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2)
각성자 트레이닝센터에 있는 휴게실에 묘령의 여인과 강건우가 앉아있었다. 밝게 미소 지으며 말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강건우의 얼굴은 잔뜩 얼어있었다.
“오빠, 잘 지냈어?”
“.....”
자신에게 안부를 묻는 여인을 강건우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짙은 검은색의 머리. 커다란 눈망울에 붉은 입술 볼륨감 있는 몸매. 그야말로 웬만한 연예인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외모였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강건우의 시선에 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빠, 여전하네. 여자 앞에서 얼음 되는 거.”
“응? 아···. 미안. 오랜만이다. 아린아.”
강건우의 사과에 아린이라 불린 여인이 눈웃음을 지었다.
“아니야, 변한 게 없어 보여 좋네. 잘 지냈지?”
“응. 나야 잘 지냈지. 그런데 여태껏 아크로폴리스에 있었던 거야?”
“응, 얼마 전에 들어왔어.”
“아···. 그랬구나.”
아크로폴리스는 초기에 받아들인 5천 명의 정착이 안정에 접어들자 박태정의 주도하에 추가 시민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박태정의 강력한 주장에 강건우도 동의한 일이었다.
‘강제 각성자의 충원문제도 있고, 앞으로 시설물 운영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
생각에 빠진 강건우의 귓가에 청아한 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다. 아저씨랑 아줌마는 잘 지내시지? 지우도?”
“응, 잘 지내셔. 아린이 부모님도 잘 지내셔?”
강건우의 질문에 아린의 얼굴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잘 지내셔.”
“그보다 아크로폴리스에 들어왔으면 나한테 연락을 하지 그랬어?”
“하하. 그게 말이지···. 사실 연락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아린이 말을 이어갔다.
“오빠가 여기의 주인인 강건우라는 걸 알고 나니까 조금 망설여지더라고. 뭔가 너무 커져 버린 사람이라서 랄까?”
아린의 말에 강건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유아린은 언제나 밝고 심성이 깨끗한 그런 아이였다. 또한, 자신의 동생인 강지우의 중,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로 자신의 동생인 강지우와 강서구 2대 퀸카로 불리며 인기가 엄청났었다.
‘지우랑 둘이 아주 단짝이었는데 말이지···. 그런데 언제 한국으로 돌아온 거지?’
강지우와 둘도 없는 단짝인 아린은 강건우와도 친분이 있었다. 유난히 싹싹한 성격으로 강지우의 오빠인 강건우에게도 붙임성 있게 다가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을 따라 외국으로 나간 후로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기에 한국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럼 지우한테라도 연락하지 그랬어?”
강건우의 말에 유아린이 사슴 같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응? 나 지우랑은 한국에 오고 나서 연락했는데? 여기도 우리 삼촌이랑 지우가 강력 추천해줘서 빨리 들어 올 수 있었고.”
“그래? 근데 왜 지우가 나한테 말을 안 했지?”
강건우의 말에 유아린이 크게 손을 저었다.
“아니야!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
“아···. 그랬구나.”
대화가 끝나자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강건우가 힐끗 유아린을 쳐다보았다.
‘길에서 마주쳤으면 몰라봤겠어.’
자신과 4살 차이가 나는 유아린은 어느새 성숙한 아가씨가 되어있었다. 교복을 입은 모습만을 보던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어색한 침묵 속에 강건우가 간신히 대화거리를 생각해냈다.
“아! 그런데 아린이는 왜 강제 각성자가 되려고 하는 거야?”
강건우의 질문에 유아린의 얼굴이 붉어지며 부끄러워했다.
“아니. 그게···. 지우가 같이 일해보자고 권유하기도 했고···. 오빠가 싸우는 모습이 멋져 보이기도 해서······.”
“아···. 그랬구나.”
