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정복(2)
태초의 시작에서 강건우는 우주를 창조했다. 광활한 우주에 행성이라는 토양을 만들고 신성이라는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나서는 한참을 잠들어 있었다.
잠이 깨어난 강건우의 의식으로 우주의 비명이 들려왔다. 자신이 만든 토양은 피로 물들어있었고 씨앗은 악의가 가득한 꽃을 피워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 강건우는 비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이미 우주의 인과는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 있었다. 자신이 개입한다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건우의 마음에 비통함이 가득 찼다. 우주 곳곳에 자신이 모르는 생명체들이 꽃을 위한 거름으로 창조되어 있었다.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소멸을 감수하고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에게 남은 힘이 얼마 없었다. 우주를 창조하는 일에 대부분의 힘을 사용했다. 어떤 존재도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준비를 시작했다.
마지막 날. 모든 것의 준비가 끝났다. 이제 자신은 소멸할 것이다. 우주의 운명을 가를 수레바퀴는 돌아갈 것이다. 인과에 얽매이지 않을 존재가 무작위로 선택될 것이다. 부디 그 존재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모든 꽃이 자신의 생각 같지는 않았다. 어떤 꽃은 자신의 토양과 공존하며 다른 생명체들을 위해 헌신하기도 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누군가는 자신의 후계자를 돕기를 바랐다. 결국, 자신이 준비한 계획이 시작됐다. 서로를 탐하던 꽃들이 일시에 비명을 질러댔다. 점점 사라지는 자신을 느꼈다.
****
쏟아지는 햇살에 강건우가 신음성을 흘리며 일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조율신의 힘을 계승한 후부터였다. 잠이 들 때마다 떠오르는 낯선 기억들이 있었다.
‘제길······. 매번 반복돼는 이유가 뭐냐고.’
강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바라보았다. 꿈속 자신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미묘하게 달랐다. 이해하기를 포기한 지 오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고개를 한차례 흔든 강건우가 샤워하러 욕실로 향했다.
아크로폴리스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한쪽에서는 전쟁준비로 또 다른 한쪽에서는 환송식을 준비했다. 박태정의 계획이었다. 이런 행사를 통해 시민들은 소속감을 각성자들은 높은 사기를 얻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강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들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이제는 한 세력의 수장으로 참모로의 모습이 완숙해 보였다.
“기현이랑 진호는 준비 끝났어?”
강건우의 질문에 김주환이 대답했다.
“응, 랭크 업하고나서 새로 배운 스킬이랑 장비 교체한 거 마무리 적응 훈련 중이야. 바로 투입할 수 있어.”
아크로폴리스가 전쟁준비로 바쁜 며칠 동안 강건우는 송기현과 이진호를 데리고 C랭크 던전을 돌았다. 포인트 작업을 위해서였다. 포인트를 다 모으는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SSS 랭크인 강건우에게 C 랭크 던전의 크리쳐들은 먼지 그 이하의 존재일 뿐이었다.
“생츄어리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고?”
이번에는 박태정이 질문에 대답했다.
“정찰팀의 보고에 따르면 생츄어리의 빛기둥이 더욱 강렬해 지고 있다고 합니다.”
“강림이 임박했단 소리군···.”
“공격 시기를 잘 정해야 할 거 같습니다. 강림을 통한 도시 정화에 우리 병력이 휩쓸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박태정의 말에 강건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수호신이 강림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냥 해치워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각성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은 파괴자 진영은 아니었지만, 수호신 진영도 아니었다.
고민에 빠진 강건우에게 박태정이 말했다.
“민석이는 강림 이후를 노리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 중입니다. 저랑 주환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오민석과 박태정, 김주환은 급격히 친밀해졌다. 생츄어리 침공 작전을 짜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민석이 형은 하루라도 빨리 공격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그건 강림 이후 강해진 김한나의 세력을 걱정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아크로폴리스의 전력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니까요.”
강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림 이후 세력을 급격히 늘린다 해도 아크로폴리스에 비하면 부족할 것이었다. 공격타이밍을 강림 바로 직후로 잡으면 될 문제였다.
“좋아, 공격 시기는 수호신의 강림이 끝난 바로 직후로 정하자. 정찰팀을 두 배로 늘려서 생츄어리를 완벽히 감시해줘.”
“네,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강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민석이 형은 지금 어딨어?”
“트레이닝 센터에 있습니다.”
“거긴 왜?”
“강제 각성자들의 훈련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박태정의 말에 강건우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하긴 형은 옛날부터 사람 가르치는데 일가견이 있었지.”
대화를 마친 강건우가 원탁 회의실을 나와 트레이닝 센터로 향했다.
***
트레이닝 센터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얼마 안 남은 전쟁을 앞두고 모두가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특히 삼삼오오 팀을 이뤄 공격과 방어를 하는 연습이 한창이었다.
‘기억나네···. 저 훈련 덕분에 강제 각성자들의 생존율이 월등히 상승했었지.’
