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핀 협곡(1)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암석봉우리. 수많은 봉우리 중 한 곳에 따듯한 햇빛을 즐기며 암컷 그리핀이 알을 품고 있었다.
“크르륵.”
오랜 시간 알을 품고 있어서였을까. 밀려오는 허기에 사냥을 나간 수컷 그리핀을 기다리는 암컷의 기분이 짜증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런 암컷의 기분을 읽기라도 한 걸까.
“캬아악!”
저 멀리 수컷 그리핀이 두 발로 오크 여러 마리를 움켜쥔 채 날아오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사냥의 성과물이었다. 곧 이어질 포식에 대한 기대감에 암컷 그리핀의 눈매가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
그때였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수컷 그리핀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끼에에엑!”
자신의 배우자가 허무하게 떨어지는 모습을 본 암컷의 얼굴에 공포감이 서렸다. 그놈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자신들이 모여 사는 그리핀의 협곡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사냥꾼들.
“캬아! 캬아!”
암컷 그리핀이 주변의 둥지들을 향해 울음소리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둥지에서 집채만 한 그리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조금 전 수컷이 추락한 방면으로 일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그리폰들의 모습은 장관 그 자체였다.
[C 랭크 던전 - 알레르리 그리핀 협곡]
수를 셀 수 없는 암석봉우리들로 이루어진 협곡의 한 동굴 앞에 강건우와 김주환이 숨을 죽인 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방을 주시하던 김주환이 품에서 에너지바를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
“건우야, 진짜 이 작전이 먹힐까?”
강건우가 김주환이 건네주는 에너지바를 손에 받아들며 말했다.
“응, 그리폰은 모계사회야. 우두머리 암컷을 자극했으니 분명 떼거지로 몰려들걸?”
“하.. 그럼 다행이고. 그동안 우두머리 암컷 찾아낸다고 난리 친 거 생각하면.”
몇일간의 고생을 떠올렸는지 김주환이 몸서리를 쳤다. 그 모습에 강건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하필 지금이 산란기 일줄 알았나.”
“던전은 신들이 만든 인공적인 세상이라고 하지 않았냐?”
김주환의 질문에 강건우의 품속에 있던 카라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맞아요. 신들이 자신의 세상을 본뜨거나 성향에 맞게 창조하는 거죠.”
“그래? 근데 쓸데없는 이 디테일함은 뭔데?”
김주환의 지적에 카라와 강건우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였다. 협곡의 입구 쪽에서 엄청난 흙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형! 준비해 오고 있나 봐!”
강건우가 김주환에게 말을 한 뒤 조율자의 상점에서 구매한 아이템을 확인했다.
‘프로텍트 쉴드 스킬스톤 한 개, 크라네의 그물망 한 개. 준비는 철저하군.’
“야! 도대체 얼마나 끌고 오는 거야?”
김주환이 눈앞에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흙먼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강건우가 김주환의 어깨를 툭 하고 치며 달려나갔다.
“형, 적당한 위치에 오면 내가 전역도발로 어그로를 끌 테니까 큰 거 한방 부탁해!”
“오케이! 맡겨만 달라고.”
김주환의 믿음직한 대답을 뒤로하고 강건우가 전방을 향해 달려나갔다. 흙먼지가 조금씩 가까워지며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이진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청난 숫자의 그리폰을 등에 달고 달려오던 이진호가 강건우를 발견하고 다급히 소리쳤다.
“으아! 건우 님. 나 죽습니다!. 빨리! 빨리!”
“알겠어! 조금만 힘내!”
강건우가 이진호의 뒤를 따라 날아오는 엄청난 숫자의 그리핀을 확인했다.
‘적어도 100마리는 넘겠네. 협곡에 있는 수컷들은 다 몰려왔겠어.’
그때 죽을힘을 다해 달리던 이진호가 그리폰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제길! 죽기 싫다고!”
이진호가 위태위태한 것을 발견한 강건우가 태초의 함성[Legend]을 사용했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이진호의 얼굴에 활력이 돌아왔다. 강건우의 몸에도 힘이 넘쳐났다.
“으아아아!”
이진호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그리폰의 발톱을 간신히 벗겨냈다. 그때 이진호의 곁에 도착한 강건우가 전방을 향해 광역 도발[Epic]을 사용했다.
“흐압!”
그리폰들의 눈이 붉어지며 순식간에 강건우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그리폰을 바라보는 강건우가 방패를 굳게 잡았다. 그리고 프로텍트 쉴드[Normal] 스톤을 사용했다. 반투명의 보호막이 강건우를 감쌌다.
“어딜 지나가려고! 덤벼!”
텅! 강건우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그리핀의 머리를 방패로 강하게 후려쳤다.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선두의 그리핀이 뒤로 튕겨 나갔다.
-끼에에엑!-
선두의 그리핀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자 미처 피하지 못한 그리핀들의 대형이 무너지며 엉망으로 엉키기 시작했다.
“건우님, 지금이에요!”
“알겠어!”
카라의 신호를 받은 강건우가 하늘을 향해 크라네의 그물망을 사용했다. 하늘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그물망이 펄쳐졌다. 당황한 그리핀들이 황급히 날아오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끼에에엒!-
순식간에 얽혀버린 그리핀들이 괴성을 지르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발톱과 부리의 공격이 이어지자 크라네의 그물이 금세라도 찢어질 듯 위태로웠다.
강건우가 그물을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며 소리쳤다.
“주환이 형은 뭐하고 있는 건데!”
“건우 님, 그물 찢어지겠어요!”
