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혹은 악녀(1)
프라이어 백작가의 저택. 백작가치고는 화려하지 않은 외관이었다. 신흥 귀족의 선두주자였던 프라이어 백작은 평소 검소하고 소탈한 것으로 유명했었다. 백작의 실종과 헨릭의 누명사건으로 가문의 세가 기울어 지금은 더욱 황량한 분위기였다.
그때였다. 저택이 앞쪽으로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외관은 황금빛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마차 위에 펄럭이는 깃발은 제국 황실의 상징인 영광의 홀이 새겨져 있었다. 잠시 후 저택 앞에 도착한 마차가 멈춰 서며 헨릭이 내렸다.
“형님들, 여깁니다. 누추하지만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헨릭의 말에 마차에서 강건우 일행이 내렸다. 강건우가 저택을 바라본 후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신세 좀 질게.”
“신세라뇨?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하. 예의상 한 말이다.”
“네, 형님. 가시죠.”
헨릭이 유쾌하게 웃으며 앞장섰다. 강건우와 일행이 뒤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갔다. 던전공략을 마무리 지었지만, 강건우는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송기현의 차원 이동을 이용해 제국의 황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후작을 만나 영광의 홀을 반납했다. 물론 영광의 홀 안에 숨겨져 있던 신의 파편은 회수한 후였다.
며칠 후. 강건우 일행은 황제를 만났다. 제국의 신물이 돌아오자 매우 흡족했던 황제였다. 강건우 일행의 공을 칭찬하며 막대한 보상을 내렸다. 제국의 세습 귀족작위와 영지. 그리고 상당량의 금화였다. 프라이어 백작가의 누명도 벗겨졌다. 백작과 기사단의 실종은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사처리 되었다. 황제는 백작에게 제국 제일 훈장인 황금 방패 훈장을 내렸다. 감격한 헨릭이 눈물을 흘렸다. 후작은 공작가가 연루된 혐의를 못 찾은 것을 아쉬워했다. 알현을 마친 일행은 황제가 직접 내어준 황실 전용 마차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프라이어 백작가의 검소함을 보여주는 응접실. 강건우와 헨릭이 마주 앉아있었다. 잠시 후,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에일린이 간단한 다과를 들고 나타났다. 이미 건강을 모두 회복해 건강한 모습이었다.
“에일린, 고마워.”
“고맙습니다.”
강건우의 인사에 에일린이 활짝 웃었다. 생기가 넘치는 모습에 강건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건우 오라버니, 저희 가문을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아···. 그게 뭐···.”
에일린의 감사에 강건우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그 모습에 에일린이 작게 웃었다.
“저는 태정 오라버니하고 시장을 둘러보기로 해서요. 이만 나가 볼게요.”
“에일린. 태정 형님을 너무 귀찮게 만들지 마.”
“오빠! 무슨 말이야. 태정 오라버니도 좋아하실 거야.”
“.....”
여동생의 반격에 헨릭이 할 말을 잃었다. 에일린이 혀를 삐쭉 내밀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헨릭이 얼굴을 붉혔다. 귀족가의 자제로 품위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대인인 강건우에게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형님, 죄송합니다.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닌데. 이번일 겪으면서 정에 굶주려서 그런 거 같습니다.”
“응? 난 보기 좋은데? 신경 쓰지 마.”
“네, 형님.”
말을 마친 두 사람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후 찻잔을 내려놓은 헨릭이 입을 열었다.
“형님, 다른 차원에서 오셨다는 그 말씀 말입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자세히 설명 좀 해주실 수 있습니까?”
헨릭의 부탁에 강건우가 찻잔을 내려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헨릭의 진지한 눈빛으로 경청했다.
“사실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온 각성자들이야.”
“각성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음···. 그게 말이지···.”
강건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답답했다. 그때 강건우의 품에서 카라가 불쑥 튀어나왔다. 강건우를 한차례 바라본 카라가 탁자 위에 올라앉았다.
