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배에 거지라도 들었던 것인지 다크 엘프 소년은 비싼 도시락을 무려 3개나 더 먹는 만행을 저지르고 나서야 요한의 도시락 강탈 행위를 중지했다.
‘……무지막지한 식성이구먼.’
그가 구매한 도시락은 개당 2인분 정도의 양이었다.
사냥할 때는 밥을 먹는 데 시간을 들이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요한이라 1끼 정도만 든든히 먹고 나머진 그냥 굶었다.
그런데 요한의 허리에 겨우 걸치는 작은 다크 엘프 소년이 앉은 자리에서 무려 8인분을 혼자 다 먹은 것이었다.
‘돼지인가, 다크 엘프인가.’
꺼억-!
‘어쭈, 이제는 트림까지?’
정말 여러 가지로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엄청난 인내력으로 꾹참았다.
“이제 좀 살 것 같냐?”
“시, 시끄러워, 괴물!”
“허 참, 살려 줬더니 아예 네가 죽고 싶어서 기어오르는구나. 정보를 캐야 하니 죽이진 못하더라도 오늘 매 찜질 한번 해 줘?!”
요한이 눈짓하자 스켈레톤 워리어 1기가 양 주먹을 교차해 잡고 우드득거리며 다가왔다.
“뭐, 뭐 하는 거야?!”
“찜질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으으으 으아아악!”
퍽퍽퍽-!
***
“손 내려오지?”
번쩍!
“야만인, 악마, 괴물.”
“또 맞고 싶냐?”
끝까지 요한에게 괴물이라고 부른 대가로 그의 인내력이 바닥을 쳤고 결국, 다크 엘프 소년은 스켈레톤 워리어에게 실컷 두들겨 맞았다.
‘진작 이렇게 할걸.’
괜히 안 하던 착한 사람 흉내 낸다고 스트레스나 받았다.
“다시 묻는다. 묻는 말에 착실히 대답 안 하면 또 맞을 줄 알아. 이름.”
“루, 루펜……."
“오, 루펜. 이름 좋네. 너 다크엘프 맞지.”
“응.”
“좋아, 좋아. 이제야 좀 제대로 된 거 같네.”
씨익-.
요한은 입꼬리를 올리며 본격적으로 루펜이라는 꼬마 엘프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음, 이거 생각보다 사태가 더 심각한데?”
“도, 도와줘!”
“응?”
그때 갑자기 다크 엘프 소년이 요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굉장히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나 지금 너 심문하는 데 무슨 헛소리야.”
“당신 강하잖아.”
“뭐, 그렇지?”
“그러니까 도와줘.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할 테니까. 우리 종족을 좀 살려 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그게……."
루펜의 이야기는 복잡했다.
이곳 스카이 포탈은 원래 평범한 다크 엘프 종족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미지의 존재가 나타나 힘으로 다크 엘프를 제압하고 공간 전체를 암흑으로 감싸더니 이상한 곳으로 변화시켰다.
그 이후로 그 미지의 존재는 사라졌지만, 그 미지의 존재가 심어둔 부하들이 남아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크 엘프 전사들을 이상한 마법으로 과거의 기억을 없앤 채 오로지 피와 살육밖에 모르는 괴물로 만들어서 어디론가 보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게 내가 상대했던 와이번 라이더였군. 그래서 엘프 밴시가 과거의 기억이 전혀 없던 것이었어.’
이제야 이해하기 어려웠던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래서?”
“아빠가 그랬어. 예언에 따르면 혼란에 빠진 종족을 검은 구름의 남자가 나타나 구원해 줄 거라고.”
“풉, 검은 구름?”
“우, 웃지 마!!”
다크 엘프 소년도 민망했는지 얼굴이 시뻘게져 소리쳤다.
“그래서, 내가 그 일을 해 주면 나한테 뭐를 줄 건데?”
“그, 그걸 너에게 줄게.”
소년은 요한의 옆에 있는 보자기를 가리켰다.
“이거, 이미 내 건데?”
