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혹은 악녀(2)
아크로폴리스는 축제 분위기였다. 거리마다 형형색색의 장식물들로 꾸며져 있었다. 길가 곳곳에는 다양한 상점들이 먹을 것을 나눠주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활력으로 가득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축제가 이어졌다. 밤이 되면 드워프제 형상기억 폭죽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터지며 시민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곳곳에서는 맥주파티가 벌어졌다. 시민들은 곳곳에 앉아 축제를 즐기며 한가로움을 만끽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이나 축제가 계속되고 있었다.
“역시, 형 말대로 하길 잘했네. 사람들이 엄청 즐거워 보여.”
조율자의 성의 꼭대기 층에서 강건우가 도시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옆쪽으로는 핼쑥한 얼굴을 한 박태정이 있었다. 아크로폴리스로 돌아온 박태정을 기다리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였다.
“같이 기념하고 즐기면서 유대감이 커질 겁니다. 그런 소속감이 시민들의 삶에 큰 활력소가 될 겁니다.
강건우가 아크 폴리스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아스가르 제국에서 일 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지만, 현실에서는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이었다.
복귀 후 휴식을 끝마친 강건우는 권율 중령을 만났다. 그리고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보고받았다. 박태정은 바로 업무에 복귀했다. 김주환은 쉬고 싶다며 휴가를 냈다. 이진호는 김주환을 대신해 강제 각성자를 훈련시켰다. 헨릭과 에일린은 강제 각성을 무사히 마치고 휴식 중이었다. 적응을 마치기 전까지 조율자의 성에 머물기로 했다.
“형도 오늘 밤은 좀 쉬지그래?”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자리를 비운 사이 처리할 일이 잔뜩 쌓였습니다.”
“빨리 형을 도울 사람을 찾든지 해야지 이러다 사람 잡겠네.”
“하하. 체력에는 문제없습니다.”
강건우의 말에 박태정이 유쾌하게 웃었다. 각성자인 박태정이 육체적으로 힘들 리는 없었다. 단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크로폴리스는 자리를 비운 한 달 사이 꽤 발전해 있었다. 풍부한 식량과 자원. 그리고 드워프들을 비롯한 기술자들의 활약.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포인트를 이용한 경제체계. 모든 것이 완벽한 도시였다.
‘이제 진짜 위협이 찾아오겠지.’
강건우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지난번 던전에서 일어난 헬리의 강림사건. 아마겟돈에 신들의 개입을 금지한다는 규정에 정면으로 위반돼는 행위였다. 아크로폴리스로 돌아온 강건우와 카라는 파괴신 진영에 강력히 항의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에 카라가 격분했다. 본신이 아닌 파괴자를 이용한 강림이기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카라를 더욱 화나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수호신의 만신전에서 비석을 통해 한가지 통보를 해왔다. 자신들도 한 번의 강림을 실행하겠다는 통보였다. 화가 잔뜩 난 카라는 비석을 통해 수호신 진영의 만신전을 찾아갔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조율신의 강제해놓은 규정이 약해지고 있다. 이것 또한 예정된 일이었다고 하지만. 그 시기가 너무 앞당겨지고 있어.’
카라는 신들을 옭아매던 규정이 강건우가 조율신의 힘을 계승함으로 더욱 약해졌다고 했다. 이제는 강건우가 힘을 길러 신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도 했다. 여태의 과정도 이것을 위한 과정이었다고 했다. 강건우가 포인트를 모아 자신을 성장시키고 아크로폴리스를 성장시키면. 힘을 소진한 조율신을 회복시키는 역할이었다.
‘신의 파편의 연구에 팔크람의 존재가 변수였던 거지.’
팔크람이라는 천재로 인해 신의 파편의 비밀이 낱낱이 파헤쳐졌다. 그래서 카라가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봉인해제를 시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생각을 마친 강건우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려한 도시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거대한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일반 시민들은 알 수 없었다.
‘이제 곧, 신들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될 거다. 그리고 각 진영에서 세력의 정리가 끝나겠지. 그리고 나면 일차목표는 바로 우리가 될 거야.’
자신이 조율신의 힘을 계승한 것을 각 진영 신들은 알고 있었다. 강건우가 조율신의 힘을 완벽히 개화하기 전에 반드시 제거를 시도할 것이었다.
‘그전에 할 일이 많군···.’
강건우가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했다. 아크로폴리스의 랭크 업. 방어시설의 확충. 강제 각성자들의 랭크 업 과 스킬 장착. 초기 각성자의 육성. 할 일이 태산이었다. 박태정의 얼굴이 핼쑥했던 것은 이런 이유였다.
****
그로부터 며칠 후. 카라가 돌아왔다. 카라의 메시지를 받은 강건우가 조율자의 방으로 왔다.
“건우님, 저 다녀왔어요.”
“수고해서 카라.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강건우의 질문에 카라가 분한 표정이 됐다. 만신전과의 일이 잘 안 풀린 것이다.
“끝내 강림을 하겠다네요. 정말 확 엎어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럴까?”
카라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 맘대로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나마 지키던 규정마저 무너지고 말 거에요.”
“신들이 힘을 되찾으면 어때. 내가 다 해치워버릴게.”
강건우의 호기로운 말에 카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의 강건우는 신들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였다.
“건우님, 신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지 아세요? 아무리 조율신의 힘을 계승한 건우님이지만 물량 앞에 장사 없다고요.”
“진지하게 받아들이네. 위로하려고 한 말이야.”
“네···. 그래도 건우님의 자신 있는 모습에 한결 마음은 놓이네요.”
강건우가 카라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었다. 카라가 잽싸게 빠져나가 강건우의 어깨 위에 올랐다.
“수호신의 강림은 어디로 예정된 거야? 가장 격전지인 유럽? 아니면 수호자들이 형편없이 밀린다던 아프리카?”
