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무리 교외라고 해도 무려 런던 교외인데 그정도 규모의 땅이라니. 미쳤군.’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건 단순히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만큼 러셀 가문의 힘과 규모가 엄청나단 뜻이었다.
30분이 더 흘러서 거대한 저택단지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리무진은 저택 단지에서도 조금 더 들어가 단지 내에서도 가장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그곳에 이미 집사들과 메이드들이 좌우로 쫙 사열해 기다리고 있었다.
덜컥-.
리무진의 문이 열리고 양쪽으로 엘레노아와 요한이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그리고 동방에서 오신 귀인 요한 킴 씨.”
이미 요한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굴었다.
“레아, 나 온다는 거 알렸어?”
“아니요.”
‘뭐, 러셀 가문 정도의 정보력으로 모를 리가 없겠지. 아니, 모르면 더 이상하겠지.’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곳에 온 것도 특별한 용건이나 거래 같은 공적인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성 투어라는 휴양을 즐기기 위해서 잠깐 들린 것이니 말이다.
“아참, 레아.”
“네, 요한 씨.”
“성 투어인가 하려면 준비할 게 있어? 있으면 미리 해 두려고.”
“아뇨. 모든 건 제가 준비해 드릴게요. 그냥 몸만 오시면 돼요.”
“오케이, 그러면 나는 레아 너만 믿는다?”
“네.”
“좋아.”
그 정도면 충분했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과연 유럽의 어떤 성들이 날 맞아 주려나.’
휴양을 즐길 핑크빛 미래를 꿈꾸었다.
‘아 참, 리버풀에서 축구 경기 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축구를 막 좋아하진 않았지만, 요한도 남자였기에 EPL에 대한 낭만이 있었다.
먼 길 왔으니 평소에 동경하던 직관의 열기를 느껴 보고 싶었다.
“요한 씨, 이쪽으로.”
“아, 네.”
요한은 엘레노아와 어깨를 나란히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도 오랜만입니다.”
“응 오랜만이야. 알프레드.”
‘풉.’
집사의 이름을 듣자마자 뿜을 뻔했다.
알프레드, 한국에선 개그 소재나 코미디 요소로 많이 쓰는 집사의 이름이었다.
다행히 입 밖으로 뿜지는 않았다.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가주님께 인사. 아니면 휴식부터?”
“아버지는?”
“출타 중이십니다.”
“그러면 할아버님부터 뵐게. 그분도 무척 보고 싶어 하실 거야.”
“예,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응. 요한 씨.”
“왜?”
“제 할아버지이자 러셀 가문의 가주를 만나러 갈 건데. 괜찮죠?”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가자.”
“고마워요.”
“고맙긴 무슨.”
그냥 친구 할아버지를 만나는 데 어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러셀 가문의 위용에 감탄하던 요한이지만, 러셀 가문의 가주가 가지는 무게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헌터가 된 이후로 점점 커지던 자부심이 이제는 그 어떤 무게감도 개인으로만 따지면 자신보다 무거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설사 러셀 가문의 가주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알프레드 집사를 따라서 저택 가장 높은 층으로 향했다.
그곳엔 문이 하나밖에 없었다.
저택의 꼭대기 층은 가주의 집무실과 침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똑똑-.
“가주님 엘레노아 아가씨와 동방에서 온 귀인분이 오셨습니다.”
“들어오게.”
끼익-!
나무로 된 큰 문이 열리고 고풍스럽게 인테리어가 된 집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인테리어 자체는 나쁘지 않네.’
구경하기는 좋았지만, 딱히 자신의 사무실엔 하고 싶은 인테리어는 아니었다.
“어서 와라. 레아야 오랜만이구나.”
“다녀왔어요. 가주님.”
“어허, 가주님이라니. 오랜만에 보는 데 섭섭하구나. 아무리 네가 이제 성인이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호칭을 쓰는 게 영 별로구나.”
“네, 할아버지.”
“그래, 그래. 그 호칭이 훨씬 듣기 좋구나.”
