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가?(3)
아크로폴리스를 둘러싼 황금빛 성벽 앞. 전투를 피해 도망갔던 시위대가 돌아와 있었다.
피켓을 들고 고함을 지르던 시위대가 강건우를 발견했다.
“왔다. 우리 땅을 되돌려 줘!”
“내 전 재산이 저 안에 있습니다. 제발 돌려주세요.”
“돌려달라고!”
시위대의 사람들이 점점 격해지며 고함을 지를 때였다. 배가 잔뜩 나온 대머리 남성이 시위대에게 소리치며 나섰다.
“그만하십시오! 시위대 대표인 제가 대화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자자! 진정들 하세요!”
시위대 대표가 몇몇 남성을 대동하며 강건우에게 다가왔다. 다가오는 대표의 얼굴을 확인한 강건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 저놈은 여기서 까지 완장질이네?’
시위대 대표의 정체는 가양동 동사무소장인 김기태였다. 강건우의 얼굴을 확인한 김기태가 반색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건우 아니냐?”
“.....”
강건우가 입을 다문 채 김기태를 노려보았다.
강건우의 아버지 강경식은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었다. 젊은 시절 동사무소의 작업을 보조하는 일을 하다 특별 채용이 된 케이스였다. 낮은 급수에서부터 시작한 공무원 생활은 어려웠다. 하지만 묵묵히 맡은 일을 했다. 그렇게 강경식은 강건우와 강지우를 낳고 키우며 살아왔다.
‘저 개새끼가 소장으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
그러던 어느 날 김기태가 신임 동사무소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강경식이 공무원을 사직했다. 가족들은 안정적인 공무원을 사직한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때부터였지. 우리 가족의 개고생이···.’
공무원을 그만둔 강경식이 여러 직장을 알아보았지만 낮은 학력과 많은 나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진 가족을 위해 설현숙 역시 밤낮으로 일을 시작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강건우가 강격식과 설현숙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다.
‘김기태가 비슷한 연배인 아버지를 괴롭히고 인사고과를 엉망으로 주는 바람에 그만두실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지.’
아버지가 그만둔 이유를 알게 된 강건우는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고자 하는 마음과 김기태보다 높은 곳까지 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어린 날의 치기였다. 그 후 수많은 낙방 끝에 군대에 가게 되었고 제대 후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것이었다.
“.....”
강건우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김기태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하하. 네 아버지를 닮아서 과묵하구나. 경식이는 잘 지내지?”
탁! 강건우가 김기태의 손을 쳐내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 손 치워. 그리고 우리 아버지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뭐, 뭐?”
김기태가 얼굴을 씰룩이며 화를 참았다. 지금의 강건우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어린 나이니 어르고 달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옛날 일로 기분이 상해 있는 거니? 오해하지 마라. 그건 업무적인 마찰이었어.”
“옛날일 나도 떠올리기 싫다. 시위대 대표로 왔으니 용건만 간단히.”
대놓고 무시하는 강건우였다. 김기태가 화를 삭이며 입을 열었다.
“건우야, 지금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주민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니?”
“.....”
“하루아침에 노숙자 신세가 됐다. 그 흔한 옷 한 벌 챙겨 나오지 못했어.”
“그래서, 들어와 옷이라도 챙겨 가겠다는 건가?”
김기태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흠흠. 건우야, 사람이 능력이 있고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마음이 넓어야 한단다.”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강건우가 쏘아붙이자 김기태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버지와의 일은 오해였다니까. 건우야, 저 안은 괴물들에게서도 안전하다고 들었다. 그런 좋은 곳을 혼자 독차지해서야 되겠니?”
김기태가 슬슬 본심을 드러내었다. 강건우의 얼굴이 점점 분노로 차올랐다. 그런 강건우의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기태가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안에 들어가 살아도 문제없을 만한 사람들 명단을 추려 볼 테니. 그 사람들만이라도 들여보내다오.”
강건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부탁을 해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명단을 추천한다는 명분으로 또 어떤 갑질을 할지 모르는 인간이었다. 물론 들어줄 마음도 없었다.
강건우가 김기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걸 왜 당신이 결정해? 좋은 말 할 때 돌아가.”
강건우의 말에 김기태의 곁에 서 있던 한 사람이 발끈했다.
“이야. 강건우 많이 컸네? 예전의 그 찌질이가 아닌데?”
소리치며 나타난 사람은 장대한 체격을 가진 남성이었다. 바로 김기태의 아들인 김진수였다.
김기태가 자기 아들에게 말했다.
“진수야,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들어가 있어.”
“아니에요, 저놈은 제가 잘 다뤄요.”
강건우가 안 좋은 추억을 떠올렸다. 학창시절 유난히도 자신을 괴롭히던 놈이었다. 자신을 왕따로 몰아가던 주범도 바로 김진수였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해 힘이 장사였기에 학교에서도 내로라하는 싸움꾼이었다. 하지만 군인들과 싸우는 강건우의 힘을 목격한 김기태가 아들을 필사적으로 말렸다.
“진수야, 예전에 네가 알던 건우가 아니다. 힘으로 어쩔 생각 말아라.”
김진수가 짜증이 난 얼굴로 말했다.
“아빠,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저놈이 군인들을 상대로 날아다니며 순식간에 빠져나갔다고? 저 약골이?”
