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요한은 전형적인 한국인답게 땅을 사 모으는 데 재미를 많이 느꼈다.
큰 물욕 때문이 아니라 의외로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다냥이라는 도시도 마음에 들었고 저렴한 가격에 매물도 쏟아졌다.
눈앞에서 보물이 싼 가격에 사달라고 일렁거리는데 그걸 안 사는 바보는 없었다.
당연히 매물이 나오는 족족 사들였고 어떤 땅 주인은 아예 요한을 찾아와 물건을 적당한 가격에 사달라고 부탁까지 했을 정도였다.
무리한 정도의 가격만 아니라면, 다 사들였다.
다낭 시장은 이런 요한의 태도에 찾아와 감사 인사를 했을 정도였다.
당시 다낭은 요한이 없으면 그대로 무너질 상황이었고, 부동산을 사들인다는 건 적어도 다냥을 버릴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180도 변하고 말았다.
요한에게 땅을 팔았던 사람들은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다낭을 떠났던 몇 명의 한국인은 뻔뻔하게 찾아와 판값을 내밀며 땅을 돌려 달라고까지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사람들은 요한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쫓겨났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래서 함부로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베트남 전역이 요한의 땅은 아니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고 가만히만 두면 100배, 1,000배 오를 수도 있는 땅을 정상 가격에 처분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투기꾼들이 아니었다.
다낭 근처의 아직 개발이 안 된 땅을 사들이며 다낭이 발전하면 사들인 땅도 값이 오를 거로 기대했다.
여러모로 베트남 다낭이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해지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요한은 대한민국에서 급히 날아온 엘레노아와 1:1로 마주 앉았다.
“보고받고 놀랐어요. 클리어된 스카이 포탈, 아니 다크 엘프 포탈 관리를 우리한테 맡기고 싶다고요?”
“엥, 그걸 왜 놀라?”
“네?”
“아니, 러셀 길드원이 러셀 길드한테 일을 맡기는 건데. 귀찮아해야지. 계약서도 쓸 건데.”
그러면서 입꼬리를 올리면서 씩웃어 보였다.
엘레노아는 그제야 요한이 장난 쳤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유머에 대해선 잘 모르는 엘레노아였지만, 눈치는 매우 뛰어났다.
“그렇네요. 오히려 제가 화를 내야겠군요.”
“그렇지, 그러니까 웃어봐.”
“네?”
화를 내야 한다고 했으면서 이제는 웃으라니?
엘레노아는 황당한 감정을 숨길수가 없었다.
“화날 때 웃는 게 일류라잖아.
에이, 재미없나?”
“네, 솔직히……."
“아, 그래. 미안.”
나름대로 개그 욕심 좀 내 본 요한이었지만, 엘레노아의 냉정한 대답에 시무룩해졌다.
“어쨌든 고마워요. 직접 조직을 꾸려서 운영하실 수도 있을 텐데.
굳이 저한테 맡겨 주셔서. 가문 어르신들도 정말 좋아하세요. 언제 한번 영국에 놀러 오라고 얼마나 성화이신지.”
엘레노아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하지만, 특유의 영국식 억양은 있었다.
워낙 건조한 성격에 억센 영국식 억양으로 인해서 누가 보면 화가 난 줄 알 정도로 차가운 말투였다.
요한과 말을 할 때는 그래도 부드러워졌다.
“오, 영국 좋지.”
“정말요?”
“그래, 영국 여행 언제 한 번 가보고 싶었고 스카이 포탈 클리어한 기념으로 당분간은 좀 쉬려고. 쉬는 김에 영국 좀 다녀와야겠다.”
“제가 가이드 해드릴게요.”
“와, 이거 미친 여행인데.”
“네?”
“아니, 그렇잖아. 러셀 가문의 공주님을 개인 가이드로 쓰다니 말이야.”
피식.
“그게 뭐예요.”
“어, 웃었네?”
“……제가요?”
“그래, 방금. 피식하고 웃었잖아.”
“글쎄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진짜야, 연기야.’