노인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세계를 지배하는 가문의 가주라고 해도 사랑하는 손녀딸 앞에선 평범한 1명의 할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오랜만에 만난 손녀딸과 인사하느라 귀인을 모른 척했구려.
반갑소. 나는 러셀 가문의 가주를 맡은 아널드 러셀일세.”
“반갑습니다, 김요한입니다.”
“이거 요즘 가장 유명한 S급 헌터를 직접 보게 되어 기쁘군.”
명문 가문 가주의 아부성 짙은 말을 들었음에도 요한은 시큰둥했다.
“미스터 러셀도 S급 아닙니까.
같은 S급끼리 봤다고 기쁘다니요.”
넓다곤 하지만 그래 봤자 기껏해야 집무실에 불과한 작은 공간이었다.
그런 작은 공간에 무려 S급 헌터가 3명이나 모여 있었다.
이런 경우는 헌터 대회 같은 특별한 행사가 아닌 이상 거의 없는 일이었다.
S급 헌터들은 대부분 경쟁 관계였기에 사적으로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가. 이젠 현장에서 은퇴한 나 같은 노인네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매번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자네가 훨씬 더 대단하지. 안그러느냐 아가.”
“네."
단호한 대답.
“하하.”
겉으론 웃고 있지만, 어쩐지 살짝 서운한 느낌이었다.
“흠흠, 인사는 여기까지 하고. 레아의 길드에 다크 엘프 포탈을 맡긴다는 소식은 들었네.”
“뭐, 제가 속한 길드에 제 소유의 포탈 관리를 맡기는 건 딱히 대단한 일은 아니죠.”
“허허, 그렇지. 소속 길드에 포탈 관리를 위탁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지.”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말 그대로 이상한 일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요한의 신분과 상황 그리고 다크 엘프 포탈이 가지는 가치를 생각하면 절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물론 소유는 100% 요한의 것이었기에 포탈 관리를 통한 직접적인 이득은 크게 없었다.
그러나 그 포탈을 관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간접적인 이익이 어마어마했다.
러셀 가문의 지원을 받는 러셀길드가 돈이 부족해서 일을 못 할 리가 없었다.
“아직 스카이 포탈은 다크 엘프포탈 말곤 클리어가 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지. 특정 국가가 자네에게 클리어 의뢰를 하지 않는 이상 꽤 오랜 시간 ‘클리어된 스카이 포탈’이란 명칭은 다크 엘프 포탈이 유일하겠지. 덕분에 세계의 모든 이목은 현재 베트남 다낭으로 향했고, 현재 베트남 다낭은 자네의 개인 영지나 마찬가지. 레아의 러셀길드가 그곳 중심에 있다는 걸세.
이미 나한테까지 수많은 청탁 전화가 걸려 와서 전화선을 다 뽑았을 정도야.”
“가주란 분이 그래도 됩니까?”
“허허 뭐 어떻나. 내가 곧 러셀가문인데.”
“하긴.”
“그래서 러셀 가문을 대표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 우리 레아가 매번 신세를 지니까 말이야.”
“신세는 무슨. 오히려 제가 도움을 더 받는데요.”
정말 너무 하기 싫은 수많은 귀찮은 일들을 대신 처리해 주었다.
돈만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러셀 가문이 가지는 힘 덕분에 쉽게 처리한 일이 많았다.
게다가 연봉도 두둑하게 받고 있기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마음 같아 선 내가 보상을 하고 싶지만, 그러면 레아가 기분 나쁠 테니. 유럽에 있는 동안의 모든 비용과 일체의 편의 시설이나 편의 사항을 제공해줄 테니. 휴양 제대로 즐기게나.”
“오, 그건 감사하네요.”
“허허허.”
당당히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물욕이 없는 친구는 아니라던데 신기한 청년이네.’
하지만 그렇다고 요한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힐끔.
왜냐하면, 누구보다 사랑하는 손녀지만, 타인에 관한 관심이 병적으로 없었다.
인간적으로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일상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었기에 할아버지로선 오히려 흐뭇했다.
