 경험이 많이 부족한 수호자들이었지만, 정신 교육으로 멘탈리티는 거의 완벽했다.
‘흐음.’
요한은 같은 인간이면서 언데드와 비슷할 정도로 충성심을 보이는 수호자들이 신기했다.
‘저런 게 명문 가문의 저력인가.’
확실히 이런 부분은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호자들은 요한을 따르기로 했다.
다음은 ACE 공격대 차례였다.
“너무 부담 갖지 마. 같이 안 가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해. 아마 요한 씨는 오히려 안 가길 원하실걸.
괜히 짐짝을 데리고 가는 격이니까.”
"......."
꿈틀.
엘레노아의 말에 팔머의 미간이 요동쳤다.
아무리 S급 헌터라고 해도, 자신 역시 A급 헌터인데 짐짝 취급받으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묘한 호승심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희도 함께 가겠습니다.”
“대장!”
“정말이에요?”
“위험한데?”
“지금부터 개인 선택을 합시다.
남을 사람은 남고, 갈 사람은 가도록."
"끄응."
ACE 공격대 대원들은 갈등했다.
솔직히 그들은 무서웠다.
평생을 안전하게 사냥을 해 온 그들이었다.
이런 철저한 야생은 그들의 멘탈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이미 꽤 상태가 안 좋아진 그들이었다.
힘을 내야 했지만, 낼 만한 힘도 남아 있질 않았다.
스윽-.
“저, 저희는 포기하겠습니다.”
“너무 힘들어요.”
“그래요.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어요.”
ACE 공격대대원들은 팔머를 제외하고 모두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따라나선다고 해도 멘탈이 버텨 주지 못할 테니까.
“류페이, 엘라드. 저 녀석들을 하늘의 인도에 따라서 다른 영국공격대에 인계해 주고 와.”
[응.]
“쳇, 알겠어.”
“알겠습니다.”
인간이 싫지만, 네크로맨서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대장님,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 겁니까?”
ACE 공격대대원들은 다시 만날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이별을 안타까워했다.
팔머는 그만큼 훌륭한 리더였기 때문이다.
팔머의 우수한 리더쉽 덕분에 숱한 위험에도 현명하게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공격대 대장으로서 여러분들과 끝까지 함께하는 게 맞겠지만, 저는 이 미지의 공간인 스카이 포탈의 끝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이대로 영원한 이별이 아니길. 그대의 앞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아멘.”
영국은 청교도의 나라였다.
특히 헌터들은 종교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숱한 죽음의 위협 속에서 멘탈을 관리하려면 꾸준한 명상은 기본, 종교의 힘을 빌려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ACE 공격대와 팔머는 서로를 축복하며 아쉬운 이별을 했다.
‘흠, 일단 깜냥은 마음에 드는데?’
요한은 팔머의 태도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팔머를 좋게 보지 않았다면, ACE 공격대와 함께 보내버렸을 것이다.
굳이 그들과 함께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요한이 그들에게 기회를 준 것은 보내 버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부하가 아니면 전부 짐이었으니까.
하지만 부하 후보 중 1명인 팔머라면 데리고 다녀도 나쁘지 않았다.
‘녀석을 파악하고, 녀석도 나를 파악할 기회니까.’
그러다 마음에 들면 다크 엘프를 맡길 인재로 영입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일단 이곳에서 잠시 쉬자, 레아.”
“네, 요한 씨. 모두 휴식.”
“휴식!!”
모리슨이 소리쳤다.
텐트를 치거나 불을 피우는 행위는 없었다.
그냥 적당히 앉을 곳을 찾아서 앉아서 주변을 경계하거나 무기를 정비했다.
잠시 후 ACE 공격대대원들을 데리고 간 삼인방이 돌아왔다.
“잘 인계했어?”
[응, 처음엔 영국인들이 좀 놀라긴 했지만, 적당히 손봐 주고 인계했어.]
“그래, 잘했어.”
[헤헷!]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 칭찬에 좋아하는 흑암 여제의 영혼이었다.
그렇게 짐 정리를 끝낸 요한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묘한 눈길로 해구 아래를 보았다.
‘과연, 이 아래엔 뭐가 있을까.’
그는 솔직히 포탈 안이 두려우면서도 즐거웠다.
고통은 무섭지만, 사냥에 집중하고 있으면 바깥세상의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 평생 사냥만 할 생각은 없지만.’
사냥만큼 휴식도 즐거운 일이었다.
경치 좋은 곳에서 좋은 공기 마시며 느긋하게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이 상충하는 감정이 요한을 늘 새롭고 짜릿하게 해주었다.
오늘도 그 짜릿함을 위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오케이!”
“예, 주군!”
[히히!]
“잔자클 구울은 앞장서라.”
“키에에엑!”
촤악-!
수많은 잔자클 구울들이 거의 동시에 해구 아래로 뛰어내렸다.
엄청난 숫자가 동시에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은 장관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요한은 템테이션과 서서히 떨어졌다.
“가자.”
