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런데 지금은 안 돼.]
“엑, 그러면 왜 할 수 있다고 했냐.”
[마음에 드는 육체가 없어.]
“어?”
[빙의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물론 강제로 빙의할 수는 있겠지만, 기분이 썩 좋지도 않고 그렇게 오래 빙의할 수도 없어. 그 육체를 완전히 차지하려면 생전의 육체가 으뜸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영혼과 육체가 어울려야 가능해. 그런데 나는 아직 그런 육체는 한번도 본적이 없어.]
“뭐야, 너 기억 없다며.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아?”
[히히, 몰라. 그냥 알고 있어.]
“아, 하긴. 같은 종족 일이니까.”
[그런가 봐.]
그렇게 하늘과 시시덕거리는 중. 띠링-!
“오, 입금됐나 보다.”
[보자, 보자. 얼마나 입금됐는지 궁금해!!]
“킥킥, 그걸 네가 왜 궁금해하냐.”
[에잇, 몰라. 그냥 궁금해, 그냥!!]
“킥킥.”
요한도 궁금했기에 얼른 은행 어플을 작동해 확인해 보았다.
[입금자명: 러셀 매니지먼트 입금액: 824,825,800원]
“8억 2천이네?”
[와아, 많은 거지?]
“엄청 많은 거지. 겨우 필드 포탈인데.”
[와아!]
만약에 요한이 솔로 사냥한 장소가 던전 포탈이었으면 그렇게 고생 했는데 8억이면 적은 액수였다.
하지만 필드 포탈은 던전 포탈과 비교하면 창피할 정도로 돈이 안 됐다.
만약에 필드 포탈도 던전 포탈 못지않게 벌이가 됐으면 필드 포탈에서 솔로 사냥이 가능한 헌터가 굳이 던전을 돌겠는가.
위험하고 힘든 던전 포탈이 아니라, 필드 포탈을 돌고 말 것이다.
하지만 던전은 필드 포탈과 비교할 수 없는 수익을 낼 수 있는 곳이었다.
또 가끔씩 대박이 나면 스킬북이나 특수한 아이템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니 상위 헌터들이 굳이 필드 포탈 솔로 사냥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가끔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로운 늑대 같은 헌터가 솔로 사냥을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 연봉이 4,000억이야. 보통 때였다면 눈이 돌아가는 액수였겠지만, 오히려 적게 느껴져.’
여전히 그의 통장엔 해골 가면을 사고 남은 5,000억이 잠들어 있었다.
그 5,000억에 비하면 8억은 적은 액수에 불과했다.
다만, 이 5,000억이란 액수는 S급 헌터에 어울리는 장비를 갖추기엔 그리 넉넉한 금액은 아니었다.
해골 가면은 별이 3.5개이고 인기가 그다지 없는 소환물 강화인데도 적정가가 3,800~4,200억에 형성된 것만 봐도 진짜배기는 얼마나 비싼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하긴, 나도 슬슬 던전 포탈을 돌긴 해야 하는데.’
사실 요한이 이렇게 필드 포탈만 돌면 러셀 길드 입장에선 손해였다.
비싼 연봉 투자해서 S급을 들여 놨더니 돈도 별로 안 되는 필드 포탈만 전전하니 말이다.
하지만 엘레노아는 알고 있었다.
요한이 이른 시일 내에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란 걸 말이다.
그리고 기대하고 있었다.
세계 최초로 S급 부두 술사가 제대로 기지개를 켰을 때의 모습을 말이다.
띠릭- 삑삑삑-!
“어, 왔네.”
“다녀왔습니다.”
유나의 하교였다.
“유나야!”
덥썩-.
“꺄악!”
요한은 공부에 지친 얼굴로 들어 오는 유나를 덮쳐서 헤드록을 걸었다.
갑작스러운 오빠의 기습에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곧 반격했다.
꽈악-!
“끄악!”
헤드록은 필수적으로 허리가 비는 공격이었다.
