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자(1)
“.....”
폐허가 되어버린 양천구의 어느 빌딩 안에 강건우가 기척을 죽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크리쳐들의 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우거와 트롤로 이루어진 크리쳐 무리의 숫자는 대략 300기. 박태정의 보고와는 달리 200기가 부족한 숫자였다.
‘음···. 일단 선발대로 크리쳐를 투입해서 간을 보시겠다?’
300기의 크리쳐라면 웬만한 도시 하나는 초토화시킬 수 있는 숫자였다. 선발대를 이용해 아크로폴리스의 전력을 최대한 약화하려는 적들의 수작이었다.
하지만 지난번 전투 이후로 급격하게 전력을 강화한 아크로폴리스였다. 강건우는 300기의 크리쳐를 그냥 지나쳐 보내기로 했다.
‘크리쳐쯤이야 알아서들 해결하겠지. 난 각성자의 전력을 최대한 줄이는 데 집중하자.’
잠시 후 크리쳐의 행렬이 꼬리를 감췄다.
창가에 기대어 앉아 육포를 씹어먹던 강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을 한번 둘러본 강건우가 건물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크리쳐 들이 나타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시의 상태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
건물들은 부서진 상태로 오랜 기간 방치되어있었다. 사람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서울에 있는 수호자 김한나의 생츄어리가 있는 강남으로 생존자들이 몰려갔기 때문이었다.
강남구는 수호자진영의 각성자들이 크리쳐 들을 소탕한 상태였다. 아직 강남에 불과했지만, 김하나는 곧 서울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할 것이다.
‘정부는 이제 이름만 남아있는 정도겠지···. 군대도 이미 껍데기만 남은 상태일 거고.’
주변을 살피며 길을 걷던 강건우가 어디서인가 들려오는 말다툼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낯이 익었다. 귀를 기울여 목소리를 듣던 강건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 목소리는···. 설마 민석이 형?’
강건우가 황급히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이 무너져 생긴 공터에 두 명의 남성이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강건우가 두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크게 놀랐다. 수호자 김한나의 소속 A 랭크 초기 각성자 최철우.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그렇게도 다시 만나고 싶었던 B 랭크 초기 각성자 오민석이였다.
“최철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한나 님의 명령이야. 파괴자들이 아크로폴리스를 공격하기 전까지 우리는 모른척한다.”
“정말 한나 님이 그렇게 명령했단 말이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강건우가 피식 웃었다. 오민석은 전생에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수호자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이 누구보다 강했었다. 강건우가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어차피 300기 정도로는 아크로폴리스에 큰 위협이 되지 못해. 우리는 지켜보다가 아크로폴리스가 위기에 빠졌을 때 개입한다.“
”전력도 줄이고 도움을 줬다는 명분도 챙기겠다는 속셈이야?“
오민석의 눈이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수호자는 파괴자들에 맞서 인간을 지키는 책임이 있었다. 지금 김한나가 하려는 행동은 파괴자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민석의 눈빛을 읽은 최철우가 한숨을 쉬었다.
”적당히 좀 해. 네가 영웅 놀이한다고 누가 알아나 줄 거 같아? 우리의 최종목표는 아마겟돈에서의 승리야.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아크로폴리스에는 무고한 시민들이 살고 있어. 만약에라도 방어선이 뚫리는 날에는 시민들이 가장 먼저 희생될 거야.“
”너 강건우 그 자식이 얼마나 건방진 놈인지 이야기 못 들었어? 우리의 호의를 거절한 건 그쪽이라고.“
얼마 전 김한나가 아크로폴리스에서 돌아왔다. 생츄어리에 도착한 김한나는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생츄어리안에서 여왕처럼 받들어져 지는 자신이었다. 강건우의 냉대에 수치심을 느낀 것이었다. 독기를 잔뜩 품은 김한나는 강건우에 대한 험담을 끊임없이 퍼부었다.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물론 강건우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강건우라는 사람은 내 알 바가 아니고. 나는 수호자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야.”
“하···. 진짜 넌 못 말리겠다. 그래도 명령은 명령이니까 내 말대로 해.”
“.......”
최철우의 단호한 말에 오민석이 침묵했다. 멀리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강건우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민석의 입에서 나온 자신에 대한 말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하···. 일단 첫인상은 망했군. 어떻게 친해져야 할까.’
강건우가 오민석과 친분을 쌓을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러다 문득 오민석에게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오민석은 자신에게 가족과도 같았다.
그때 대화를 마친 최철우와 오민석이 자리를 떠나려 했다.
“난 크리쳐들의 뒤를 쫓을 테니까 민석이 너는 파괴자들의 본대를 감시해줘.”
“알겠어. 그리고 잊지 마! 가는 길에 사람들을 만나면 생츄어리에 대해 꼭 알려줘.”
“하······. 알겠어. 너도 참 한결같다.”
“그럼 나 먼저 간다.”
말을 마친 오민석이 몸을 날려 자리를 떠났다. 그 방향을 쳐다보던 최철우가 비릿하게 웃었다.
“하···. 진짜 한나 님은 저런 놈은 왜 데리고 계신 것인지. 세상이 개 같은데 무슨 수호자고 나발이야.”
순식간에 변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던 최철우가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 장면을 모두 목격한 강건우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최철우와의 악연을 떠올리니 이가 갈렸다.
전생에서 최철우는 김한나의 최측근이었다. 강자에게는 사람 좋은 모습이지만 자신보다 약한 자는 벌레 보듯 하는 그런 자였다. 오민석은 자신보다 낮은 B 랭크였지만 초기 각성자였기에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었다.