엄한 놈팽이와 만나서 쓸데없는 연애질은 안 할 테니까.
아널드는 이미 딸 1명을 그렇게 잃었다.
러셀 가문은 정략결혼을 강요하진 않는다.
오히려 가문이나 배경보단 과할 정도로 연인에 대한 능력을 철저하게 따졌다.
설사 유색 인종이나 빈민가 출신 갱스터라고 해도 능력만 철저하다면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능력이 부족하면 가문 전체에서 반대했다.
아널드는 둘째 딸을 가장 아꼈는데 타고난 게 타인에게 쌀쌀맞은 냉혈 체질의 가문 사람들 속에서 드물게도 애교가 많은 귀여운 아이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온갖 애교로 아비를 기쁘게 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결혼 상대라면서 웬 놈팽이를 1명 데리고 온 것이다.
얼굴은 잘생겼지만, 삼류 밴드 보컬이나 하는 한심한 녀석이었다.
노래를 들어 봤지만, 노력한 티는 났지만 딱히 이렇다 할 재능은 없었다.
평생을 바쳐도 절대 삼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반대했다.
가문의 전통이었고, 귀한 둘째 딸의 짝으로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격렬한 반대에 둘째 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문과 연을 끊고 평범하게 살아갔다.
‘어렸을 때부터 귀족답지 않은 아이였지.’
그런 점에서 타인에 거의 관심이 없는 엘레노아의 태도는 걱정이 되면서도 기꺼웠다.
엘레노아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이니 말이다.
‘정작 저 친구는 전혀 모르는 눈치구먼.’
러셀 가문으로선 이보다 더 훌륭한 엘레노아의 짝이 없었다.
탈S급 헌터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게 요한이 아니던가.
그리고 네크로맨서라는 특이한 클래스와 압도적인 언데드 운용 능력, 그리고 화려한 이력까지.
걸어 다니는 가문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아널드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이제 갓 (만) 19살의 손녀딸이었다.
인생을 좀 더 즐겼다가 연애든 결혼이든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긴, 그게 내 마음대로 될 리는 없겠지만.’
아널드는 명문가의 가주였지만, 보수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레아야 미스터 킴을 성 투어에 초대했다고 들었다.”
“네.”
“근데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냐?”
러셀 길드는 현재 그 어떤 곳보다 바쁜 상황이었다.
성 투어를 전부 즐기려면 적어도 6개월이 필요했다.
그가 알기론 지금 러셀 길드는 마스터가 6개월이나 빠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쉽지만, 며칠 있다가 한국에 돌아가야죠. 어차피 투어 자체는 꼭 제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하긴, 그렇겠구나. 어쨌든 오랜만에 봐서 정말 반가웠다. 그만 가보려무나.”
“네, 할아버지도 몸조심하세요.”
“허허, 그래그래.”
“그럼.”
“자네도 우리 러셀 가문의 자랑인 성 투어를 부디 즐겁게 즐기게나.”
“예.”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막 나오던 차에.
“어, 이게 누구야. 레아 아니야?”
금발의 미남자가 아는 체 말을 걸어왔다.
“엘레노아라고 부르라고 했지.
부르마 러셀.”
남자는 반갑게 말을 걸었지만, 감정 변화가 별로 없는 엘레노아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대답했다.
“이거 섭섭한데. 그래도 내가 오빠인데 말이야.”
“나는 너를 오빠라고 인정한 적도 없어. 러셀 가문의 수치 같으니라고”
“하핫, 그래그래. 그게 너의 매력이지. 언젠가는 그 건방진 입이 찢어질 날이 오길 기대하면서 말이야.”
“방금 그 말은 좀 거슬리는데?”
“넌, 뭐…… 쳇.”
부르마 러셀은 아까부터 살짝 거슬렸지만, 애써 무시하던 존재가 요한인 것을 알아차렸다.
못 보던 동양인이라 평소처럼 원숭이 취급하며 무시하려다가 늦지 않게 상대가 그 유명한 김요한인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다행히 인종 차별적 발언이 터지기 전에 입을 다물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