그녀의 초강력 필살기 꼬집기가 그의 허리에 가해졌다.
“으으.......”
“흥, 어디서 비겁하게 기습이야. 오빠.”
“으으, 너의 그 필살기는 전혀 녹슬지를 않는구나.”
“오히려 강해지지, 훗.”
“으으.”
슥슥-.
고통의 잔재가 남아 있는 허리를 손바닥으로 비볐다.
“그래서, 오자마자 시비를 건 이유가 뭐야, 오빠.”
“응?”
“오빠가 아무 이유 없이 시비 걸었을 리는 없고. 아니, 만약에 아무 이유 없이 이 동생에게 시비를 건 거라면 필살기 난타를 해 줄 거야.”
“히익!”
자연스럽게 동생과 장난을 주고 받는 요한.
그는 보다시피 인간관계 자체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두 분 다 한꺼번에 돌아가신 이후 그는 많이 달라졌다.
보험금도 없었던 상황이라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사람에게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 이후엔 굳이 인간관계에 집착하지 않았다.
“아, 흐흐. 오빠가 이번에 큰돈 좀 벌었거든.”
“큰돈?”
“큰돈.”
“뭐, 얼마나 벌었길래?”
“흐흐흐흐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요한은 스마트폰 어플을 켜서 직접 통장 잔액을 유나에게 보여 주었다.
사실 유나가 헌터 뉴스에 관심이 많았다면, 요한이 9,000억의 잭팟을 터트린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 경제나 시사 상식을 위해서 인터넷 뉴스를 보는 게 전부였다.
그런 유나가 요한의 재산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자.”
“응?”
유나는 얼떨결에 요한의 스마트폰을 받아서 통잔 잔액을 확인해 보았다.
‘뭐, 기껏해야 1억 있겠지.’
뭐, 1억도 그리 적은 액수의 돈은 아니었다.
특히 일반적인 서민에겐.
하지만 서울에서 살기엔 1억은 그렇게 큰돈이 아니었다.
지방 대도시도 마찬가지였고.
‘하나, 둘, 셋, 넷…… 응?’
0의 개수를 세던 유나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잘못 본 건가?’
생각보다 0의 개수가 너무너무 많았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백억, 처, 처, 천억?!"
무려 5,000억이 넘는 돈이 통장에 잠들어 있었다.
“오, 오빠. 이, 이, 이게 도대체 어, 어, 어떻게?!”
경제 과목이나 즐겨 보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액수가 떡하니 찍혀 있었다.
평범한 서민으로 평생을 살아온 유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받아들이기엔 액수가 너무 컸다.
“오, 오빠 이, 이, 이게 뭐, 뭐 야? 어, 어, 어디 은행이라도 턴 거야?"
요한은 이제 더는 유나에게 숨기지 않았다.
헌터가 됐다는 사실과 그동안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말해주었다.
처음엔 당황하던 유나였지만, 금방 이해했다.
“우리 오빠 대단하네.”
그저 감탄사만 터트릴 뿐이었다.
“후후, 동생아. 우리 이사 갈 준비하자.”
“응, 정말?”
“그래, 어차피 너 고등학생 기간도 얼마 안 남았고. 어차피 한국대는 여기서도 멀잖아.”
“으, 응. 맞아.”
“그리고 난 이제 유명인이고. 넌 유명인 동생이잖아. 여긴 치안도 안 좋아서 위험해. 좋은 데로 이사 가자.”
“꺄악, 최고, 최고. 난 찬성!!”
유나도 딱히 부모님이 물려준 이 집에 애착이 있는 건 아니었다.
밤에 취객도 많고, 양아치 학생들도 많았다.
요한이 직접 그녀를 지켜 주지 않았으면 험한 일도 몇 번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유나도 내심 이 동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다.
“너랑 같이 집 보러 가려고 기다렸지.”
“어, 진짜?!”
“그럼 진짜지, 가짜겠냐?”
“꺄아!”