요한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표정은 완벽했다.
“뭐, 어쨌든. 자세한 사항은 밑에 애들끼리 나누도록 하고. 우리는 여행 계획표나 짜자. 영국에 유명한 게 뭐 있어?”
“성 투어 어때요?”
“성 투어?”
“네, 우리 러셀 가문이 유럽 전역에 소유한 성이 꽤 많아요. 옛날 방식으로 복원한 곳도 있고요.”
“오, 그거 괜찮은데?”
유럽 전통 방식으로 지은 성이라면 누구나 로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럽 최고의 명문가 중의 하나인 러셀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성이라면 결코 오래된 건축물 따위가 아니리라.
“좋아, 좋아. 그거 괜찮겠다. 비용은 보통 얼마나 해?”
성 투어라면 저렴하진 않으리라.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작 엘레노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응, 투어라며. 그렇다는 건 비용이 있다는 거 아니야?”
“아,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야?”
“네, 성 투어는 제가 방금 붙인 말로. 저희 러셀 가문이 소유한 성들은 다 개인 별장 개념이에요. 휴가철에 휴양 목적으로 가거나, 가문 행사 있을 때 지인들을 초대해 파티를 즐길 때 정도 사용해요.”
“아하.”
‘와, 역시. 러셀 가문의 돈X랄은 차원이 다르네.’
개인 별장을 성으로 만들다니 귀족 가문다운 발상이었다.
“하긴, 별장이니 비용이 나올 리가 없겠지.”
“네, 제가 말 안 해도 요한 씨정도면 어른들이 흔쾌히 공짜로 빌려주시겠지만요.”
“그런가?”
“네, 그만큼 이번 다크 엘프 포탈이 가지는 이득은 어마어마하잖아요. 지금 가문 어른 몇 분은 베트남에 오겠다고 난리던데요?”
당연한 일이었다.
유럽 최고의 가문 중의 하나였지만, 러셀 가문은 유럽 최고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랍 쪽 가문과 미국 쪽 가문의 견제를 뚫고 호시탐탐 세계급 가문의 자리를 노리는 러셀 가문에게 다크 엘프 포탈 관리권은 가뭄 끝에 내린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었다.
세계 최초로 클리어된 스카이 포탈을 관리할 수 있다?
전 세계 최고의 길드가 몰려들 텐데 살짝 편의를 봐주고 인맥을 쌓을 수가 있으리라.
그런 식으로 가문의 발전을 꾀할 수가 있었다.
물론 엄연히 대한민국의 러셀 길드에 관리 권한을 위임하는 형태였다.
직접적으론 영국에 있는 가문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서류 적인 부분에서였다.
엘레노아가 러셀 가문의 구성원으로 있는 상황에서 그런 서류 적인 부분은 아무 의미 없었다.
“그래서 영국은 언제 갈 거예요?”
“뭐, 마음 같아선 당장 가고 싶지만. 인수인계할 것도 남아 있고 저쪽 세계도 살짝 봐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아마 다음 달쯤?”
“네, 그러면 그렇게 알아둘게요.”
“뭐, 그래. 아 참, 그런데 캉구스사냥은 잘했어? 그거부터 물어본다는 게 깜빡했네.”
“아, 네. 괜찮았어요. 아, 그거 알아요?”
“뭔데?”
“의외로 캉구스의 모피가 가치가 높더라고요.”
“아, 진짜?”
“네, 저도 감정해보고 깜짝 놀랐어요. 속성 저항력도 꽤 있어서 일반인이 입고 다니면 그야말로 대박아이템이란 거죠. 지금 원단 시장은 이미 난리 났어요.”
“와, 대박이네.”
“하긴, 요한 씨는 시체를 수집하신다고 하셨으니 모르셨겠네요.”
“쩝, 어쩔 수 없지. 나한테 시체는 돈보다 더 가치가 높으니까.”
그렇게 요한과 엘레노아는 꽤 깊은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함께한 시간은 꽤 됐지만, 늘 딱딱한 사이란 느낌이 더 강했었다.
