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신 헬리(3)
원시 엘프들의 서식처인 거대한 나무의 최상층에서 칠흑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을 목격한 원시 엘프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가헨 님에게 들은 대로 겁이 없는 놈이구나!”
쿵! 땅을 울리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검은색 피부를 가진 원시 엘프가 나타났다. 짙은 검은색 피부에 찰랑거리는 흑발을 가진 엘프였다. 두 눈은 형광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강건우가 자신을 노려보는 검은 피부의 엘프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게 진작에 나타나지 그랬어? 내가 들어온 거 알고 있었잖아?”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알아. 파괴신 중 한 명이겠지.”
강건우의 비아냥에 엘프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건방진 인간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아마겟돈의 제약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건방질 수 있는지 지켜보마.”
“됐고. 너네 대빵한테 전해. 합당한 후계자의 권한으로 만신 전과의 연결을 요구한다고.”
“빌어먹을 제약 같으니라고!”
강건우의 요구에 파괴신이 잔뜩 짜증이 난 표정을 지었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자신들을 감시하겠다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건우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아마겟돈의 시작과 함께 맺어진 규약을 깬다면 자신은 소멸하고 말 것이었다.
파괴신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흑색의 빛기둥이 일어나며 하늘로 치솟았다. 많은 힘을 소진한 파괴신이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기다려라. 가헨 님이 오실 거다.”
“빨리 오라고 해. 내가 바쁜 몸이라.”
강건우는 끝까지 건방졌다. 파괴신이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시켰다. 조율자 강건우. 예정에 없던 걸림돌이었다. 애초에 조율자의 탄생은 예정돼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빨리 좀 오라고 하라니까?”
“오고 있는 중이다.”
강건우가 피식 웃으며 파괴신을 도발했다.
“수호신들이었으면 진작에 왔겠다.”
“네 이놈! 나 파괴신 헬리의 이름을 기억해라! 언젠가 너를 반드시 씹어먹어 주마!”
강건우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파괴신 헬리에게 말했다.
“야. 조용히 좀 해. 나한테는 가헨보다 미만인 놈은 다 잡놈이야.”
강건우의 말이 끝나자. 파괴신의 머릿속에서 툭 하고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두 눈에서 끔찍한 형광색 기운이 폭사 되어 나왔다.
“하찮은 피조물 주제에 감히 나를! 죽여주마!”
파괴신 헬리의 두 손에서 검은색 기운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무시무시한 기운에 주변의 원시 엘프들이 공포에 질렸다.
‘걸려들었군. 파괴신의 공격은 과연 어떨까?’
강건우는 일부러 파괴신을 도발한 것이었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건우 님, 저 파괴신 괜히 힘만 빼겠네요.”
카라가 고개를 내밀며 파괴신을 바라보았다. 강건우가 피식 웃으며 방패를 장비했다.
“그래도 막는 시늉이라도 해줘야지. 제 폭발하겠다.”
“이놈들이 나를 앞에 두고 뭐 하는 거냐!”
파괴신 헬리의 손에 있던 기운이 강건우에게로 쏘아졌다. 무시 못 할 기운에 강건우가 살짝 긴장했다. 아무리 피해를 입지 않는다지만 자신에게 쏟아지는 기운의 힘까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쾅!
강대한 기운이 실린 공격이 강건우의 방패에 부딪혔다. 충돌로 생긴 흙먼지가 걷히며 강건우의 모습이 드러났다. 역시나 파괴신의 공격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방패를 얼굴 앞으로 들고 특유의 건방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야! 너 어떠하냐? 큰일 난 거 같은데?”
“이···. 이놈이 무슨 소리냐!”
분노한 헬리가 뒤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힘에 고개를 돌렸다.
“가···. 가헨 님···.”
“헬리 규정을 어겼군.”
파괴신 진영의 가헨이 어느새 나타나 있었다. 헬리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질렀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그···. 그게···. 저 하찮은 인간이 감히 신을 농락하길래···.”
“그만! 구차한 변명은 하지 마라. 만신전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려.”
가헨의 질타에 헬리가 강건우를 향해 분노의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 없이 갈라졌다. 헬리가 사라지자 가헨이 강건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강건우, 오랜만이군.”
“인사는 됐고. 내 요구는 알고 있겠지?”
강건우의 퉁명스러운 말에 가헨이 미소를 지었다.
“그 성격 고치는 게 좋을 거다. 아마겟돈이 영원히 이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오? 지금 협박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충고하는 거다.”
말을 마친 가헨이 강건우의 품에 있는 카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카라, 준비되면 이쪽으로 와.”
“네, 지금 갈게요.”
카라가 가헨의 앞쪽으로 날아갔다. 가헨의 손에서 검은색 파편이 떠올랐다. 만신전의 힘의 일부가 담긴 결정체였다.
“자 그럼 지금부터 만신전과의 연결을 시작할게요.”
말을 마친 카라가 검은색 결정체를 덥석 집어 먹었다. 그러자 카라의 몸에서 눈 부신 빛이 폭사 되었다. 주변을 감싸는 강력한 힘에 원시 엘프들이 사방으로 도망갔다.
[조율자 퀘스트] - 완료
목표 – 카라와 만신전의 연결 (수호자 진영 – 완료), (파괴자 진영 – 완료)
내용: 조율자는 아마겟돈을 심판하는 존재이다.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만신전의 기운이 담긴 결정 석을 카라에게 흡수시켜라.
보상 : 10000000P
[파괴자 진영의 만신 전과 연결에 성공했습니다.]
[앞으로 만신전에 대한 직접적인 감시가 가능해집니다.]
[조율자의 방 내부에 파괴신 진영의 비석이 생겨납니다.]
[보상으로 10000000P가 지급됩니다.]