자신을 상대로 당하기만 하던 약골이 하루아침에 초인이 되다니. 강건우의 힘을 목격한 적이 없는 김진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잔뜩 험악한 인상을 한 김진수가 주먹을 쥐며 강건우에게 다가갔다.
“건우야, 우리 동창끼리 좋게, 좋게 말로 풀자. 엉?”
강건우가 피식 웃었다.
“그 성격은 여전하네. 미친개한테는 매가 약이라지?”
“뭐?! 이 새끼가!”
김진수가 발끈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으악! 왜 이래?”
강건우의 얼굴을 강타한 김진수가 주먹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강건우의 단단한 몸에 자신의 주먹을 다친 것이었다. 강건우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이제, 미친개 훈육을 시작해볼까?”
강건우가 김진수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으악!”
엄청난 고통에 김진수가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한참을 이어진 구타에 김진수의 몰골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갔다. 하지만 아직 만족하지 못한 강건우였다.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김진수에게 먹였다.
“야. 옛날이 좋았지? 정신 차려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
포션의 효과로 멀쩡해진 김진수를 강건우가 다시 구타하기 시작했다.
“으악! 살, 살려!”
“죽이지는 않는다니까?”
그렇게 곤죽이 되고 회복하기를 반복했다. 그 장면에 충격을 받은 김기태가 무릎을 꿇으며 빌었다.
“건, 건우야, 그만해다오. 내가 사과하마.”
강건우가 김진수를 내려놓았다.
“당신. 조만간 우리 아버지한테도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할 거야.”
“알았다. 내 강경식 씨에게도 사죄하마. 우리 아들을 살려만 다오.”
울며 빌고 있는 김기태를 바라보던 강건우가 시위대를 향해 소리쳤다.
“돌아가 계세요!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조만간 적당한 조치를 취할 테니 소란피우지 마세요!”
강건우가 등을 돌려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강건우의 말을 들은 시위대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자. 돌아갑시다. 여기서 있어봤자 소용없겠어요.”
“그래요. 저 청년이 기다려보라고 했잖아요.”
시위대가 순식간에 해산했다. 김기태도 김진수를 업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이 떠나자 강건우가 카라에게 말했다.
“카라, 문제 일으키지 않을 만한 사람들을 선별해서 받아들일 방법은 없을까?”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본거지 정보석에 개인정보를 일일이 입력하면 사람들을 선별할 수 있어요”
“개인정보라···.”
잠시 고민을 하던 강건우가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동사무소에 저장된 주민 정보를 이용하면 되겠군.”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강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카라가 주환이 형이랑 같이 동사무소에서 주민 정보를 가져와 줘.”
“네, 건우님!”
강건우가 카라와 함께 성벽의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일단의 무리가 강건우를 붙잡으며 말을 걸어왔다.
“강건우 씨, 무사하셨군요!”
고개를 돌린 강건우의 눈앞에 이진호 중위를 비롯한 10명의 군인이 서 있었다.
“이진호 중위님? 또 저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겁니까?”
이진호 중위가 강력하게 부인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부탁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저한테 무슨 부탁이?”
이진호 중위가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와 제 부하들을 받아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네? 탈영이라도 하신 겁니까?”
“네···. 맞습니다.”
이진호 중위가 고개를 숙이며 자신들이 탈영한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진호 중위가 속한 부대는 경기도에 있었었다. 하지만 크리쳐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수도를 지키기 위해 서울로 불려왔다고 했다. 그 후 군부대가 떠나버린 경기도는 쑥대밭이 되었다.
“뉴스를 통해 소식을 들은 후 가족들과 연락을 취하려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강건우가 안타까운 눈동자를 했다. 자신 또한 힘을 얻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여기 있는 분들 전부가?”
“네, 크리쳐에게 가족들을 잃은 경기도 출신 병사들입니다.”
“음···. 안전을 위해서라면 군대에 있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
이진호가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병사들도 무릎을 꿇었다.
“크리쳐들에게 복수하고 싶습니다. 이제 군대는 정부를 지키는 경비견에 불과합니다.”
“음···.”
“건우 씨라면 저희의 복수를 도와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강건우에게 카라가 속삭였다.
“건우님, 어차피 아크로폴리스 방어에 인력이 필요했던 참이잖아요.”
“그치. 하지만 섣불리 각성자로 만들어 줄 수는 없지.”
“어차피 양산형 각성자가 되면 건우님의 소속을 벗어날 수 없어요.”
강건우가 결심했다.
“좋습니다. 다만 몇 가지 확인을 걸친 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진호 중위와 병사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강건우가 말을 이어갔다.
“군대에 있을 때보다 더 위험한 일을 하게 될 겁니다. 다들 단단히 각오하세요.”
이진호 중위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탈영병의 신세라 받아주시지 않았다면 갈 곳이 없었습니다. 건우 님에게 충성하겠습니다!”
“충성하겠습니다!”
“충성!”
병사들의 충성 다짐에 쑥스러워진 강건우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여기 군대 아닙니다. 따라오세요.”
강건우가 정문을 향해 손짓했다. 성벽의 정문이 환한 빛을 내며 열렸다. 처음 보는 광경에 병사들의 입이 벌어졌다. 강건우가 들어가자는 손짓을 하며 안으로 사라졌다. 이진호 중위와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따라 들어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