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더듬는 말투로 잠시 뜸을 들이던 주피크는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 저를 여기서 좀 빼 주시면 안 될까요?]
“뭐, 왜?”
[여, 여기 기운이 좀 무, 무서워 서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허 참,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랑 죽일 듯이 싸우던 미친 인형 술사가 무섭다고 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뭐, 그래. 일단 나가자.”
[가, 감사합니다!]
주피크는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일이 잘 풀린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오히려 한숨은 깊어졌다.
‘하아, 도대체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무리 좋은 일이 벌어져도 그것이 전혀 계획되지 않은 돌발적인 상황이라면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여기마저 정리하고 갈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네, 네…….]
주피크는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이 그렇다고 하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딱딱-!
‘응?’
위저드가 갑자기 턱뼈를 강하게 두드렸다.
비록 말을 못 하는 스켈레톤이었지만,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소리로 낼 수가 있었다.
큰 소리로 간결하게 2번 두드리는 건 잠시 무엇을 발견했다는 뜻이었다.
“뭐야?”
그곳으로 향하니 낡고 찢어진 책 1권이 놓여 있었다.
“어?”
뜬금없는 아이템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이, 이건?!”
덥석!
누가 뺏어 갈 사람도 없지만, 얼른 그 책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얼른 펼쳐 보았다.
촤르륵.
페이지가 넘어가고 안의 내용이 보였다.
샤악-!
“이거 뭐야. 아이템?”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미연이 요한과 어깨를 맞대고 아이템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맞아. 그런데 너 이거 읽을 수 있어?”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놀라긴 했지만,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음…… 아니, 전혀 모르겠어. 재미 없어.”
샤악-!
읽을 수 없는 글자로 되어 있는 바람에 그녀의 흥미는 금방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역시, 이번에도 그 문자로 되어있네.
미연은 전혀 모르는 글자였지만, 그는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한 쪽에 가까웠다.
코딩할 때 사용하는 문자, 『죽음의 서』에 기록된 문자가 바로 그 정체였다.
턱-!
책을 접고 표지를 확인해 보았다.
『키메라 제조법』.
‘역시, 주피크의 인형들은 『키메라 제조법』으로 만들어진 녀석들이었어.’
키메라, 다른 말로 하면 합성 생물.
키메라는 단순하고 명확하게 이거다, 라고 정의 내리기가 어려웠다.
다만, 다양한 종류의 것들을 조합해서 만드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편했다.
‘그래서 『키메라 제조법』 이 있다면, 인형이나 언데드 또는 다른 괴생명체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지.’
그는 네크로맨서니까, 다양한 시체를 조합해서 새로운 언데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문득 아차 싶었다.
‘아,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시체 흡수하지 말걸. 아,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겠네. 어떻게 옮길 방법이 없으니까.’
확실히 전투를 벌일 때는 굳이 몬스터의 사체를 챙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여러모로 실험을 위해선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 잠깐만 그게 아니잖아?’
만약에 그가 진짜 네크로맨서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게 만약에 스킬이라면?’
그러면 굳이 진짜 학술적인 네크로맨서처럼 굴지 않아도 될 방법이 있으리라.
‘일단 스킬을 익히려면 그 스킬북을 다 읽으면 된다고 했지.’
그래서 보통 포탈 안에서 발견되는 책들은 이상하게 발견한 사람 국가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때문에, 요한이 경매소에서 구매 했던 그 『죽음의 서』도 엄청난 가치에도 저렴한 가격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스킬을 익히려면 책을 읽어야 하는데 글자를 모르니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스킬북이라고 해도 쓰레기에 불과했다.
다만, 스킬북 자체를 수집하는 사람도 있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죽음의 서』도 억대가 넘는 돈이 걸려 있던 것이었다.
촤르륵-!
그는 다시 한번 더 책을 쭉 살펴 보았다.
‘오, 이 스킬북은 『죽음의 서』 와는 다르게 금방 해독할 수 있겠는데?’
처음엔 대부분 글자가 해독할 수 없었던 『죽음의 서』 와는 달리 많은 글자가 보였다.
‘좋았어. 일단 100% 해독한 다음에 고민해 봐야겠다.’
그렇게 의외의 수확까지 마치고 돌아갈 일만 남았다.
“얘들아, 짐 다 챙겼냐?”
딱딱-!
“와, 오빠 능력. 정말 편한 거 같아.”
“뭐, 그렇긴 하지.”
미연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녀도 솔로 헌터였지만, 요한과 다르게 짐꾼 회사는 고용해서 다녔다.
요한처럼 일을 대신 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없으니 귀찮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부럽다. 정말 부러워.”
“뭐, 어쩔 수 없지. 난 소환 계열이고 넌 암살 계열이라는 근본적 차이니까.”
"쳇."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알기에 혀를 찰 뿐이었다.
[저, 저…… 언제 나가나요?]
“지금 간다, 가. 가!”
[죄, 죄송합니다. 조,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고 싶어서…….]
그렇게 모든 정리를 끝낸 요한은 다다미방 한쪽에 형성된 출구로 나갔다.
지잉-!
“어, 어?!”
“기, 김 상이 나왔다!!”
거의 숨도 못 쉬고 기다리고 있던 일본인들이 반응했다.
“그, 그렇다는 것은?!”
“서, 설마?!”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도쿄를 위협하던 정신 에너지 반응이 과했던 포탈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강력한 진동과 함께 포탈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3분 뒤 포탈은 완전히 녹아내려 사라지고 없었다.