잠시 후 빛이 사그라들며 검은색으로 물든 카라의 모습이 나타났다. 옆에서 지켜본단 가헨이 카라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음. 잘 흡수했군. 지금부터 우리 파괴신의 만신전은 조율자 강건우의 모든 권한을 인정하겠다.”
가헨의 말이 끝나자 카라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시 힘을 갈무리한 카라가 강건우의 품으로 날아왔다. 그런 카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강건우가 가헨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크로폴리스 내에 있는 던전들은 전부 귀속시킬 생각이다. 파괴신 쪽 신들에게 전해.”
“알겠다. 하지만 본거지 밖의 던전에 대한 무분별한 귀속은 규정 위반이라는 것은 알아줬으면 한다.”
강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크로폴리스 밖의 던전들은 수호자들과 파괴자들의 각축전이 될 것이었다. 자신은 당분간 거기까지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알고 있어. 그럼 볼일은 끝난 것 같군.”
“그리고. 본거지로 돌아가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파괴신들이 너를 잔뜩 노리고 있어.”
자신에게 뜻밖의 정보를 전해주는 가헨이었다. 순간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신들의 변덕인가보다 생각했다.
“수호자나 파괴자나 잔뜩 몰려와도 무서울 것 없지. 할 테면 해보라 해.”
“....”
강건우의 패기 넘치는 말에 가헨이 묵묵히 쳐다보았다. 잠시 강건우를 바라보던 가헨이 손짓하자 포탈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만신전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카라, 우리도 돌아가자.”
“네, 건우 님. 간만에 푹 쉴 수 있겠어요.”
강건우가 포털을 통해 던전을 빠져나갔다. 모두가 사라지자 곳곳에서 원시 엘프들이 나타났다. 방금전의 일들은 기억을 못 하는지 모두 멍한 얼굴이었다.
*******
조율자의 성 내부에 원탁회의실. 박태정과 김주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태정아, 김한나의 부하는 오늘도 찾아온 거야?”
“응, 오늘도 건우를 만나게 해달라고 한참을 소리치다 돌아갔어.”
“무슨 이유인지 말이나 들어보지 그랬어.”
“안돼. 건우 님의 명령이야. 돌아올 때까지 양쪽 진영의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셨어.”
단호한 박태정의 말에 김주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박태정이였다. 하지만 그런 성격이기에 강건우가 믿고 맡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조율자의 방을 지켜보던 이진호가 다급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형님들, 또 생겼어요. 이번에는 검은색이에요.”
“건우가 드디어 파괴신과의 일을 마무리 했나 보네.”
“이제 돌아오시는 건가?”
김주환과 박태정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 떠난 강건우가 무사히 일을 마친 것이었다.
김주환이 박태정을 향해 말했다.
“건우가 돌아오면 오랜만에 축제라도 열어야 하는 거 아니냐?”
“음···. 나쁘지 않네. 아크로폴리스도 많이 안정됐으니까.”
강건우가 없는 1개월 동안 아크로폴리스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강제 각성자가 총 4개 팀으로 재편되었다. 경험이 많은 1팀의 각성자들을 나머지 팀의 선임으로 배치했다. 선임자들의 지휘 아래 각 팀은 하위 던전을 공략하며 실력을 키우고 포인트를 모았다.
또한, 장비 제작소가 조금씩 가동되고 있었다. 소량이지만 각성자들이 사냥해온 부산물들을 이용한 장비들이 생산되고 있었다. 각성자들은 부산물을 팔아 모은 포인트를 장비 구매에 사용했다. 그렇게 모인 포인트를 아크로폴리스의 각 분야에서 일하는 시민들에게 지급했다. 미약하지만 포인트를 이용한 경제구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음. 팀 이름은 건우가 오면 정할 거지?”
“응, 아무래도 1팀 2팀 이런 식보다는 상징성 있는 이름을 가지는 게 좋지.”
김주환이 며칠 전 강제 각성자들을 도우러 갔던 던전공략을 떠올렸다.
“같이 던전 가보니까 애들 실력 많이 좋아졌더라.”
“뭐···. 동기부여가 됐다고 할까?”
“그렇겠지. 포인트를 이용해 할 수 있는 게 앞으로 더 늘어날 테니까.”
김주환이 말에 박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율자의 상점에는 장비 제작소 외에도 어마어마한 시설들이 있다고 했다. 강건우가 포인트를 모아 바꾸어나갈 아크로폴리스의 미래를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아~ 빨리 건우가 돌아왔으면.”
“그러게 말이다.”
말을 마치고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보다 동생인 강건우였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들이 의지하는 커다란 사람이 되었다. 그런 서로의 생각을 읽었기에 웃음이 터진 것이었다.
“와···. 남자가 보고 싶을 줄이야.”
“건우 님이면 그럴만하지.”
그때였다. 두 사람의 귓가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들한테 인기 많은 건 사절이야.”
“건우야! 언제 왔어?”
“건우 님!”
반가움에 소리치는 두 사람의 눈앞으로 강건우가 나타났다.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근데···. 너 복장이 왜 그래?”
“으음···.”
모습을 드러낸 강건우를 발견한 두 사람이 웃음을 참기 시작했다. 두꺼운 잠바에 눌러쓴 모자 그리고 얼굴을 전부 가리고 있는 마스크에 커다란 선글라스. 수상함은 물론이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에휴···. 건우 님, 제가 뭐라 그랬어요.”
강건우의 품에서 고개를 내민 카라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카라의 행동에 김주환과 박태정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왜? 이게 어때서?”
모자와 마스크를 벗은 강건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복장을 확인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코디한 복장이었다. 모두가 비웃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크로폴리스의 주인이자 아마겟돈의 심판관인 조율자 강건우. 완벽한 스펙의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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