“그거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보자기 같지만, 사실은 봉인된 거야.
그 봉인은 나만 풀 수 있어.”
“뭐?”
깜짝 놀란 요한은 얼른 보자기를 풀어 보려고 했다.
턱.
“어?”
턱턱-.
몇 번이고 보자기를 풀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풀어 지지가 않았다.
“어이, 너. 이리 와 봐.”
딱딱.
스켈레톤 워리어까지 불러서 풀어도 보고, 찢어 보려고도 했지만, 보자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스켈레톤 워리어의 칼질에 흠집조차 나지를 않았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안 된다니까?”
“끄응, 근데 이거 뭐야. 뭔지 알아야 내가 이것으로 대가를 받을지, 말지를 결정하지.”
“비밀.”
"뭐?"
“그래도 탐나지 않아? 이렇게 철저하게 봉인한 게 평범한 물건이지는 않을 거 아니야?”
“끄응.”
요한은 당했다는 표정이었다.
지금까지는 뭔가 순진하면서도 바보 같았던 다크 엘프 소년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태도는 굉장히 유연하고 협상력도 좋았다.
애송이가 아니었다.
‘거참…… 일종의 퀘스트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후우,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미지의 존재는 이곳에서 떠날 때 우리 다크 엘프 종족의 기억을 봉인하면서 그의 수하에게 대항할 수 없도록 해 두었어. 그러니 그 수하를 대신 죽여 줘. 그러면 이걸 줄게.”
“흠…… 뭐, 좋아.”
“정말?!”
“나쁘지 않은 거래니까.”
“고마워!”
“의외군요. 플레이어 성격엔 거절할 확률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조용히 있던 안내인이 입을 열었다.
“정보원도 필요하고. 괜찮은 가이드도 생기는 거고. 가능하다면 이곳에 있는 다크 엘프의 협조도구해 보게.”
“이해할 수가 없군요. 왜 다크엘프의 협조가 필요한 거죠.”
“너 뭐 해?”
“응?”
그때 루펜이 요한의 말을 끊었다.
그의 눈은 의아함과 동정심이 담겨 있었다.
“왜 허공에다가 말을 해?”
“뭐? 너. 얘가 안 보여?”
“누가 있다고 그래.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그런 게 있다. 내 눈에만 보이는 거.”
“……그래, 알았어.”
말로는 이해했다고 했지만, 전혀 이해한 표정이 아니었다.
'쯧.'
어쨌든 그건 요한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속으로 대화 가능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저는 당신의 안내인이니까요.’
‘좋아, 나는 누군가 이 모든 사태를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해.’
‘딱히 틀린 말은 아니군요. 저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이 모든 게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우리의 끝을 좋게 볼 생각도 없는 것 같고.’
‘예.’
‘그래서 결정했어. 녀석을 죽일거야.’
‘예?’
안내인은 요한과 만난 이후로 가장 목소리가 흔들렸다.
‘특이 이 스카이 포탈을 보고 느꼈어. 여기는 단순한 감옥이나 그런 게 아니야. 다른 하나의 세계였겠지. 근데 그들이 말하는 미지의 존재가 그들을 멸망시키고 몬스터로 만들었어. 우리 지구도 그렇게 하지 말란 보장이 없겠지.’
‘……그렇군요.’
‘그러니, 더 강해지고 강해져서 녀석이 지구를 파괴하지 못하도록할 거야.’
‘알겠습니다. 제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하핫, 든든한걸?’
‘전 언제나 든든했습니다.’
'큭큭.’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응."
“내가 안내할게!”
"왜?"
“왜라니, 우리 거래!”
“아, 그건 천천히 할 거야.”
“뭐?”
“일단 지구로 돌아가서 해야 할게 있거든.”
“……돌아올 거지?”
“뭔, 소리야. 너도 같이 갈 거야.”
“뭐?”
“네가 죽으면 그 보자기 봉인도 못 풀잖아. 그래선 아주 곤란하다고.”
“자, 잠시만!”