하지만 엘레노아가 한발 다가가고 말을 놓으라는 말을 한 이후론둘은 급격하게 친해지기 시작했다.
요한도 쌀쌀맞지만, 그래도 자신에겐 꽤 부드럽고 예쁘고 생각이 깊은데다가 대화도 잘 통하는 엘레노아가 싫지 않았다.
아니, 첫 만남부터 그녀를 싫어한 적은 없었다.
***
요한은 일단 사흘 정도 푹 쉬고 휴가 전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다크 엘프 포탈로 향했다.
엘레노아도 함께 갔다.
러셀 길드가 중개자 역할을 해야 할 테니 미리미리 안면이라도 터놓기 위해서였다.
“구원자님, 어서 오십시오."
“아, 장로. 수고가 많아.”
“별말씀을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은 할 만해?”
“구원자님 덕분에 할 만합니다.”
“잘됐네.”
프링고 일족을 거둬들인 요한이지만, 처음엔 무슨 일을 시켜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다고 한국에 데리고 가기엔 불안 요소도 많았다.
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하던 차에 괜찮은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바로 다크 엘프 포탈 안내인 역할이었다.
그들에겐 딱 좋은 일자리였다.
처음에 그들은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요한이 일을 시켜서가 아니라, 다크 엘프와 엮여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로서도 돈벌이가 있어야 일족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인간들 틈에 섞여서 살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가이드 공부는 잘하고 있지?”
“예, 시키신 대로 효율적인 가이드가 되는 방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 힘든 일 있으면 말하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크 엘프와 싸우지 말고. 다크엘프 쪽엔 내가 루펜한테 잘 말해둘 테니까.”
“예.”
가장 말 잘 듣는 장로도 다크 엘프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만큼 두 종족의 앙금은 깊었다.
새로운 직업 공부를 하는 프링고 일족을 위문한 요한은 엘레노아와 단둘이서 움직였다.
“왜 우리끼리만 가요. 실무자들도 끼고 가면 더 편할 텐데요.”
“멀잖아.”
“네?”
“여기 생각보다 훨~씬 더 넓어.
그래서 우리 둘만 빨리 다녀오는 게 편해.”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무슨?”
“아, 그래. 넌 모르지.”
"......?"
“삼족오.”
지잉-!
“까아아악!!”
요한의 부름에 맞춰서 시체 수납에 있던 삼족오 키메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건?”
“이번에 새롭게 얻은 키메라 언데드야. 크기도 크고 비행도 가능해서 먼 거리는 얘를 타고 다니면 편해.”
“아, 그래서……."
엘레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뭐 해. 가자.”
먼저 올라탄 요한은 엘레노아에게 손을 뻗었다.
“네……."
덥석.
그녀는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요한이 내민 손을 잡고 삼족오 키메라의 등에 올라탔다.
“꽉 잡아. 이 녀석 꽤 거칠어서 자칫 잘못하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네.”
촤악-!
삼족오는 날개를 쫙 펼치며 루펜이 있을 로드의 마을로 향했다.
꽈악-!
뒤에서 엘레노아가 요한의 옷깃을 강하게 잡는 게 느껴졌다.
‘이거 기분 좋은데?’
천하의 엘레노아가 자신을 의지 한다고 생각하니 입에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몇 시간을 빠르게 날아서 도착한 로드 마을은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요한!!”
마을 상공에 도착하자 루펜이 양팔을 저으며 반겨 주었다.
“저게 다크 엘프의 로드 마을이군요.”
“그래, 잘 봐 둬. 이제부터 인간과 교류할 종족의 심장부니까.”
“네.”
***
요한은 루펜과 엘레노아를 앉혀 놓고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설명해 주었다.
일단 다크 엘프 포탈의 개방은 당분간 보류였다.
각국의 길드나 기업은 불만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이대로 개방하면 다크 엘프가 딱히 교류할 만한 요소가 없어.”
“맞아요.”
“엥?”
고개를 갸웃하는 루펜과 달리 엘레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29장. 포탈 장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