자신을 힐끗 바라보며 수줍게 말하는 유아린의 모습에 강건우의 마음에 묘한 일렁임이 생겼다. 늘 자신보다 어린 동생의 친구라고만 생각해 왔었다. 물론 아름다운 외모에 설렜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보다 더욱 어색해진 공기에 유아린이 벌떡 일어났다.
“오빠! 나 이제 훈련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이제 매일 연락할게···. 어? 내가 무슨 말을···.”
유아린 붉어진 얼굴로 횡설수설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아름다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어설픈 모습에 강건우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귀여운 건 여전하네. 그나저나 내가 훈련을 지켜보면 부담스럽겠지?’
애초에 후보자들의 훈련을 살펴보러 온 강건우였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할 유아린을 생각해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유아린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강건우가 트레이닝센터를 나섰다. 그 곁을 김주환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건우! 그 여자 누구야?”
“내 동생 친구.”
강건우가 별일 아니라는 듯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김주환이 강건우에게 헤드락을 걸며 말했다.
“뻥 치시네! 그 여자가 너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던데? 솔직히 말해 무슨 관계였어?”
“아아아! 이거 좀 놓고 말하시지? 나 진짜 힘쓴다?”
“오케이. 알았어.”
김주환이 강건우에게 걸었던 헤드락을 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아린. 강제 각성자 후보자 중에서도 여신이라 불리며 인기 장난 아니지. 그런 여자가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너 선수인 거냐? 아님 바보인 거냐?”
김주환의 말에 강건우가 더욱 별거 아니란 듯이 말했다.
“말했지? 동. 생. 친. 구.”
“어휴···. 이 멍청이를 어찌 할꼬···.”
한숨을 쉬는 김주환을 뒤로하고 강건우가 자신의 애마에 올라탔다.
“형 나 먼저 갈 테니까. 훈련 잘 부탁해.”
“그래, 던전 공략 준비되면 연락해.”
“오케이. 간다.”
강건우가 김주환을 향해 장난스러운 경례를 붙인 후 차량을 출발시켰다. 웅장한 엔진 소리와 함께 롤스로이스 팬텀이 미끄러지듯 도로를 달려 나갔다.
***
트레이닝센터에서 나온 강건우가 조율자의 방에 도착했다. 던전 공략을 위한 준비를 하려던 강건우가 문득 생각난 듯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동생 강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야! 강지우.”
-어? 오빠 아린이한테 얘기 들었어. 오늘 만났다며?
강건우가 여자들의 번개 같은 정보력에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진즉에 좀 말해주지 그러셨어?”
-그게···. 아린이가 오빠한테 부담 주기 싫다고 그래서.
“부담? 안부 전하는 게 무슨 부담 돼?”
강건우가 의아해하며 묻자 강지우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 아린이가 말 안 해? 그것 내가 괜찮다고 말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무슨 말인지 나도 좀 알면 안 될까?”
-사실. 아린이네 아빠가 크리쳐한테 당해서 의식불명 상태야.
강건우는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응, 그래서 포인트를 모으면 치료제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강제 각성에 지원한 거야.
“그래? 그런 거라면 네가 포션을 구해주지 그랬어?”
-포션이라면 지금도 내가 꾸준히 주고 있지. 근데 포션이 듣지 않는지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시네.
그때였다. 강건우와 강지우의 통화를 듣고 있던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건우 님, 혹시 어떤 크리쳐의 공격이었는지 물어보세요.”
“응? 알겠어.”
카라의 말에 강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야, 혹시 어떤 크리쳐에 공격당하신 건지 알고 있어?”
-그게 지우도 직접 보지 못했데. 아빠와 같이 공격당한 어머니는 행방불명이시고.
“그래? 알겠어.”
-오빠, 이제 아린이 소식 알았으니까. 오빠가 신경 좀 써!
강지우가 강한 어조로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런 동생의 명령 아닌 명령에 강건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알겠다. 종종 연락해 볼게.”
-종종 말고! 자주!
“알겠다고! 자주!”
강건우가 통화를 마치며 카라를 바라보았다. 카라는 강지우의 통화내용을 듣고는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카라? 무슨 생각을 그리해?”