“예!!”
엘레노아도 수호자들과 함께 해구 아래로 뛰어내렸다.
촤르륵-!
물살을 가르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털썩.
거의 수백 미터를 내려와 부드럽게 땅에 착지했다.
요한의 관측대로 바닥도 그렇게 어둡진 않았다.
물론 아주 살짝 어두워지긴 했지만, 시야를 확보하는 데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후우.’
모리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어둡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다.
안 그래도 버거운 환경에서 시야 확보까지 어려우면 정말 절망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활약한다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수호자들은 잡일 담당이었다.
처음엔 조금 불만스러웠다.
예비대이긴 했지만, 그래도 자랑스러운 러셀 가문에 고용된 헌터였다.
그런데 들러리라니?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요한과 함께 전투를 몇 번 겪어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카이 포탈은 그들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통곡의 벽이나 마찬가지였다.
“후우.”
“하아.”
모리슨 말고도 수호자들은 차오르는 긴장감에 호흡이 살짝 거칠어졌다.
꼭 긴장감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었다.
숨이 쉬어지긴 했지만, 이곳은 해저.
공기가 적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고 조금씩 환경에 적응하며 언데드 군단을 뒤따랐다.
요한도 이때만큼은 살짝 긴장되었다.
‘과연 어떤 몬스터가 있을까?’
킁킁.
[생선 비린내 너무 싫다, 주인.]
“참아.”
[너무 고약하다.]
“참으라고.”
템테이션과의 대화는 묘하게 늘 이런 식이었다.
당장은 별다른 위협이 없었다.
주변에선 물소리만 날 뿐이지 다른 소리는 없었다.
얼마나 더 움직였을까.
[뭔가가 옵니다.]
마나에 가장 예민한 사무엘이 먼저 반응했다.
“음."
사무엘이 뭔가가 있다고 알려 주자 요한도 한 박자 늦었지만, 이곳으로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기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캬아아악!!”
잔자클 구울도 감지했는지 괴성을 터트렸다.
촤아아악-!
잠시 후 시야 끝에서 물살을 가르며 무엇인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정지!”
척-!
언데드 군단은 자리에서 멈춰섰다.
엄청난 마나를 품은 녀석은 빠르게 날아오더니 그대로 삼지창을 요한에게 휘둘렀다.
[하아아압!!]
엄청난 공격임에도 요한은 가만히 서 있는 채로 피하지 않았다.
녀석이 코앞에 도착했다.
휙-! 쾅-!
하지만 공격에 성공하지 못했다.
엘리니아, 엘라드, 류페이, 엘레노아까지, 최강 수준의 강자 4명이 거의 동시에 녀석의 앞을 막아 세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무려 4명과의 경합에도 미지의 존재는 오히려 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뭐야, 이 녀석?’
엄청난 몬스터라고 하기엔 모호했지만, 아무튼 엄청난 존재였다.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서 녀석의 사진을 찍어서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문제는 한 번 더 터졌다.
[상대방의 정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뭐, 뭐?!”
보통이라면 속으로 놀랐을 것이었지만, 너무 놀라는 바람에 입 밖으로 삐져나왔다.
‘정밀 분석 프로그램이 녀석의 정보를 읽지 못했다고? 이게 무슨 말이야.’
“안내인 씨, 뭐야 이거?”
샤악-!
평소엔 조용히 스마트폰 안에 있는 안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플레이어의 스킬론 파악할 수 없을 만큼 격이 매우 높은 존재입니다. 스킬 레벨을 더 올리시는 걸 추천합니다.”
“제기랄, 어쩐지!!”
분명히 현실임에도 묘하게 게임같은 세계였다.
어쨌든 적의 정보 파악은 실패로 돌아갔다.
슈우욱-!
‘처음부터 저런 미친 존재라니.’
게임이나 영화와는 다른 현실 세계라는 증거였다.
게임이나 영화였다면, 약한 녀석들부터 나타나 조금씩 주인공에게 성장할 시간과 기회를 주었을 테니까.
‘이거 골치 아프네.’
이곳은 경험치를 추가로 얻을 수 있는 포탈.
요한은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레벨이나 더 많이 올리려고 했다.
스카이 포탈에서 나타나는 보스몬스터는 결코, 만만치 않으니까.
하지만 시작부터 보스급이 등장한 것 같았다.
[배짱이 좋군, 잔자클 따위가 이곳에 나타나다니.]
다행히도 녀석은 곧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공중에 떠서 삼지창을 잡고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겨우 말을 하는 것뿐인데도 느껴지는 압박이 어마어마했다.
별로 좋지 못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물러서지 않았다.
도망칠 수도 없을뿐더러 상대방에게 얕보이지 않으려면 당당해야 했다.
촤악-!
템테이션을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무섭다. 주인.]
“시끄러워.”
템테이션은 엄살을 부렸지만, 요한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긴장되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잠자코 내가 이끄는 대로나 움직여.”
[……알았다, 주인.]
지금은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목숨이 오가는 아주 중요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