“건우님, 제가 설명할게요. 답답해서 못 참겠어요.”
“그···. 그래.”
강건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설명에는 젬병인 강건우였다. 헨릭이 카라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는 정신없어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헨릭 프라이어입니다. 요정님.”
“안녕하세요? 카라에요.”
카라가 헨릭의 얼굴 앞으로 날아오르며 미소지었다. 헨릭도 마주 웃어 주었다. 카라가 손가락을 튕기자 헨릭의 앞으로 아크로폴리스의 영상이 나타났다. 처음 보는 신기한 모습에 헨릭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저희는 지구라는 다른 우주의 행성에서 왔어요. 지금 지구는 신들의 대리전이 벌어지고 있어요.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카라의 설명이 이어졌다. 헨릭은 이해 안 되는 부분을 되묻기도 하면서 집중했다. 한참 동안의 설명이 끝나자 헨릭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 그렇군요. 이제 이해했습니다. 건우형님과 다른 형님들의 강함도 마족이라는 존재도 다 이해했습니다.”
“그게 다 이 카라님의 훌륭한 설명 덕분이죠.”
카라의 말에 헨릭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을 멈춘 헨릭이 강건우를 바라보았다.
“형님, 그럼 아버지와 기사단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지구라는 곳에 있는 아크로폴리스로 가야 하는 겁니까?”
“응, 백작님과 기사단은 차원의 힘에 오염된 상태야. 그걸 치료하려면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시설이 필요해.”
강건우의 말에 헨릭이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강건우가 입을 열었다.
“치료하는 것도 이곳에 돌아오는 것도 문제는 없어. 다만 한가지···.”
“시간 배율이 문제인 겁니까?”
헨릭의 말에 강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촉망받는 인재답게 이해력이 빠른 헨릭이었다.
“응,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일 거야.”
던전을 나갔다 들어온 카라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의 1년은 현실에서의 하루에 가까웠다. 즉 치료를 위해 걸리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수십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헨릭의 고민이 깊어졌다. 강건우는 차를 마시며 묵묵히 헨릭을 기다렸다. 한참을 이어지던 침묵이 깨졌다.
“형님, 결정했습니다. 저와 에일린도 데려가 주십시오.”
헨릭의 결정에 강건우가 깜짝 놀랐다. 찻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헨릭, 잘 생각해. 너마저 자리를 비운다면 프라이어 가문은 끝이야.”
“아버지 안 계신다면 어차피 몰락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프라이어 영지는? 다른 가족들은 어쩌려고?”
강건우의 질문에 헨릭이 한숨을 쉬었다.
“하···.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 이미 떠날 사람들은 다 떠난 후입니다. 그리고 영지는 아버지의 사촌이 이미 다스리고 있습니다. 결국, 저희가 떠나도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랬구나.”
헨릭이 씁쓸하게 웃었다. 강건우의 마음도 착잡해졌다. 힘이 약해지면 가족 간에도 물어뜯는 것이 귀족의 사회였다. 헨릭의 지친 마음이 이해가 됐다. 강건우가 카라에게 물었다.
“카라, 헨릭과 에일린을 데려갈 방법이 있을까?”
강건우의 질문에 카라가 생각에 빠졌다. 한참을 생각하던 카라가 입을 열었다.
“일단 기현님의 스킬은 차원의 힘에 오염되기 때문에 힘들어요. 조율자의 상점 역시 마찬가지고요.”
“음···. 결국 차원의 힘에 노출되는 게 문제라는 건데···.”
“아! 방법이 생각났어요.”
“뭔데?”
“강제 각성물약을 이용해 각성을 시도해보는 거예요.”
카라의 말에 강건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는 건 아크로폴리스 소속이 되어야 한다는 거잖아. 지구인이 아니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도 알 수 없고.
”그건 걱정마세요. 상점의 봉인이 풀리면서 강제 각성물약의 효능도 올라갔어요. 실패할 확률은 극히 낮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말을 마친 강건우가 헨릭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헨릭이 입을 열었다.