요한은 루펜의 대답을 듣지 않고 스켈레톤 워리어를 시켜서 루펜을 둘러메게 했다.
“그 미지의 존재 수하가 어떤 녀석인 줄 알고 아무런 준비 없어 움직이나. 철저히 준비한 다음에 움직여야지. 안 그래, 스켈레톤?”
딱딱.
“거봐, 얘도 맞다고 하잖아.”
“거, 거짓말쟁이!”
“에헤이, 거짓말이라니. 사람 섭섭하게. 그냥 조금 더 있다가 약속지킬 거라니까?”
“가자, 스켈레톤.”
딱딱.
그렇게 요한은 루펜을 맨 스켈레톤 워리어와 함께 스카이 포탈을 빠져나왔다.
방법은 간단했다.
요한이 들어온 곳 근처에 나타나는 출구가 있었고 일반 포탈처럼 그곳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지잉-!
일반 포탈보다 더 심한 멀미를 느끼며 본능적으로 감긴 눈을 떴다.
"후우."
심한 멀미 기운 때문에 정신을 다잡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이제 이거 좀 놔줘!!”
“아, 쏘리. 놔줘.”
스켈레톤 워리어가 루펜를 땅에 패대기쳤다.
“꾸엑! 야!!”
“하하, 쏘리. 야, 제대로 했어야지. 루펜 화났잖아.”
딱딱.
스켈레톤 워리어는 손바닥으로 밋밋한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으으으, 젠장. 내가 왜 저런 인간에게 부탁한 건지.”
루펜은 어쩐지 자신의 행동이 무척이나 후회되었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지 오래였다.
“##$%%*&*0&*=”
그때 주변에서 시끄러운 베트남어가 들렸다.
“너희들 뭐야?”
그곳엔 요한이 사냥했던 다크 엘프 시체를 회수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내 사냥감에 뭣들 하는 짓이지?”
대답이 제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저들은 베트남어로 지껄였고 요한은 베트남어를 전혀 하지 못했으니까.
스릉-! 스릉-!
그들은 곧바로 칼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신할 수가 있었다.
“좀도둑들.”
“죽여!!”
“와아아아-!!”
그들은 요한의 주변에 언데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무기를 빼 들어서 달려들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김에 언데드를 소환하기 전에 곧바로 끝내 버릴 생각이었다.
"쯧."
어차피 싸울 생각이었지만, 이것으로 녀석들의 끝은 정해졌다.
“깔끔하게 처리해.”
지잉-!
허공이 갈라지면서 그곳에서 언데드 군단이 튀어나왔다.
“허헉!!”
요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많은 곳이 알고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다.
S급 헌터의 정보는 절대 공유하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인 헌터도 아니고, 엄연히 외국인인 베트남 헌터가 요한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 리가 없었다.
한국인 헌터였다면 그대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겠지만, 베트남 블랙 헌터는 싸우는 것을 택한 것이다.
촤악-!
“으흐흣, 다 죽여!!”
개중에 류페이가 가장 신이 났다.
그녀는 언제나 전투와 피를 참 사랑했다.
“허억!”
촤악-!
블랙 헌터 무리는 기껏해야 C~D등급이 대부분이었다.
미친 듯이 반항도 해 보고 발이 빠른 녀석들은 도망도 쳐 보았지만, 단 1명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타악-!
‘도, 도망쳐야 해!’
그렇게 빠르게 움직여 보았지만.
[으흐흐흐, 어딜 가게?]
“으, 으아아악!”
공중에서 떠다니는 하늘을 포함한 밴시와 고스트 무리에게 그대로 잡힐 수밖에 없었다.
“1명도 살려 두지 마. 귀찮으니까.”
“오케이!”
그렇게 요한이 사라진 틈을 타다크 엘프 시체와 마석을 훔쳐 가려던 베트남에서 유명한 블랙 헌터길드 하나가 완전히 사라졌다.
다낭에서 가장 크고 악질적인 조직이 사라지자 다냥의 치안이 좋아지는 의외의 효과도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