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자(2)
영등포에 있는 타임스퀘어의 커다란 광장에 주상혁과 한 명의 남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안민철. 아직까지 본거지 설정을 안 하고 있었단 말이야?”
주상혁의 말에 안민철이라 불린 남성이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지적인 이미지였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법이지. 수호자놈들 지금쯤 난리 났을 거다.”
“크크···. 너랑 나랑 힘을 합쳐서 서울을 정리하고 빠르게 힘을 키운다. 아주 좋은 작전이야.”
“그전에 아래쪽에 혼자남은 놈이 잘 버텨줘야지.”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그놈 걱정이다. 파괴자 중에서도 수위권을 다투던 놈이었잖아.”
주상혁의 말에 안민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수호자와 파괴자는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가까운 위치에 본거지를 설정했었다. 서울의 김한나와 주상혁. 그리고 아래 지방의 수호자 2명과 파괴자 2명.
“그동안 내가 본거지 없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그 자식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정도 세력을 만들지도 못했을 거다.”
“흐흐···. 이제 고생 끝이다. 수호자 중에서도 제일 실력이 처지는 김한나 정도야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지.”
하지만 지금 안민철의 계략으로 균형이 무너졌다. 지방에 혼자 남은 파괴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자였다. 물론 수호자 진영에도 강력한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방어에 특화된 수호자 진영의 특성상 혼자남은 파괴자를 정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타임스퀘어 내부를 둘러보러 떠난 부하들이 돌아왔다. 안민철이 부하들을 힐끗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서울을 빨리 정리해야 우리가 유리해질 거야. 아무리 그놈이 강하다고 해도 시간이 너무 늦으면 힘들어질 거야.”
“김한나야 식은 죽 먹기지. 문제는 따로 있어.”
주상혁이 강건우를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지난번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애써 부정하고 있지만, 굴욕적인 후퇴도 했었다. 안민철이 주상혁의 표정에 씨익하고 웃었다.
“조율자? 얼마나 대단한 놈이길래 그래? 붙어보니 별거 아니라며?”
“그···. 그치. 그때 내가 준비가 부족해서 물러나긴 했지만···.”
주상혁이 말을 더듬으며 당황했다. 자존심 때문에 안민철에게 정확한 상황을 이야기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같은 진영이라지만 얕보이는 것은 사양이었다. 진영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전쟁 이후 기여도에 따라 받을 보상을 위해 경쟁하는 위치이기도 했다.
“그럼 이제 우리 둘이 힘을 합쳤으니까 금세 정리할 수 있겠네.”
“당연하지! 여기에 본거지 설정이 끝나면 바로 쳐들어가자고.”
안민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래쪽에서는 그놈에게 기가 눌려 늘 이인자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서울에 와보니 모든 상황이 자신을 위해 준비되어있는 것 같았다.
‘특히 근육 덩어리 바보인 이놈은 다루기가 쉬워서 좋아.’
안민철이 생각을 마치고 본거지 설정을 준비했다.
품 안에서 검게 빛나는 본거지 지정석을 꺼내 들었다. 선택받은 수호자나 파괴자의 특권 중 하나인 본거지.
주변의 각성자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누구는 부러움에 또 누구는 질투에 눈빛을 내심 숨기며 안민철을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영등포 일대는 내가 접수한다. 모두 최선을 다해 아마겟돈의 승리를 쟁취하자!”
안민철이 본거지 지정석을 높게 들고 외쳤다. 그러자 검은빛이 뿜어져 나오며 타임스퀘어 건물을 감쌌다. 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각성자들이 환호했다.
“와아아!”
“파괴신 만세!”
“안민철! 안민철!”
뿌듯한 눈빛을 바라보던 안민철이 손을 들어 부하들을 진정시켰다.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우리의 일차 목표는 주상혁과 연합해 조율자라는 놈의 본거지를 무너트리는 일이다. 크리쳐들의 준비가 끝나는 즉시 출진한다.”
안민철이 말을 마치자 부하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손뼉을 쳐주던 주상혁이 입을 열었다.
“축하한다. 내가 있는 강북과 거리가 있는 것이 좀 아쉽지만 그래도 서울에 네가 있으니 든든하군.”
“어차피 세력을 확장하다 보면 가까워질 텐데 뭘 그래. 그보다 조율자라는 놈이 영역이 강서구 전체라고 했지?”
“응, 그 자식 언제부터 정착했는지 벌써 강서구 전체를 장악했더라고.”
주상혁의 말에 안민철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아마겟돈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 정도 세력을 일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조율자가 아마겟돈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몰랐었다.
생각에 빠진 안민철에게 주상혁이 말했다.
“뭐······. 정 궁금하면 산 채로 잡아다가 물어보면 되겠지.”
“넌 단순해서 세상 살기 참 편하겠다.”
“인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있어? 맘에 안 들면 힘으로 찍어누르면 되는 거야.”
말을 마친 두 사람이 각성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
한편 타임스퀘어에서 검은빛이 터져 나오던 그때, 강건우와 카라는 당황스러움에 빠져있었다.
“말도 안 돼요! 아직까지 본거지 설정을 안 한 파괴자가 있었다니.”
“그러게 늦게 지정할수록 경쟁에서 뒤처질 텐데.”
“이로써 서울에 수호자 한 명과 파괴자 두 명으로 세력이 형성되었어요.”