강건우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오민석은 소모품처럼 이용되는 강제 각성자들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오민석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지금 훈련 중인 전술이었다. 전술의 내용은 단순했다. 자신의 스킬을 공격형, 방어형, 서폿형으로 정한다. 그리고 구분할 수 있는 완장을 팔뚝에 찬다. 혼전 속에서도 방어형 1, 공격형 2~3, 서폿형 1~2명으로 팀을 이루어 싸우는 연습을 한다. 간단하지만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전생에서도 이 방법을 적용 후 강제 각성자들의 생존율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민석이 형의 직업이 유소년 축구팀 감독이었지 아마?’
강건우가 흐뭇한 표정으로 훈련을 지켜보았다. 별거 아닌 전술이었지만 누구도 생각하지도 않던 부분이었다. 그때 훈련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던 오민석이 강건우를 발견했다.
“건우야, 웬일이야?”
“형, 바빠 보이네?”
“하하. 이제 마무리 단계야.”
오민석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강건우가 조율자의 상점에서 음료를 구매해 건냈다.
“진짜. 그 상점은 말도 안 되는 능력이다.”
“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바쁠 텐데 여기까지.”
오민석의 질문에 강건우가 자리를 떠나며 말했다.
“가자.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거든.”
“그래? 잠깐.”
오민석이 훈련을 하고있는 각성자들에게 소리쳤다.
“나 돌아올 때까지 계속 팀원 조합 훈련하고 계세요. 돌아와서 점검할 겁니다.”
오민석의 말에 각성자들 사이에서 한숨과 장탄식이 터져나왔다. 강건우가 피식 웃었다.
“여전하네······. 웃는 얼굴로 사람 빡시게 굴리는 거.”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오민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번 만남부터 느낌이 이상했다. 강건우는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함께 지내온 것 같았다. 강건우와 오민석이 트레이닝 센터의 휴게실에 도착했다. 모두가 훈련 중이라 텅 비어 있었다. 두 사람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금부터 내말이 미친놈의 말처럼 들릴지도 몰라.”
“말해봐. 네가 하는 말이라면 믿어보도록 할게.”
“사실 난 회귀자야.”
“응? 회귀자? 소설에서나 나오는 그 회귀자?”
오민석의 반응에 강건우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민석이 형, 중학생 때 부모님 이혼하시던 날 축구부 숙소에서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다짐했었지. 하지만 형 실력을 시기하던 선배의 태클에 훈련 중 부상을 입어 선수 생활 포기했잖아. 어머니한테는 시합 중 부상이라고 속였고.”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오민석이 당황했다.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한 적 없었다. 강건우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형 첫사랑 김민지. 형 혼자 짝사랑하다가 허무하게 끝났다지? 아마 중2 때였나? 형 그때 부상당하고 방황 많이 하던 시기였다며?”
“허···. 민지까지 알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한나 그년한테 힘을 준 수호신. 데미트리스. 수호신 진영이지만 아주 나쁜 년이지.”
강건우의 말에 오민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수호자나 파괴자에게 힘을 제공하는 신의 정체는 철저한 비밀이었다. 콜로세움에서 수호자로 선별된 후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신에게 선택받는다. 최측근에게조차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신의 진명이었다. 오민석도 우연한 기회에 신의 진명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김한나가 오민석을 싫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진짜구나,”
“응, 데미트리스. 아주 악랄한 여신이지. 자기 행성에서도 착한 척은 다 하면서 뒤로는 엄청나게 착취한다지?”
“도대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아무리 회귀자라지만.. 혹시?”
오민석의 말에 강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전생에서 난 김한나 소속의 강제 각성자였어. 그리고 형이랑 죽고 못 사는 사이였지.”
“그랬구나···. 그래서 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거였어.”
회귀자. 평상시라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신들의 전쟁이 벌어지는 판국이었다. 못 믿을 것도 아니였다. 강건우가 전생의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사소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자신과 오민석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까지였다.
“하······. 이런 상황이 아니였다면 절대로 못 믿었을 거야.”
“그렇긴 하지···.”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오민석이 강건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힘들었겠구나. 그동안···.”
“뭐···. 그렇지.”
“그래도 정말 대단한 거야. 그런 경험을 겪고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게.”
“역시. 형한테 칭찬받는 게 제일 좋네.”
“뭐? 하하.”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강건우는 이제 마음이 후련했다.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 꼭 해결하고 싶었던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제 전쟁에 집중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를 마친 후 자리를 이동해 박태정과 김주환을 만났다. 네 사람은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그렇게 폭풍전야 같은 밤이 지나갔다.
****
조율자의 성을 점심으로 뻗어있는 아크로폴리스의 중심도로. 성대한 출정식을 마친 아크로폴리스의 각성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각자의 눈에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건우님이시다.”
“주환님도 기현님도 계셔.”
성의 계단을 따라 강건우를 비롯한 일행이 내려왔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강건우가 태초의 함성을 사용해 소리쳤다.
“이제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고 서울을 우리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해 출진한다. 누구는 다치고 또 누구는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대는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인류를 위해 신과 맞선 위대한 전사들로.”
강건우의 말에 각성자들이 온몸에 힘이 넘치고 용기가 샘솟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뜨거워진 각성자들이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
“가자고!”
“할 수 있어! 그동안의 훈련을 믿자고!”
“와아아아!”
잠시 후, 함성이 사그라들자 강건우가 묵직한 말을 내뱉었다.
“모두 출발! 목표는 생츄어리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