“아니에요. 이제 던전 공략 준비하죠.”
“그래? 알았어.”
카라의 대답에 강건우가 별다른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던전 공략을 떠나기 위한 마지막 점검에 들어갔다.
‘일단. 당분간 파괴자들이 쳐들어올 일은 없고. 수호자들이 문제인데···. 김한나···. 그년의 성격상 다짜고짜 공격부터 해오지는 않을 거야···. 일단 빠르게 던전 공략을 하는 게 좋겠어.’
강건우가 조율자의 방에 있는 중앙관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앙관제실에는 박태정이 아크로폴리스의 상황을 살펴보며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박태정에게 다가간 강건우가 입을 열었다.
“형, 바쁘네? 아크로폴리스에는 별일 없지?”
“건우 님, 트레이닝센터는 벌써 다녀오신 겁니까?”
“응, 갔다가 일이 생겨서 빨리 나왔어.”
강건우의 말을 들은 박태정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네, 파괴자의 공격으로 불안해진 시민들이 이런저런 문의를 해오기는 했지만. 금세 안정됐습니다.”
“다행이네. 앞으로 이런저런 일이 많을 텐데. 형이 잘 대처해줘.”
“네, 알겠습니다.”
믿음직스럽게 대답하는 박태정의 모습에 강건우가 미소를 지어주었다.
“당분간 파괴자의 공격은 없을 거야. 아마 던전 공략해서 전력을 강화해서 오겠지.”
“응, 분명해. 혹시 공격을 해오더라도 카라에게 연락을 줘. 그럼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올게.”
강건우의 말에 카라가 고개를 내밀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엣헴. 건우님이 랭크 업으로 이젠 던전 안에서도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고요!”
“역시! 카라야!”
강건우가 장난스러운 말투와 함께 카라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리고서는 박태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만약 수호자 쪽에서 접촉해온다면 내가 올 때까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마.”
“그냥 무시하라는 말씀입니까?”
“응, 그냥 무시해.”
박태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수호자라면 믿을 만하지 않을까요? 어찌 됐건 질서를 지키고 생명을 수호하는 입장 아닙니까?”
“응, 하지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야. 특히 서울에 자리 잡은 김한나라는 수호자는 더 믿을 수 없어.”
강건우가 김한나를 떠올리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김한나는 영악하고 이기적인 성격이었다. 지금의 아크로폴리스의 힘을 확인한다면 분명히 이용할 생각부터 할 것이다.
‘수호자의 탈을 쓴 뱀 같은 여자지. 왜 수호신들은 그런 여자를 선택한 것인지···.’
강건우의 차가운 표정에 박태정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건우님, 혹시 그 여자와 악연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응, 있지, 그것도 아주 지독한 악연. 하지만 그걸 떠나서 믿지 못할 여자인 건 확실해.”
“네, 건우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돌아오실 때까지 아크로폴리스 안에 들이지 않겠습니다.”
강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박태정의 어깨를 툭 하고 쳐주었다. 그리고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번 던전 공략도 제외해서 미안해. 형 아니면 믿고 맡길 사람이 없네.”
“무슨 말씀을. 건우님이 저를 믿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고마워. 아크로폴리스가 안정되고 나면 형도 같이 가자.”
“네, 알겠습니다.”
강건우와 박태정이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중앙관제실을 나가려던 강건우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개인적인 부탁 하나만 할게.”
“네. 말씀하십시오.”
“이전 강제 각성자 후보자 중에 유아린이라고 있을 거야. 불편함 없게 형이 신경 좀 써줘.”
강건우의 말에 박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던전 잘 다녀오십시오.”
“부탁할게.”
강건우가 짧은 인사를 남기고 중앙관제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던전으로 떠나기 전 부모님을 뵙고 휴식도 취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저녁은 뭐를 해달라고 할까.’
어머니의 손맛을 떠올린 강건우가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강건우의 품 안에 있는 카라는 불안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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