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비밀 회의실엔 이미 현직 영국총리인 헬렌 총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분 어서 오세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부른 점은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뇨, 뭐. 워낙 사안이 중대하니 그럴 수도 있죠. 다른 것도 아니고 블러디 캐슬인데.”
“호오 이거 제가 보낸 요원분들이 미리 말했나 보군요.”
상대가 영국 총리라고 해도 요한의 말엔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저는 이곳에 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후후, 그런가요. 그렇다면 오히려 요원 분을 칭찬해야겠군요.”
요한의 거침없는 말에도 불구하고 헬렌 총리는 그저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대외적으로 봄의 여인이라고 불릴 만큼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미지일 뿐이었다.
어느 나라 정치든 부드럽기만 해선 절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부드러움 속에 누구보다 날카로운 칼날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블러디 캐슬과 관련해 영국 정부에서 제게 할 말이 따로 있나요?”
“흐음.”
헬렌은 요한을 의외라는 표정으로 보았다.
‘쉽게 빈틈을 주지 않겠다는 건가. 아니면, 미스 러셀의 적절한 조언 덕분인가.’
그녀는 요한에게 3선 국회의원 이상의 관록을 볼 수가 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 실수하지 않으려고 쉼표 하나 허투루 찍지 않는 느낌이었다.
“최근에 블러디 캐슬에 포탈이 생겼어요.”
“오, 최근에요?”
모른 척, 아닌 척.
정치인이 되려면 꼭 필요한 스킬이었다.
그러면서도 ‘최근’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의표를 찔러 왔다.
헬렌은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S급 위에 S급이라는 칭호를 받은 헌터라고 해도 입으로 하는 건 정치인인 그녀가 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 대면부터 그런 착각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녀가 정치인으로서 싸워 왔다면, 요한은 생존을 위해서 싸워 왔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절대 꼬투리 잡히면 안 됐다.
요한이 헬렌보다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후우, 제가 졌어요. 인정할게요.
우린 정식으로 당신에게 의뢰하고 싶어요.”
“오, 의뢰요?”
“네, 블러디 캐슬 사건은 확실히 우리의 방치가 있었던 게 맞아요.
꽤 많은 사람이 실종됐고 사망했죠.
하지만 우리가 원했던 건 아니에요.”
“우리라…… 꽤 묘한 표현이네요, 그 말.”
요한의 비꼼이 헬렌 총리를 공격했다.
“네, 인정해요. 무책임한 말이란 거. 하지만 우리도 우리만의 사정이란 게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저지른 죄를 해결하려고 해요.”
“엄연히 외부인이자 사건의 피해자인 저에게 요구하는 게 조금 웃깁니다만.”
“후후.”
헬렌의 웃음엔 부드러움 대신 슬픔이 새겨져 있었다.
요한은 속지 않았다.
‘정치인의 표정이야.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 나는 그저 원하는 것만 얻으면 끝이야.’
평소엔 모른 척하다가 필요할 때마다 슬픈 척, 불쌍한 척, 아쉬운 척하는 아저씨들을 상대했던 요한이었다.
표정에 흔들리지 않았다.
“뭐, 블러디 캐슬 사건으로 사람이 죽었다니 안타깝군요. 하지만 그건 저랑 딱히 상관없지 않을까요?”
“네, 그렇죠. 그래서 의뢰 드려요.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비밀 조직인 MUK를 토벌해 주셨으면 해요.”
“그건 곤란하네요.”
0.1초의 망설임도 없는 거절.
“네?”
헬렌은 설마 이 부탁을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당황했다.
“아니, 조건도 안 들어 보고 거절하시는 건가요?”
아무리 부드러움의 대가 헬렌 총리라고 해도 그녀 또한 인간이었다.
계획과 완전히 다른 전개에 당황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네,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그 의뢰는 수행할 수 없을 거 같네요.”
“무, 무슨!”
