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한 번 느끼기 시작한 공포는 그렇게 쉽게 꺼지지 않았다.
골렘이라도 도움이 됐다면, 그것을 믿고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믿고 있었던 골렘마저 언데드의 손에 처참하게 파괴되고 있었다.
안 그래도 S급 2명을 기습하는 거라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이미 꽤 많은 마법사 동료가 사망한 마당에 굳이 목숨 걸고 싸우고 싶지 않았다.
“베르디토!”
“가, 같이 가!!”
그나마 공간 이동 마법이 있는 마법사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긴 거리를 한 번에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나머지 공간 이동 마법이 없는 마법사들은 난리가 났다.
공간 이동 마법이 있는 마법사들은 살기 위해서 혼자 도망쳤다.
여유만 있다면 실력에 따라서 추가로 다른 사람들과 도망칠 수 있었겠지만,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선 자신의 목숨이 우선이었다.
“젠장!”
촤악-!
“커헉!”
엘레노아의 무자비한 검날이 마법사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운전기사의 사망에 단단히 화가 난 그녀는 단 한 명도 살려 둘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공간 이동 마법으로 몇 명의 마법사가 도망치자 다시금 분노한 것이다.
“어딜 가!!”
푸욱-!
“크헉!”
“고, 골렘, 제발 좀 살려 줘!!”
어떻게든 골렘의 도움이 필요했다.
마법사의 약점인 근거리 전투를 보완할 수 있는 강력한 병기가 무력화됐으니 말이다.
골렘은 모두 요한의 손에 박살이 나고 공간 이동 마법으로 사라진 마법사를 제외한 전원이 엘레노아의 검에 쓰러졌다.
턱-!
“커헉, 제, 젠장.”
엘레노아는 일부러 리더급 마법사는 죽이지 않았다.
정보를 캐내고 러셀 가문의 감옥으로 데려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주, 죽여라.”
마법사는 그래도 꼴에 남자라고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았다.
“그래, 구걸하지 마. 어차피 나중에 실컷 구걸하게 될 테니까. 지금은 입 닥치고 있어.”
엘레노아의 싸늘한 말이 마법사의 귀를 후벼 팠다.
덜덜.
마법사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몸을 떨어야만 했다.
‘쯧.'
요한은 그 모습을 보곤 혀를 찼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엘레노아는 왜 건드려.’
요한과 엘레노아는 그동안 쭉 함께 다니며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다.
일반적인 수다와 비교하면 월등히 적은 대화는 맞았지만, 그래도 한 번 입을 열면 꽤나 말이 많아지는 요한이었다.
그런 요한의 주도로 엘레노아와 요한은 꽤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의견과 생각을 공유할 수가 있었다.
그 대화 끝에 요한은 엘레노아가 MUK에 대해서 별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가문의 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녀의 주력 활동 무대는 한국과 베트남이었다.
MUK야 엘레노아가 러셀 가문의 중요한 인물이라 노린 것이지만,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었던 최악의 적을 건드린 것이다.
자기 사람이라면 따뜻하진 않더라도 의외로 잘 챙겨 주는 성격의 그녀인데 운전기사를 그렇게 죽여버렸으니…….
그녀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MUK, 너희들은 오늘부터 내적이야. 내 손으로 뿌리까지 다 뽑아 내주겠어.”
“크, 크큭. 아널드 그놈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네년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우드득-!
"켁!"
엘레노아가 힘을 조금 주자 마법사가 혀를 축 내밀며 눈알이 뒤집혔다.
“레아!”
분명히 살려서 고문할 거라던 엘레노아였다.
그랬던 그녀가 마법사를 죽이자 깜짝 놀란 요한이 소리쳤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요한 씨.”
“응?”
“어차피 요한 씨가 시체에서 영혼을 추출해서 정보 같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했잖아요.”
“뭐, 그렇지?”
이것 또한 요한과 둘의 대화로 엘레노아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떻게 보면 정보를 유출하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둘은 약속했다.
서로에 대한 정보는 둘만의 비밀로 하기로.
물론 이것은 언제든지 한쪽이 배신하려고 하면 깨질 수 있는 약속이었다.
둘은 서로를 믿기에 간단한 정보 정도는 공유했다.
요한은 그녀에게 자신의 헌터 정보를 공유했고, 엘레노아는 요한에게 생각이나 생활 같은 개인 정보를 공유해 주었다.
‘나야 뭐, 어차피 분석 프로그램 한 번 돌리면 상대방의 스킬이나 스탯 같은 능력 다 확인할 수 있으니까.’
굳이 헌터 정보는 필요가 없었다.
엘레노아는 그런 부분을 몰랐기에 굉장히 쿨한 성격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게 조사해 주세요.
전 화가 나서 살아 있는 걸 못 보고 있겠어요.”
“뭐, 그래……."
엘레노아를 중심으로 풍겨 오는 서늘한 기운으로 인해서 요한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MUK의 습격 사건은 곧 영국의 전 언론사를 타고 세계로 퍼져 나갔다.
왜냐하면, 이번 습격 사건은 단순히 러셀 vS MUK의 대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레노아가 있긴 했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한국 국적의 러셀 길드를 운영하는 길드 마스터였다.
국적도 영국과 한국의 복수 국적자였고.
거기에다가 요한이라는 걸출한 S급 헌터까지 이번 습격 사건에 개입되어 있었다.
당연히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번 사건으로 가장 분노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 정부였다.
베트남의 서기장이자 국가 주석인 응우엔푸쫑의 공식 대변인은 기자 회견을 열고 영국을 맹비난했다.