“와아아아아!!”
“포, 포탈이 사라졌다!!”
“반자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실시간 방송으로 지켜보고 있던 일본인들도 환호했다.
“와아아아!!”
이번 정신 계열 포탈 출현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고 일본 전 국민이 걱정하던 일이었다.
그러니 실시간으로 녹아 없어지는 포탈을 보고 환호를 내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와하하하!!”
“킴 상 반자이!!”
몇 명은 아예 요한을 찬양하기도 했다.
이번 의뢰로 국비 8,100억이 들기는 했지만, 헌터 피해 0명으로 그 유명한 정신 계열 포탈을 파괴한 건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일본 협회 측은 미리 준비했던 축하 파티를 열어서 요한을 대접했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다들 이번 일을 잘 해결해 주신 김 상을 위해서 간빠이!”
“간빠이!!”
분명히 요한을 위한 축하 파티라고 했지만, 정작 일본어를 모르는 요한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요한이 아쉬워 하는 건 아니었다.
“오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스시 장인의 그 스시인가!!”
일본은 싫어하지만, 일식은 좋아하는 그였다.
파티에 나온 고급 일식 요리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엘레노아도 일본 귀빈들을 맞이하여 러셀 길드 수장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러셀 길드는 한국을 기점으로 삼아서 아시아 전체로 영향력을 넓히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일본이 옛날 같지는 않아도 아시아에선 3번째 가는 대국이었다.
인구도 1억이 넘는 데다가 다양한 포탈도 존재했다.
또 한국과 중국에 뒤처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국가기도 했다.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선 일본은 필수로 관리해야 하는 국가였다.
엘레노아가 열심히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도 먹어 봐. 진짜 맛있어!”
“뭔데, 뭔데?”
“오코노미야키!”
“오, 나도 그거 좋아하는데. 어디, 어디.”
순수하게 일식을 즐기는 요한과 미연.
하지만 그런 둘을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쿵, 겨우 춍 따위가 건방지게.”
“그딴 포탈 따위 정부에서 막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해결했을 텐데.”
“아니, 열도에서 벌어진 일을 하필이면 춍 따위에게 맡길 게 뭐야?”
옛날부터 존재했던 우익 세력은 여전히 일본의 주요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대한민국에 국력을 뒤집히고 나서부터는 규모가 더 커졌다.
일본의 자존심이 짓밟히니 일본 제일주의가 더더욱 판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는 헤이트 스피칭 금지법이라고 해서 혐한 발언을 제재했던 정부였다.
하지만 점점 힘들어지는 국가적 상황에 국민의 불만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우익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면서 정치인들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거기에다가 우익 세력에서 우수한 헌터가 다수 나오자 더더욱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헤이트 스피칭 금지법이 폐지된 상태였다.
그들은 현재 요한의 행보에 불만이 많았다.
“춍 따위에게 우리 국민의 혈세를 지급해야 한다니.”
사실 혈세를 가장 많이 낭비하는 건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죄의식은 없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순수하게 일본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일본을 위한 일임에도 그저 한국인에게 줘야 한다는 이유로 낭비라고 생각했다.
우익 세력이란 게 원래부터 그랬다.
그들은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감정과 혐한이 중요했다.
“사사키 상, 이대로 혈세를 빼앗길 생각입니까?”
주변 우익 헌터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수 없지. 절대, 그럴 수는 없지.”
“그러면 어떻게?”
“후후, 나한테 다 생각이 있네. 따를 텐가?”
“예, 저 춍 따위에게 혈세를 뺏기느니 차라리 할복하겠습니다!”
“맞습니다!!”
“큭큭, 따라와라.”
“하이!”
사사키를 중심으로 우익 헌터 무리가 일식을 즐기고 있는 요한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좀 특이한 복장이었다.
바로 전통 사무라이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춤엔 칼을 차고 있었다.
헌터는 무기를 휴대하는 게 절대 불법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스릉- 콰직!
사사키란 헌터는 허리에 차고 있던 일본도가 아니라 품에 넣고 있던 단도를 꺼내 식사를 하고 있던 요한의 앞에 꽂았다.
“……뭐지?”
순간 순수하게 일식을 즐기고 있던 요한과 미연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평소엔 멍한 것처럼 보여도 요한은 절대 착하거나 맹한 게 아니었다.
유나나 미연처럼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나 보여 주는 가면일 뿐이었다.
“건방진, 조센징.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결투?”
아무리 요한이 일본어를 몰라도 어렸을 때 애니메이션을 본 깜냥이 남아 있었다.
이런 간단한 문장은 충분히 알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래, 결투. 네가 정부에게 받기로 한 7억 1,000만 달러를 걸고 결투다.”
‘결투하자’도 아니고 ‘결투다?’
굉장히 오만하고 건방진 말투였다.
“뭐?”
방금은 말이 너무 빨라서 제대로 알아듣질 못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그때 손님을 상대하고 있던 엘레노아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다가왔다.
“오, 영국 아가씨. 이 멍청한 놈에게 좀 전해 줄래. 수고비로 받기로 한 7억 1,000만 달러를 걸고 나와 결투를 하자고 말이야.”
“……이런 무례 오랜만이군.”
엘레노아는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화가 났다.
“마스터, 쟤 뭐래요?”
“……재밌는 제안을 했어요.”
“재밌는 제안이요?”
“네,
"......?”
결투까지만 들은 요한은 싸늘해진 엘래노아의 표정에 의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