”제가 건우형님의 기사가 되면 지구라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겁니까?“
”기사가 아니라 각성자. 아크로폴리스에 소속되면 지구에 머물러야겠지.“
”이곳으로 다시는 못 돌아 오는 겁니까?“
”잠깐씩 방문할 수는 있어. 하지만, 알잖아. 시간 배율.“
”그렇군요.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에일린과도 의논해봐야겠습니다.“
”그러도록 해.“
심각한 이야기가 끝나자 소소한 대화들이 이어졌다. 헨릭은 아크로폴리스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왔다. 영상에서 본 신기한 문물들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드워프들이 아크로폴리스에 상주한다는 대목에서는 감탄성을 내뱉기도 했다. 드워프나 엘프 같은 아종족은 아스가르 제국에서도 보기 힘든 종족이라고 했다. 한동안 대화를 나눈 후 강건우와 헨릭이 자리를 떠났다.
***
다음 날 아침. 프라이어 백작가의 저택이 식당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식탁에 상석에는 헨릭이 앉아있었다. 강건우는 바로 옆쪽에 앉아 한가롭게 차를 즐기고 있었다. 김주환과 이진호는 불안한 눈빛으로 연신 주방을 훔쳐보고 있었다. 주방에는 앞치마를 두른 에일린과 박태정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헨릭, 에일린이 평소에도 요리를 자주 하는 건 맞지?“
김주환의 질문에 헨릭이 머뭇거렸다.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의 어머니처럼 내조의 여왕이 장래희망이었던 에일린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에일린이 만든 음식을 가장한 고문을 받아야 했었다.
”뭐야? 왜 대답을 못 해?“
김주환이 잔뜩 불안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그 모습에 강건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못해도. 내 동생 지우만 하겠어? 걔는 음식이 아니라 화학제품 수준이라니까?“
”음···. 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때였다. 주방에서 에일린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겉보기에 먹음직스러운 음식이었다. 첫 번째 희생양은 이진호였다.
”와! 에일린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음식의 모양에 감탄한 이진호가 크게 한입 먹었다. 이진호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진호 오라버니! 맛있죠? 그죠? 태정 오라버니도 맛있다고 해주셨어요.“
이진호가 눈을 부릅뜨며 시선을 돌렸다. 어딘지 힘들어 보이는 박태정이 고개를 저으며 눈짓을 했다. 이진호가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정말 한숨이 나올 정도의 맛이네.“
”그렇죠? 제 음식을 먹어본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해주세요.“
”그···. 그래···.“
이진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헨릭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저만 당할 순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들.“
헨릭의 말에 좌중이 웃음을 터트렸다. 에일린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뜰뿐이었다. 그렇게 즐겁고 괴로운 식사가 시작됐다. 강건우는 조율자의 상점을 이용해 몰래 음식을 바꿔치기해 먹었다. 주변의 사람들의 눈총이 따가웠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디저트를 준비하겠다는 에일린을 헨릭이 뜯어말렸다. 결국, 강건우가 조율자의 상점에서 디저트를 준비했다. 난생처음 맛보는 지구의 디저트에 에일린이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다.
”아직 애긴 애야.“
”그러게 말입니다.“
강건우의 말에 박태정이 대답했다. 얼굴에는 푸근한 미소가 한가득 떠올라있었다. 디저트 타임이 끝났다. 식당 안에 이유를 모를 정적이 흘렀다. 식당 정리를 끝낸 에일린과 박태정이 자리에 앉았다. 헨릭이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에일린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망설이던 헨릭이 이내 강건우에게 입을 열었다.
”건우형님, 저와 에일린은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건우 오라버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말을 마친 두 사람이 저택을 둘러보았다. 가족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공간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하지만 꼭 돌아올 거라 다짐했다. 강건우가 두 사람이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박태정을 비롯한 일행들도 침묵으로 두 사람을 위로했다. 잠시 후, 강건우가 일행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 아크로폴리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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