‘개새끼. 강제 각성자들의 목숨을 파리 보듯 하는 놈이었지.’
최철우에게 강제 각성자는 소모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공략이 어려운 던전이라면 강제 각성자를 갈아 넣어서 공략법을 알아내는 경우도 허다했다. 자신 또한 최철우의 그런 방법에 희생당하지 않았던가. 당장이라도 곤죽을 만들어 놓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좀만 기다리라고 내가 잘근잘근 밟아 줄게.’
강건우가 이를 가는 사이 최철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잠시 그 방향을 바라보던 강건우가 자리를 떠났다.
****
각종 백화점과 쇼핑시설이 밀집한 영등포역. 오우거 한 마리와 트롤 5마리가 자리를 잡고 앉아 사람의 사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서로 더 많은 먹이를 먹으려는 듯. 오우거와 트롤은 서로를 힐끗 쳐다보며 작은 흉성을 터트리고는 했다.
“크르르르···.”
“크앙!”
크리쳐 들이 식사에 집중하던 때였다. 옹기종기 모여있던 트롤들 중 한 마리가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크르르?”
이해 할 수 없다는 소리와 함께 트롤의 목이 분리되며 피가 솟구쳤다. 그리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트롤의 몸이 땅으로 처박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소리를 지를 사이도 없이 양손검을 든 강건우가 트롤들의 중앙으로 불쑥 나타났다.
“안녕?”
짧은 인사와 함께 싱긋 웃어준 강건우가 양손검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일 검에 트롤의 목 하나였다. 공중으로 튕기듯 날아가는 트롤들의 수급이 마치 팝콘 같아 보였다.
“식사 중에는 개도 안 건들인다고 하지만···. 너넨 개만도 못한 새끼들이니까.”
십 초도 안 되는 시간에 트롤들을 무 썰 듯 썰어버린 강건우가 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며 말했다.
“크오?”
비릿한 피 냄새를 맡은 오우거가 등을 돌려 강건우를 발견했다. 트롤들의 시체를 확인한 오우거의 입가가 흉악하게 올라갔다. 먹이가 늘어난 것에 만족하는 것이었다. 오우거는 B 랭크인 오우거 투사와 오우거 마법사로 나뉘었다. 간혹 B 랭크 유니크 크리쳐인 트윈헤드 오우거가 존재했지만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전생에서 강건우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트윈헤드 오우거였다.
“웃어?”
강건우가 피식 웃으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오우거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하지만 오우거는 강건우의 도발에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강건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겁을 먹은 것이었다.
“네가 안 오면 내가 간다.”
말을 마친 강건우가 땅을 박차고 오우거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모습에 집채만 한 크기의 오우거가 괴상한 비명을 질러댔다. 주변에 위기상황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성공하기도 전에 강건우의 양손검이 오우거의 목을 몸통에서 분리했다. 깔끔한 일격이었다.
“건우 님, 다행히 주변에 발각되지는 않은 거 같아요.”
오우거가 죽자 강건우의 품에서 카라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 카라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준 강건우가 말했다.
“파괴자들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 수 없는 거야?”
“네, 주변에 크리쳐 들이 너무 많아서 기운을 정확히 감지하기가 힘들어요.”
카라의 말에 강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쳐가 방해된다면 쓸어버리면 그만이었다. 크리쳐들의 피가 낭자한 주변을 한차례 둘러본 강건우가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잠시 후 오민석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멀리서 강건우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대단한 강자야. 누구지 한나 님보다 훨씬 강력해 보이는데. 설마 저 사람이 강건우?”
오민석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강건우는 인간들을 먹이로 삼는 크리쳐 들을 처참하게 죽였다. 그 얼굴에서 분노를 읽은 것이었다. 어쩌면 김한나의 말과는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쌍한 분들···. 좋은 곳으로 가시길···.’
오민석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인간들의 시체를 한군데로 모은 후 소각했다. 그리고 강건우가 사라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길을 걷고 있는 강건우가 뒤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역시···. 따라오고 있지?”
“네, 몇 시간 전부터 계속 건우 님을 주시하고 있어요.”
카라의 말에 강건우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강건우는 오민석의 미행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짐짓 모르는 척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주변의 크리쳐 들을 소탕하고 다녔다. 마치 정의의 사도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민석이 형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나란 말이지.’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오민석에게 호감으로 다가갈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카라가 그런 강건우의 행동에 어이없는 실소를 지었다.
“하.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호감을 산 다음 뭘 어쩌시려고요?”
“뭘 어쩌긴 어째. 파괴자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야지.”
“그리고요?”
강건우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카라를 바라보았다.
“아마 나를 따라오던 민석이 형이 파괴자들에게 들킬 확률이 높겠지? 그때 위기에 빠진 형을 내가 구하는 거야. 파괴자도 잡고 민석이 형도 잡고. 일거양득 아니겠어?”
“.....”
강건우의 설명에 카라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전생의 트라우마였을까 유독 가족과 오민석에게 집착하는 강건우였다. 이해는 됐지만, 걱정도 됐다.
“와! 진짜 악당 그 자체네요.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인데 일부러 위기에 빠트려요?”
강건우가 정색하며 카라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카라가 엄살을 부리며 투덜거렸다.
“아! 왜 이래요!”
“잘 들어. 민석이 형 같은 사람이 김한나 밑에서 얼마나 고생할지 넌 모를 거야. 잘못된 방법일지 몰라도 꼭 김한나에게서 데려오고야 말 거야.”
다짐하듯 말하는 강건우의 얼굴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때 강건우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에서 검은색 빛이 터져 나왔다. 그 장면을 목격한 카라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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