“영국의 안일한 치안의 대처와 국빈에 대한 안일한 대우로 베트남의 영웅인 김요한 헌터를 위험에 빠트렸다. 비록 습격 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국이 잘해서가 아니라. 김요한 헌터의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각성하고 MUK를 단죄하든지. 김요한 헌터에 대한 경호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베트남이 자국과 직접 관계가 없는 사건에 대해서 5분이 넘는 시간을 내서 기자 회견을 했다.
원색적인 비난까지는 아니었지만, 꽤 공격적인 어투였다.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요한이 베트남에서 가지는 위상이 어마어마했기 때문.
당연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도 빼놓을 수가 없었다.
현재 베트남은 위기였다.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로 남아서 통제를 하고 있던 덕분에 크게 티는 나지 않았지만, 국가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최근 스카이 포탈이 생겨난 이후로 포탈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스턴트 포탈의 발생 빈도 증가는 기본, 그동안 안정적이던 정규 포탈도 폭주 빈도가 늘어났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선 강국이었지만, 헌터 선진국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스카이 포탈을 제어할 길드를 찾지 못하고 요한에게 맡겨 버릴 정도였으니까.
덕분에 민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었지만, 불만이 쌓이면 국가 경쟁력에 큰 타격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인민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고 한 것이다.
여전히 베트남 인민들은 요한을 영웅이라고 믿고 칭송하고 있었다.
불법이지만, 요한을 캐릭터화한 상품들이 암시장에서 돌면서 불티나게 팔리는 중이었다.
귀여운 굿즈 같은 것은 특별히 단속하지는 않지만, 화장품이나 식품 같은 예민한 것은 베트남 당국에서도 철저히 단속하고 있었다.
그런 베트남 영웅이 다른 나라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보도하면?
당연히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페이크북 베트남 서버]
- 지금, 영국 놈들이 감히 우리 영웅에게 무슨 짓이야!!
- 영국에서 일 끝나면 베트남에 돌아오셔서 일하실 분인데, 감히!!
-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김요한 헌터님. 당신은 꼭 무사하셔서 우리 베트남에 돌아오셔야 해요 ㅜㅜ.
- 저 근본도 없는 해적 놈들 진짜!!
정부의 의도대로 베트남 인민들은 분노했다.
몇 명의 과격한 인원들은 영국대사관 앞까지 쳐들어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덕분에 베트남 정부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있었다.
사회의 불안과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데 성공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뭔가 확실한 대책이 필요해. 이대론 답이 없겠어.’
응우옌푸쫑 주석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
쾅-!
“레아야!”
요한과 엘레노아가 휴식을 취하는 호텔 방으로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머니?”
그 사람은 바로 러셀 가문 최초의 동양인 며느리인 엘레노아의 어머니였다.
대단한 미녀는 아니었지만, 아기자기한 이목구비가 귀여운 상이었다.
‘레아의 미모가 사기급인 건, 어머니를 닮은 게 아니라 아버지 쪽 유전자를 닮은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MUK의 습격을 받았다며. 괜찮은 거니?”
“네, 어머니. 괜찮아요.”
“어머, 어머. 그 씹어 죽여도 모자란 것들을 봤나. 감히 내 딸을!!”
엘레노아의 어머니는 연신 욕하기 바빴다.
말의 80%는 다 욕이었다.
영어로 된 욕이었지만, 워낙 영어 욕은 유명하니 요한도 정확한 뜻은 몰라도 욕이라는 것 정도는다 알아들었다.
“어, 어머니.”
“왜 그러니, 레아야?”
엘레노아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요한을 힐끔거려야 했다.
아무리 감정을 밖으로 보이지 않아 얼음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였지만, 요한의 앞에서도 거침없는 어머니의 행동은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엘레노아의 어머니는 뒤늦게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어머. 호호호.”
요한과 눈을 마주친 그녀는 입을 가리며 민망한 웃음을 흘려야 했다.
“흠흠, 잠시 로비에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올게.”
요한도 민망함에 별다른 볼일은 없었지만, 로비에 다녀오기로 했다.
“네, 네. 다녀오세요.”
방을 나온 요한은 느긋하게 로비로 향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중이었다.
띵-!
8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백인 3명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눈이 마주친 요한과 백인들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스마트폰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덜컹-!
'응?'
“뭐, 뭐야?”
갑자기 잘 움직이던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추었다.
요한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막 호텔에 머무는 매니지먼트 직원에게 전화하려고 했다.
비상벨이 있었지만, 영어가 안되는 그가 딱히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없었으니까.
비상벨은 백인 3명이 누르게 내버려 두려고 했다.
스윽.
‘응?’
그런데 백인들의 태도가 이상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비상벨도 누르지 않고 제자리에서 꼼지락거렸다.
“아, 젠장.”
순간 아차 싶었다.
“죽어!”
백인 3명이 동시에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요한에게 휘둘렀다.
쿵-!
본능적으로 단검을 피한 요한은 금방 엘리베이터 벽에 부딪혔다.
‘좁아……!’
언데드를 부르기엔 너무 좁은 곳이었다.
‘지금 상황에선 티쓰!’
파바박-!
팅팅팅-!
“젠장, 죽어!!”
3명의 백인은 첫 번째 공격이 실패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어떻게든 죽이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
씨익-!
하지만 요한은 웃었다.
“첫 번째 공격에 성공했어야지, 멍청한 놈들아.”
"?"
뜻을 알 수 없는 한국어에 백인 3명은 의아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