“영국 본토 내에 있는 MUK 토벌 정도라면 모를까. 어디서 손 안대고 코 풀려고 그러세요. 양심이란 게 있으면 그러시면 안 되죠.”
조금만 더 일찍 의뢰를 받았다면, 수락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MUK 녀석들이 조금 성가시긴해도 영국 정부랑 똑같은 녀석들이지. 어느 쪽이든 선과 악으로 정의 할 수 없어. 그런 녀석들을 몬스터도 아니고 토벌이라고? 장난하나.’
사람을 쉽게 봐도 유분수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들이라고 해도 같은 인간을 몬스터 토벌하듯이 토벌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남 좋은 일을 고생해서 처리해 주고 싶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와 엘레노아를 공격하는 녀석들로 충분해.’
나머지는 영국 정부에서 알아서할 일이었다.
“……당신은 정말로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요.”
“그냥 아시는 게 없는 겁니다.
제가 성격이 모났기는 해도 불합리한 것 정도는 눈치가 빠르거든요.”
언데드 마법사의 말에 따르면 MUK도 할 말이 많은 조직이었다.
마법사 조직은 헌터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었다.
문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건 헌터 시대 이후부터였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스코틀랜드 태생이었다.
멀린이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설이 있긴 했지만, 그것과는 그다지 상관은 없었다.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때도 스코틀랜드 왕국을 지원했을 정도로 역사가 깊었다.
그들은 영국의 간섭을 싫어했다.
비록 영국의 땅이 된 지 오래되었지만, 역사를 잊지 않았기에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독립 방법이 많이 격하긴 했지만, 아예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한국도 독립의 역사가 있는 나라니까.’
한국과 스코틀랜드의 차이는 독립에 성공했느냐와 아니냐였다.
‘그렇다고 내가 스코틀랜드를 독립시켜 줄 건 더더욱 아니지만.’
남의 나라 사정에 괜히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후우, 어쩔 수 없군요. 이거 제가 한 방 제대로 먹은 것 같네요.”
“한 방이라뇨. 그냥 의뢰를 거절했을 뿐인데요.”
“알겠어요. 더는 토벌 얘기는 하지 않겠어요.”
“뭐,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헬렌 총리는 아쉽지만 포기해야 했다.
협박이나 회유에 쉽게 넘어오는 상대가 아니었다.
S급 헌터가 돈이 부족하겠나, 명예가 부족하겠나.
아니면 힘이 부족하겠는가?
“그렇다면 혹시 스카이 포탈에 관해선 관심이 있으신가요?”
어쩔 수 없지만, 플랜 B로 넘어가야 했다.
“오, 스카이 포탈. 그 얘기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엘레노아가 통역해 주기도 전에 ‘스카이 포탈’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반색했다.
원래라면 몇 달은 쉬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성 투어에서 일정을 망쳐 버린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포탈 장인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했는데, 스카이 포탈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하지만 이미 한국도 러셀 길드를 제외한 20대 길드가 연합해 든든한 카르텔을 형성한 상태였다.
요한으로선 다른 스카이 포탈을 조사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서 곤란하던 차였다.
헬렌의 제의는 오랜 가뭄 속의 단비와도 같았다.
“스카이 포탈을 공략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여전히 속도가 나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에게도 스카이 포탈을 공략할 수 있는 권리를 드리려고 해요.”
어찌 들으면 헬렌이 많은 양보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요한에겐 통하지 않았다.
“고수끼리 왜 이러실까. 권리라니요. 제가 그런 권리 따위에 넘어갈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
헬렌 총리의 말문이 또 막히고 말았다.
‘도무지 한마디도 지지 않는구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알았어요. 정식으로 당신에게 스카이 포탈 공략 의뢰를 하겠어요.”
“큭큭, 그렇게 나오셔야죠.”
애초에 스카이 포탈 클리어 경험은 전 세계에 요한밖에 없었다.