강건우가 수호신의 강림에 관해 물었다. 지금 전 세계는 각 진영의 세력싸움이 한창이었다. 서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대륙의 패권을 두고 힘 싸움을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강건우가 있는 동아시아 대륙은 잠잠했다. 수호신과 파괴신 모두 강건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니요. 강림 예정지는 한국이에요.”
“뭐?! 한국?”
“네, 강남에 있는 수호자 김한나를 통해 강림할 거라고 했어요.”
강건우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자신이 있는 한국에 강림하다니 의도가 불순했다. 더군다나 대상이 김한나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피어올랐다.
“나랑 정면으로 대립하겠다는 건가? 내가 김한나를 어찌 생각하는지 그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알고 그러는 거예요. 자기들 말로는 싸움을 일으키려는 목적이 아니라고 해요.”
“그건 무슨 헛소리야?”
강건우가 이해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한나에게 강림하는 목적이 무엇이든 자신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조만간 강림한다고 했으니 좀 더 지켜봐요.”
“알았어. 내 말이나 전해줘. 이번 결정을 꼭 후회하게 될 거라고.”
“네, 건우님.”
****
아크로폴리스 과학의 총아가 된 팔크람의 연구소. 화려한 외관과 더불어 근처에 각종 편의시설이 아름다운 조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는 드워프만이 아닌 인간들도 근무를 시작했다. 처음 인간 기술자들과 과학자들은 팔크람의 존재를 미덥잖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여주는 엄청난 기술력과 과학력에 결국 탄복하고 말았다. 지금은 아크포폴리스내에 제 1 희망 근무지가 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사람들이 엄청 많네.”
해가 지는 저녁 무렵 팔크람의 연구소가 있는 마곡에 강건우가 나타났다. 거리의 사람들은 일과를 마치고 밝은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강건우를 알아본 사람들이 미소를 띠며 인사를 해왔다.
“아···. 다시 변장하고 다녀야 하는 걸까?”
“안 돼요.”
강건우의 중얼거림에 카라가 단호하게 반대했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강건우가 연구소를 향해 걸어갔다.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작은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건우님이시다.”
“남자인 내가 봐도 반하겠는걸?”
“나도 다음엔 강제 각성 시험에 꼭 붙고야 만다.”
남자들은 흐뭇한 얼굴로 강건우를 바라보았다. 일부 남자들은 강건우와 함께 싸우길 바라며 각오를 다졌다.
“어머. 어쩜 저렇게 멋지신 걸까?”
“아···. 내가 4살만 어렸어도.”
“꿈 깨 기집애야. 건우님 여친있어.”
여자들은 눈을 빛내며 강건우를 사진 찍고 비명을 질러댔다. 젊은 여자 중에서는 사진을 찍자며 핸드폰을 들이대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을 일일이 응대해준 강건우가 급히 자리를 피했다.
“역시 안 되겠어. 다음부턴 차로만 이동하던지 변장을 하든지 해야겠어.”
강건우가 투덜거리자 카라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변장은 하나마나고요. 지영님에게 차를 한 대 사주세요.”
“으으···. 잡히기만 해봐라.”
사실 강건우는 차량을 이용해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차고에 내려간 강건우를 반겨주는 것은 텅 빈 공간뿐이었다. 어이없는 실소를 터트린 강건우가 강지영에게 전화를 했다. 강지영은 부모님을 모시고 나왔다며 어쩌라는 식으로 나왔다.
“부모님 모시고 나갔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고.”
투덜거리던 강건우가 연구소의 정문에 도착했다. 보안 장치에 손을 올리자 스르륵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강건우를 수염을 잔뜩 기른 드워프가 맞아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강건우 님. 팔크람 연구소의 수석 기술자. 파도람 입니다.”
드워프가 입을 열자 강건우가 살짝 놀랬다. 팔크람을 제외한 드워프들은 분명 크리쳐였다. 이성적인 행동이나 대화가 불가능한 존재였다. 강건우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아···. 네. 반갑습니다. 팔크람은 어디 있습니까?”
“공주님께서는 차원력 연구실에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팔크람과는 달리 정중하고 젠틀한 모습이었다. 강건우가 앞장서는 파도람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드워프들은 팔크람처럼 다 거친줄 알았는데.’
영화나 소설에서 표현되는 드워프들의 괄괄한 성격. 팔크람의 성격은 딱 그것과 같았다. 강건우의 표정을 읽은 파도람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공주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공주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지금은 팔크람이 제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강건우의 말에 파도람이 껄껄 웃었다.
“공주님이 드워프답지 않게 성격이 활발하십니다. 건우님이 이해해 주십시오.”
“아 그렇군요. 드워프 사이에서도 특이한 성격인 거군요.”
강건우의 말에 앞장서던 파도람이 잠시 멈춰섰다.
“네, 저희 드워프들은 과학적 탐구심이 강하고 잠잠한 성격이 보편적입니다.”
말을 마친 파도람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강건우가 거대한 문 앞에 다다랐다. 파도람이 한쪽 벽면에서 보호장비를 꺼냈다.
“보호장비 좀 입겠습니다. 차원력에 감염되면 다시 크리쳐화가 진행될 수도 있어서요.”
“아···. 저는?”
“건우님은 필요 없으실 겁니다. 각성자이시니까요.”
파도람이 보호복 착용을 완료했다.
“가시죠.”
팔크람이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었다. 열린 틈으로 차원력이 느껴졌다. 강건우가 안쪽으로 들어섰다. 보호복을 입은 드워프들이 곳곳에서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때 한쪽에서 드워프 한 명이 다가왔다.
“야! 강건우. 왔냐?”
드워프치고는 활발한 성격의 팔크람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