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girl Bad girl(3)
여기저기 고성이 난무하는 중앙관제실. 심각한 표정의 박태정과 이진호가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진호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씩씩거렸다. 정면의 화면에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위풍당당 걷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있었다.
“형님, 도대체 어떻게 들어 온 거 랍니까?”
“나도 모르겠다. 정문을 지키던 각성자가 문을 열어 줬다는데···.”
“어떤 새끼입니까? 당장 처벌해야 합니다.”
이진호의 성화에 박태정이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에 잡힌 여성은 수호자 김한나였다. 주변을 호위하듯 둘러싼 부하들과 함께 조율자의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흑단처럼 흘러내린 긴 생머리를 가진 전형적인 미인상이었다. 사람들은 향해 짓는 미소에는 기품이 서려 있었다.
‘건우님에게 김한나에 대해 듣지 못했다면 넘어갈 만한 여자군···.’
하지만 박태정은 김한나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있었다. 강건우를 통해 실체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품위 있고 사람들을 아끼는듯한 행동들은 모두 가식이었다.
“진호야, 일단 건우님한테 연락은 없는 거지?”
“조금 전에 카라님을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박태정이 살짝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강건우가 김한나에게 가진 감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성으로 바로 오시는 거겠지?”
“네, 지금 오시는 중이랍니다.”
안도감에 고개를 끄덕인 박태정이 다시 화면을 주시했다. 김한나와 부하 각성자들은 어느새 아크로폴리스의 도심 중앙 부분에 다다르고 있었다.
곧 조율자의 성에 도착할 것 같았다.
“음···.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출입제한 모드를 해제한 게 실수였을까?”
“형님,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건우님도 언젠가는 부딪힐 일들이라 하셨습니다.”
자신을 위로하는 이진호를 씁쓸한 미소와 함께 바라본 박태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우님이 오시기 전까지 우리가 상대한다.”
“네, 가시죠.”
박태정과 이진호가 조율자의 성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성 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김하나 일행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민들의 시선에도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시민들은 처음 만나는 수호자의 존재에 낯설지만, 호기심을 느꼈다.
“형님, 꼭 백 년 묵은 구미호처럼 생겼네요.”
“진호, 김한나 앞에서는 말조심해라.”
“네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김한나가 조율자의 성 앞에 도착했다. 자신을 맞이하는 박태정과 이진호를 한차례 훑어본 김한나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말로만 듣던 태정님이시군요? 저는 수호자 김한나라고 해요.”
“안녕하십니까? 강건우님의 각성자 박태정이라고 합니다.”
김한나와 인사를 나눈 박태정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는 김한나님의 방문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식의 방문은 곤란합니다.”
자신을 향한 질책 섞인 질문에 김한나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그랬군요. 정문을 지키던 각성자분들이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시길래 사전에 말이 돼 있는 줄 알았지 뭐에요?”
“웃기지 마! 그쪽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거겠지!”
가식적인 김한나의 말에 이진호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정문을 지키는 각성자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상부의 허락 없이 문을 열어줄 리가 없었다. 이진호는 김한나가 무언가 수작을 부렸을 거로 생각했다.
“저는 그냥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정중히 말했을 뿐이에요.”
“이익!”
잔뜩 화가 난 이진호를 박태정이 자제시키며 앞으로 나섰다. 이미 벌어진 일을 붙잡고 있어 봤자였다.
“그 일은 조사하면 진상을 알게 될 겁니다. 무슨 일로 아크로폴리스를 방문하신 겁니까?”
“수호신님의 신탁을 받고 왔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건우님과 나누고 싶어요.”
김한나의 말에 박태정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미 돌려보내기는 힘들었다. 돌아가라고 해서 물러날 김한나가 아니었다.
생각을 마친 박태정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태정이 형, 이제부터 내가 상대할게.”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돌아온 강건우가 나타난 것 있었다. 옆에는 김주환이 서 있었다.
팔크람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성안의 모처에 보내고 왔다. 강건우가 김한나 주변의 각성자들을 살펴보았다.
‘민석이 형은 같이 오지 않은 건가.’
오민석이 보이지 않자 강건우의 표정에 아쉬움이 스쳤다. 김한나가 강건우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듣던 대로 멋있는 분이셨네요. 건우님은.”
“안녕하십니까?”
김하나를 본 강건우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김한나에게 자신에 대한 기억은 없을 터였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 했다.
“허락도 없이 제 영역에 들어온 것은 만신전을 통해 분명히 문제를 제기하겠습니다.”
“너무 무섭게 그러지 마세요. 나쁜 의도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김한나가 살가운 표정으로 눈웃음을 쳤다. 그 모습에 강건우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너는 이런 년이었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그런 행동.’
강건우의 차가운 눈빛에 김한나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수호자로 선택받고 나서 이런 대접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자신은 선택받은 각성자들 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자신이었다. 어디에서나 여왕 대접에 익숙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관리했다. 지금 시점에서 강건우의 존재는 절대강자 그 이상이었다.
“만신전에서 건우님과의 연대를 원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강건우의 질문에 김한나가 답했다.
“간단해요. 어차피 저희의 목적은 인류를 지키는 것. 건우 님의 목표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러니 서로가 성장할 때까지 간섭하지 않기로 하는 거죠.”