투덜거리며 뒤를 바라본 강건우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김주환과 이진호가 엄청난 숫자의 오크에게 쫓겨 도망쳐오고 있었다.
“건우야! 피해!”
“으아아! 주환 형님. 잡히겠습니다!”
두 사람과 오크들의 거리가 손 끝에 닿을 정도로 좁혀졌을 때였다. 오크들이 그물에 묶여 있는 그리핀들을 발견하고는 흥분한 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록타! 오크 전사들이여! 그리핀이 저기있다!”
“데람님의 복수를!”
“피는 피로 갚는다!”
그리핀을 발견한 오크들이 강건우 일행을 지나쳤다. 황당한 상황에 멍하니 오크들을 지나보낸 강건우였다.
“뭐야? 이건 또 뭔데?”
어이없는 상황에 짜증이난 강건우의 곁으로 김주환이 다가왔다.
“건우야, 진호가 도착해서 너한테 합류하려고 나왔는데.”
김주환이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이어갔다.
“으으. 갑자기 저 오크 놈들이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복수가 어쩌고. 명예로운 죽음이 어쩌고.”
“건우야, 나도 주환이 형이 달려오길래 뭔 일 인가 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강건우가 시선을 돌려 오크가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오크와 그리핀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강건우가 힘을 풀자 그물을 찢고 나온 그리핀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려 했다. 그리고 오크들이 몸을 던져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막고 있었다.
-끼에에엑!-
-크아아앙!-
“죽여라!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게 막아라!”
“록타!”
그리핀들의 강력한 발톱과 부리에 오크들의 몸이 수박 깨지듯 터져나갔다. 하지만 오크들은 공포를 잊은 듯 무기를 휘두르며 그리핀들을 압박했다. 팽팽한 접전이었다.
“건우야, 팝콘 각인데?”
크리쳐들의 전투를 바라보던 김주환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은 농담을 했다. 그러자 이진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저 두 무리가 싸우는거 지켜만보다 마무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극한의 이득?”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카라가 강건우의 어깨위로 날아와 앉았다.
“음.. 확실히 이건 이상하네요.”
“그치? 크리쳐끼리 싸움을 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가네.”
강건우의 말에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던전은 어차피 신들이 공략을 목적으로 만든 인위적인 세상이에요. 본래의 세상에서 오크와 그리핀이 적대관계라고 해도. 던전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어요.”
“왜 내가 던전만 들어오면 돌발상황이 이어지는 건데?”
강건우가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그때 옆에 있던 김주환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어?! 오크가 점점 이기는데? 와! 저 근육 바보들 근성 하나는 끝내주네.”
“크.. 역시. 남자라면 오크를 응원합시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의 농담이 이어졌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카라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리핀을 협곡 밖으로 끌어낸 점. 그리고 조율자의 존재 때문에 던전의 설정에 영향이 간 것 같아요.”
“그럼 팔크람의 연구소에서의 일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거군.”
“네, 그때는 특별한 상황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요.”
강건우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조율자의 힘이 던전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이건 마치 나에게 던전 공략을 완료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 아닐까?’
강건우의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자신의 힘이 강해질수록 카라 역시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던전에 들어오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특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단지 나를 위해 힘을 쓰는 것에 대한 무언의 시위라는 건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강건우의 귓가로 김주환과 이진호의 외침이 파고들었다.
“건우야! 저놈들 협곡 안으로 들어간다!”
“끝장을 보려는 모양입니다!”
두 사람이 외침에 생각에서 빠져나온 강건우가 협곡의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수컷 그리핀들을 정리한 오크들이 괴성을 지르며 협곡의 입구로 달려가고 있었다.
강건우가 오크들의 돌발행동에 혀를 차며 말했다.
“칫.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건우야, 이제 우리 어쩌냐?”
“우리도 따라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강건우가 재촉하는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진정해. 어차피 암컷들을 상대하기 무리 일거야.”
강건우가 암컷 그리핀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리핀은 수컷보다 암컷이 덩치도 컸고 힘도 강했다. 알을 품는 시기라 약해져 있다고 하지만 오크들이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일단 우리도 따라 들어가자.”
강건우가 오크들이 향한 협곡의 입구로 몸을 날렸다. 질풍같은 속도로 순식간에 사라진 강건우를 뒤를 김주환과 이진호가 따라붙으며 말했다.
“야. 건우야 같이 가.”
“저도 갑니다.”
강건우가 협곡 안으로 달리며 생각했다.
‘만약 협곡 안으로 들어간 오크들이 그리핀들을 전부 해치울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강건우가 들어온 이곳은 [C 랭크 – 알레르리 그리핀 협곡]이었다. 던전 안에 많은 크리쳐들이 존재했지만. 보스 크리처인 우두머리 암컷 그리핀을 잡을 경우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우리가 오크들을 도와줘야겠군.’
좁은 협곡의 입구를 지나자 그리핀의 둥지가 있는 암석봉우리 지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크들의 진입에 당황했는지 암컷 그리핀들이 둥지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잠시 후 허겁지겁 강건우의 뒤를 따라 김주환과 이진호가 협곡에 도착했다.
“천천히 좀. 가라. 이제 너 속도 맞추는 거 힘들어.”
“아고고. 죽겠습니다.”
랭크 업 이후 강해진 강건우의 신체 능력은 두 사람이 따라잡기에는 너무 벅찼다. 잠시 숨을 돌린 김주환과 이진호가 전방에 벌어지고 있는 기가 막힌 장면에 입을 떡하니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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