그런 요한에게 권리 따위로 유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요한도 포탈 장인의 힌트를 얻기 위해서 스카이 포탈이 급하긴 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정보였기에 여간 중요한 게 아니었다.
“후우, 다른 나라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것처럼 피곤하네요.”
“뭐, 자세한 건 실무자끼리 얘기 하도록 하고. 이렇게 국회에 초대도 받았는데. 음식 대접은 안 해주나요?”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네, 가시죠.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예스.”
저녁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헌터는 얼마든지 대식이 가능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 국회까지 왔는데 이곳 음식을 먹어 보지 않으면 식도락 여행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날 요한은 생전 처음으로 영국총리에게 제공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아, 영국 전통식…….'
결국,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
다음 날 요한은 영국 헌터 협회에 방문했다.
스카이 포탈 관련해서 합의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협회에 방문한 요한은 떨떠름한 협회 직원들의 눈빛을 받아야 했다.
스카이 포탈은 요즘 가장 핫한 이슈이며, 현재 각국의 치열한 자존심 싸움의 장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스카이 포탈 공략을 위해서 정부가 외국인에게 정식 의뢰를 했다.
헌터 협회로선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또각또각-.
요한의 옆엔 영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엘레노아 러셀이 함께 있었으니 말이다.
“요한 씨랑 협회에도 다 와 보네요.”
“그러게, 내가 다른 나라 협회에 올 줄이야.”
“정말 요한 씨와 함께 다니면 심심할 일은 없어서 좋네요.”
“아, 그러세요.”
요한으로선 딱히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조용한 삶을 살고 싶은 그에겐 심심함이 축복이었다.
영국 헌터 협회도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는지 협상 내내 협회장은 커녕 간부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정부의 의뢰를 받고 찾아온 S급 헌터인데 대접이 이런 식이라니,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요한은 딱히 상관없었다.
그는 허례허식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리만 얻으면 충분하지.’
괜히 협회장이고 간부고 만나면 피곤하고 귀찮을 뿐이었다.
넉넉한 보상은 덤이었다.
그렇게 협의를 끝내고 담당자와 악수로 끝낸 뒤 협회를 빠져나왔다.
“요한 씨.”
“왜?”
“혹시 이번 스카이 포탈 공략.
저도 좀 도와도 될까요?”
엘레노아도 이번 일에 욕심을 내었다.
“오, 도와주려고?”
요한은 이번엔 도움을 굳이 거절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크 엘프 포탈은 우연히 다크엘프의 협조를 얻은 덕분에 쉽게 공략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스카이 포탈은 사정이 달랐다.
그런 우연을 2번이나 바랄 수는 없었다.
그러니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런데 러셀 길드는 여전히 베트남 쪽 일로 바쁘지 않아?”
“아니요. 이번엔 대한민국의 러셀 길드 마스터가 아니라, 러셀 가문의 손녀로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그래?”
“네.”
“음, 그러면 돈 안 줘도 되는 거지?”
“네?”
“아니, 그렇잖아. 러셀 길드라면 내가 챙겨 줘야 할 곳이니까 협조라는 의미로 보상을 챙겨 줄 수 있겠지만, 러셀 가문이라면 굳이 내가 챙겨 줄 이윤 없지. 오히려 끼워 주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거 아냐?”
궤변이고 억지였다.
하지만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게 요한이라는 남자였다.
“아……."
늘 옳은 말, 맞는 말만 듣고 자란 엘레노아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귀족 교육을 철저히 받은 것은 맞지만, 능구렁이 같은 정치인과 붙어도 밀리지 않는 화술을 가진 요한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렇네요.”
“큭큭. 농담이야, 농담. 보상은 적당히 챙겨 줄게.”
"......."
어쩐지 상처받은 눈빛으로 요한을 쳐다본 엘레노아였다.
삐질.
‘아, 괜히 장난쳤나?’
살짝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