김한나의 제안에 강건우가 실소를 흘렸다. 역시나 자신들을 인류의 수호자로 포장하는 것은 여전했다. 어이가 없었다. 수호신들은 인류를 신앙심을 이용한 포인트 자판기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물론, 수호자 중에서는 정말 인류를 지키려는 사명감을 가진 자도 있었어. 하지만 결국 제거되고 말았지.’
각 진영의 만신전은 신들의 이합집산으로 이루어졌다. 상위의 강력한 신들은 최후의 승자가 되어 우주의 절대자가 되려는 생각뿐이었다. 힘이 약한 하위의 신들은 이번 전쟁을 통해 자신의 힘을 키워 자신의 행성에서의 세력을 확장할 생각뿐 이었다.
‘지구는 빌어먹을 신들의 작업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강건우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번 죽었던 경험 때문에 자신의 평안함만을 추구하기로 한 이번 생이였다. 하지만 주변의 상황들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게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지 모르겠군.”
“글쎄요. 아크로폴리스는 이미 양쪽 진영에 완벽히 노출되었어요. 파괴자들의 성향상 가만히 놔둘 리가 없을걸요?”
김한나의 협박성 말을 들은 강건우가 비릿하게 웃었다. 역시 김한나는 저런 여자였다.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포악스러운 성격. 다른 사람들은 눈치챌 수 없겠지만 강건우는 알 수 있었다.
“얼마든지 오라고 해. 두 팔 벌려 환영해주지.”
“흥! 당신이 강한 건 알겠지만. 우리도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강건우의 태도에 김한나가 짜증스럽게 반응했다. 강건우는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차갑게 등을 돌려 조율자의 성으로 향했다.
“다시는 조잡한 수로 내 부하들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럼 꺼져.”
“다···. 당신!!”
김한나가 분노로 벌게진 얼굴로 강건우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강건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 한나님, 이만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박태정이 김한나에게 말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김한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
“한나님,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김한나의 부하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김한나가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시끄러워! 어디서 나서는 거야?!”
“....죄송합니다.”
부하 각성자가 민망한 얼굴로 물러났다. 김한나가 아크로폴리스의 인물들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사나웠는지 김주환이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 주인에게 전해. 오늘의 결정을 꼭 후회할 거라고.”
말을 마친 김한나가 몸을 돌리며 쏘아붙였다. 맨 처음 보여준 기품있는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썰물 빠지듯 사라지는 김한나 일행의 모습을 바라보던 김주환이 박태정을 향해 말했다.
“와···. 저거 성격이 보통이 아니네?”
“응, 건우님한테 듣던 대로네.”
“나가면서 행패나 안 부리려나?”
“여기서 나갈 생각이 없다면 그러라지.”
김한나와 부하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박태정과 김주환이 강건우가 향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조율자의 방에 있는 원탁회의실에 강건우와 주요인물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담담한 표정의 강건우가 의자의 손잡이를 툭툭 치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강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건우가 의자에 앉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일단 모르는 사람이 있으니 소개하겠습니다. 여기는 소랄 제국의 공주이자 과학자인 팔크람입니다.”
“안녕? 팔크람이라고 해. 내가 이래 보여도 나이가 매우 많아서. 편하게 말할게.”
팔크람의 소개에 사람들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처음 보는 드워프 종족이 신기할 법도 했다. 하지만 김주환에게 미리 설명을 들을 터라 충격을 받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팔크람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강건우가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아크로폴리스의 시설과 장비, 각종 연구 분야를 책임질 거야. 모두 물심양면으로 협조해주시길 바랍니다···.”
강건우의 말에 자리에 함께한 기술 분야 실무자들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이어졌다. 특히 기술자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팔크람과 드워프의 등장으로 인력난이 해결될 기미가 보였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아진 강건우가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준비하자 분위기는 더욱 즐거워졌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박태정이 강건우에게 말했다.
“건우님, 김한나의 말이 사실일까요?”
박태정은 조금 전 김한나가 했던 경고를 떠올린 것이었다. 지난번 단 한 명의 파괴자와 그 부하들만으로도 꽤 애를 먹었었다. 한국에 있는 파괴자들이 한꺼번에 쳐들어올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건우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박태정을 바라보았다.
“뭐? 파괴자들이 우릴 노린다는 거?”
“네,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진호도 초기 각성에 성공했고. 나랑 주환이 형도 당분간 아크로폴리스에 머물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강건우가 자신감을 보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파괴진영의 만신전과 연결되는 비석의 존재였다.
”비석이 존재하는 한 큰일을 벌이지는 못할 거야. 기껏해야 사냥을 방해하고 무력시위하는 정도겠지.“
”그럼 다행입니다.“
안심하는 박태정에게 미소를 지어준 강건우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하고. 다들 해산하세요. 팔크람 너는 좀 남아.“
강건우의 명령에 원탁회의실에 모였던 사람들이 해산했다. 모두가 나간 회의실에 강건우와 팔크람만이 남았다. 강건우가 팔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팔크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도대체 어떤 기능이야?“
강건우의 질문에 팔크람이 씨익 웃었다. 미소가 가득한 얼굴에는 순수한 과학적 탐구심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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