유나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안 그래도 요즘 쉴 새 없는 경쟁, 경쟁, 경쟁으로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공부하는 것은 어렵지 않고 즐거운 편이었지만, 친한 친구들과 피 튀기는 경쟁은 그녀를 지치게했다.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하던 시점이었다.
“엣헴, 이 오빠를 마구마구 찬양해라.”
“오라버니, 짱!”
“으하하핫!”
참으로 의좋은 남매가 아닐 수 없었다.
***
남매는 곧바로 집을 나서서 대형 부동산을 찾아갔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전국구 매물을 가지고 있는 대규모 부동산이었다.
“어서 오세요.”
내부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부동산으로 들어가자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그들은 대형 거래를 흔히 하지만, 그렇다고 작은 건수도 무시하진 않았다.
그래서 허름한 차림으로 찾아온 손님도 결코, 무례하게 대하지 않았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아, 네. 괜찮은 집 좀 보려고요.”
“아, 이쪽으로 오시죠."
여직원은 남매를 사무실로 안내 했다.
“조금 있다가 중개사님이 오실 거에요. 차는 뭘로 드릴까요?”
“전 커피요.”
“저도요.”
“커피 2잔. 알겠습니다, 그럼.”
여직원이 나가고 조금 있다가 풍채 좋은 중년인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허허, 안녕하십……."
"?"
그는 들어오다 말고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그리고 곧 식은땀을 억수같이 흘리기 시작했다.
"중개사님?”
옆에 있던 비서가 그런 중년인을 불렀다.
“음, 아. 아, 안녕하십니까!!”
획-!
“어, 어?”
풍채 좋은 중년인은 불룩한 뱃살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빠른 움직임으로 허리를 90° 로 숙여서 인사 했다.
“중개사님!”
“절 아십니까?”
요한이 물었다.
“그, 그럼요.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요한 헌터님!!”
“아, 절 아시는 분이었군요.”
요한은 소파에서 일어나 손을 먼저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김요한 헌터라고 합니다.”
덜덜덜-.
중개사는 떨리는 손으로 요한의 손을 맞잡았다.
“저, 저는 이곳 대일 부동산에서 일하고 있는데 중개사 강한도라고 합니다!”
군기가 바짝 든 신병의 모습이었다.
"......."
유나와 여직원은 요한과 강한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다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도 비슷했다.
‘오, 오빠가 이, 이런 사람이었어?’
‘저, 저분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어?’
“집 찾는 것을 부탁드리러 왔는데. 저를 아시는 분이라니 편하겠군요.”
“그, 그럼요. 아 참, 그리고 혹시 사인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인요?”
“예, 사실. 제 이들이 김요한 헌터님 팬입니다.”
“하하, 제 팬이라니 사인해 드려야죠.”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사인도 하고 사진도 찍고 나니까 마치 연예인이 된 것 같았다.
'와아.......'
유나는 그런 오빠를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아,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
“아 참, 강 중개사님.”
“네!”
“제가 이곳에 온 건 최대한 시끄럽지 않게 부탁드립니다.”
“그, 그럼요. 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하하, 듬직하시네요.”
“하하, 그럼요!”
사실 원래 집을 구하는 것도 러셀 매니지먼트에 맡기려고 했었다.
원래 매니지먼트가 하는 일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직접 구하려고 움직였다.
‘유나 기분 전환도 좀 해 주고, 오랜만에 남매끼리 데이트도 좀 하기 좋으니까.’
망해서 저렴한 집을 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넉넉한 자금으로 좋은 집을 고르는 건 아주 행복한 쇼핑에 해당하니 말이다.
그는 유나가 최근에 공부로 힘들어하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무리 코딩이다, 사냥이다, 뭐다 바빠도 가장 사랑하는 동생에 무관심하진 않았다.
늘 매일같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건강도 체크했다.
“그래서 예산은 얼마나?”
“1,000억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업! 1,000억 말입니까?”
“아, 물론 1,000억 전부는 아니고 맥시멈 1,000억이요.”
“아, 알겠습니다.”
강 중개사는 또다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액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