카라의 말에 강건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졌다.
‘분명 서울에는 수호자와 파괴자가 한 명씩이었어. 나의 존재가 나비효과라도 일으킨 건가.’
강건우는 전생과는 달라진 상황이 걱정스러웠다. 물론 강제 각성자에 불과한 자신이었다. 아마겟돈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확연히 달라진 상황에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건우 님, 영등포에 스트롱홀드가 생겨났으니 아크로폴리스에 큰 위협이 될 거에요.”
“다행히 곧바로 쳐들어올 상황은 아닌 것 같아. 당분간은 안정화하는 데 주력하겠지.”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고 가요. 파괴자 두 명이 연합했다고 했어요.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요.”
강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주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나는 스트롱홀드로 향합니다. 위험할 수 있으니 뒤를 쫓아오는 것은 그만두고 돌아가세요.”
강건우가 말을 마치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무너진 빌딩 사이로 오민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강건우를 향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제가 미행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까?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미행에는 서투시군요.”
오민석의 등장에 강건우의 마음이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두 손을 부여잡고 싶었다. 하지만 무표정한 오민석의 얼굴이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강건우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오민석이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나쁜 의도로 미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중한 오민석의 태도에 강건우가 피식 웃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성격 그대로였다.
“아닙니다. 수호자 진영의 각성자이시죠?”
“그걸···. 어떻게?”
오민석은 당황스러웠다. 혹시나 미행을 한일로 책을 잡힐까 걱정됐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강건우의 눈빛은 호감이 가득했다.
‘역시···. 조율자 강건우는 수호자 진영의 성향에 가까운 거 같군.’
생각에 빠진 오민석에게 강건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제가 그쪽한테 관심이 좀 많아서 말이죠.”
“네···. 네?! 아니 그···. 그런···.”
처음 받아보는 남자의 고백에 오민석이 말을 더듬었다. 남자의 관심이라니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때 강건우의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하하. 오해하지 마세요. 수호자 진영을 말하는 겁니다. 저는 조율자 강건우라고 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수호자 진영의 초기 각성자 오민석입니다.”
오민석과 인사를 나눈 강건우가 다시 한번 경고를 했다. 파괴자가 두 명이나 모여있는 스트롱홀드였다. 오민석이 있기에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조금 전 파괴자 중 한 명이 영등포에 스트롱홀드를 설치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러 갈 겁니다. 위험하니 이만 돌아가시죠.”
“.....”
강건우의 말에 오민석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그 모습에 강건우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오민석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누구도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저 표정을 보니 절대 돌아갈 생각이 없군. 하···. 이거 어쩐다···.’
오민석이 결연한 표정으로 강건우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굳게 다물어진 오민석의 입술이 열렸다.
“걱정해주시는 건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파괴자의 상태를 파악해야 합니다.”
“하···. 그럼 같이 가시죠.”
강건우의 제안에 오민석이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방해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당분간 동료가 되는 거겠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강건우가 오민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강건우를 지긋이 바라보던 오민석이 손을 마주 잡았다.
“아무래도 저보다 강하신 것 같더군요. 후방지원을 맡겠습니다.”
“네, 그래 주시면 한결 편하겠습니다.”
강건우가 악수를 나누며 오민석에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오민석의 직업은 성전사였다. 강력한 탱킹능력과 효율은 낮지만 자체적인 힐링까지 가능한 직업이었다. 최철우가 B 랭크에 불과한 오민석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도 강력한 직업때문이었다.
인사를 나눈 강건우와 오민석이 스트롱홀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스트롱홀드로 향하는 두 사람의 앞을 많은 수의 크리쳐들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쌍검을든 강건우에게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강건우와 오민석은 파죽지세같이 크리쳐를 해치우며 스트롱홀드를 향해 가까워져 갔다.
오민석의 눈이 오우거 무리와 트롤 무리를 벌레죽이듯 찍어누르고 있는 강건우를 바라보고있었다.
‘말도안되는 강함이군.. 저런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어느 한쪽진영이던 끝장나겠어.’
후방지원을 자처했지만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강건우는 많은 수의 크리쳐들과 싸우면서도 상처하나 입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너무 놀라워 입만 벌리고 바라보았었다. 여지껏 본적이 없는 강함이었다. 오민석이 피식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네. 광주에 있는 정원주님이라면 상대해볼만 할까?’
오민석이 수호자 진영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인 정원주를 떠올렸다.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상상해본 오민석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사람이 지는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는군.. 제발 지금 느낌처럼 올바른 사람이어야 할텐데.’
그때 크리쳐의 정리를 끝낸 강건우가 오민석의 곁으로 다가왔다. 숨소리하나 흩으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민석이 다시 한번 감탄을 했다.
“민석 형님, 이제 이 앞쪽으로는 타임스퀘어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건우 님.”
“말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제가 한참 동생입니다.”
“아닙니다. 이게 편합니다.”
오민석이 손을 저으며 거절을 했다. 강건우가 한숨을 쉬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에휴.. 알겠습니다. 말은 천천히 놓는걸로 하죠.”
잠시 후 스트롱홀드에 도착한 두 사람을 맞이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파괴자 주상혁 이었다.
“쥐새끼처럼 여기까지 잘도 왔네? 스트롱홀드에 온 것을 환영한다.”
파괴자 주상혁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 있는 건물들에서 초기 각성자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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