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나 혼자 역대급 수련 121화
29장 각자의 자리(2)
나는 잠깐 동안 멈춰선 채, 이찬혁을 바라보았다. 이전의 웃음기 가득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철 들어버린 듯, 낯선 모습의 이찬혁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깔끔한 슈츠에 검은 구두를 신었고, 머리 또한 왁스를 발랐다.
“너 뭐냐.”
조금은 친절하게 얘기해도 되었지만, 뭔가 배신감이 드는 느낌에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내 말에 이찬혁이 별거 아니라는 듯, 가벼운 입꼬리를 지으며 말했다.
“뭐긴. 여행 끝나고 돌아온 거지.”
“저 밑에 있는 사람들은 뭐냐.”
밑에 있던 경호원들은 이찬혁의 짐을 차에 실었다. 이찬혁의 허락이 없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군성 그룹의 입김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아이리스 길드에 강압적인 힘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일들은 이찬혁의 허락을 맡았다는 뜻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숙소까지 올라와서 짐을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행이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야지.”
“이딴 식이었으면 여행 가는 거 말렸을 거다.”
내가 예상했던 흐름은 이게 아니었다. 여행을 끝낸 이찬혁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내 예상이었다.
아이리스 길드에서 김세아와 함께 한 팀으로써 같이 성장해 나가고 싶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서로 이끌어주고, 그런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잘 해왔다고 생각했다.
“네 아버지의 때문이냐?”
내 질문에 이찬혁은 자신 특유의 능글스러움으로 분위기를 흐렸다. 내가 지레짐작할 수 없게 정보를 풀지 않았다.
“아니야.”
“그럼 뭐냐. 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나는 설명을 요구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면 이찬혁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다른 걸 다 제쳐놓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찬혁의 태도였다. 길드 대항전까지만 해도, 같이 힘내자면서 서로를 다독이며 훈련했다.
물론, 상태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찬혁의 멘탈을 건드릴 일들은 많았으니까.
그래도 길드 대항전이 끝나고, 단 며칠 만에 이렇게 이런 선택을 내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인 거지.”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마. 지금 화나려고 하니까.”
“후우.”
이찬혁이 가벼운 한숨을 쉬고는 멀쩡한 바닥을 구두 굽으로 툭툭 찍었다. 뭔가 얘기하기 싫은 것을 숨길 때 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이찬혁이 입을 열 때까지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침묵 가운데 이찬혁이 입을 열었다.
“가자.”
“어딜.”
“제정신엔 얘기 못 하겠다. 장소 좀 옮기자.”
이찬혁이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에 탔고, 나도 같이 탑승했다. 1층에 도착한 뒤, 문이 열렸다.
그러자 경호원들이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다가 이찬혁을 보며 상체를 숙였다. 이찬혁은 그들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정문 앞에 섰을 때, 이용학을 호위하던 경호원이 다가왔다.
“어디 가십니까.”
“친구랑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하고 돌아갈 테니. 먼저 돌아가.”
“안 됩니다. 바로 데리고 오시라는 회장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그러자 이찬혁의 눈빛이 달라졌다. 경호원을 매섭게 노려보며,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친구 앞에서 쪽팔리게 하지 마. 그리고 다시 한번 얘기하는데 난 내 발로 돌아가는 거다. 그러니 그렇게 전해. 도망칠 생각 없다고.”
이찬혁은 경호원의 어깨를 툭 치고는 정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 이찬혁을 따라 나갔다.
이찬혁이 잘 아는 조용한 술집까지 가는 동안 조용했다. 나 또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이찬혁은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택시 기사님의 화려한 운전으로 목적지에는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나는 카드를 건네 계산을 하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가 사라지고, 나는 이찬혁과 함께 앞에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안은 생각보다 분위기가 좋았다. 옛날 사진에서만 볼 수 있던 인테리어와 조명들을 보니 신기하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직원이 밝은 미소로 우리를 반겨 주었고, 이찬혁의 말에 직원은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서 가볍게 안주를 시켰다.
“술부터 주세요.”
직원이 가져온 술을 잔에 따르고 가볍게 한잔 마셨다. 이찬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기 잔에 계속 술을 따라 입으로 가져갔다.
한 병, 두 병.
술병은 계속 쌓였고, 안주가 나왔을 때 이찬혁은 이미 반쯤 취해 있었다. 정신을 못 차리는 정도가 아닌, 딱 완전히 취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이찬혁이 나를 쳐다보았다.
“부럽다.”
“…….”
“네가 가진 재능, 자신감, 머리. 다 조오오온나 부러업다고.”
나는 앞에 있는 술잔에 담긴 술을 마셨다. 알싸한 맛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난 재능도 없고, 자신감도 없고, 머리도 나빠서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는데…….”
“그딴 소리 하지 마.”
“네가 후천적 특성을 각성했을 때,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다. 아니, 진심으로 축하했지.”
내가 정식으로 2군 전투 헌터가 되었을 때, 이찬혁과 김세아는 정말 기뻐해 주었다. 아직도 내 뇌리에서 그 모습은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 알고 있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가슴 한구석에서 뭔가 꿈틀거리더라. 임무가 진행되면서 너와 김세아가 성장하는 모습이 뚜렷한데 나는 제자리를 걷는 것 같았거든.”
조금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이찬혁이 고개를 떨궜다. 자신의 잔에 다시 술을 따르고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지. 분위기도 좋았고 너나 팀장이 잘 챙겨줬으니까. 근데 길드 대항전 때 뼈저리게 느꼈다.”
“…….”
“너넨 저 위에 있었고.”
이찬혁이 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리며 말했다.
“난 저 아래 있다는 걸.”
실력의 차이가 날 순 있지만, 김세아와 나는 그런 생각을 일도 하지 않았다.
“우린 그렇게 생…….”
“아니, 너네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야. 길드 대항전이 끝나고 사람들의 집중을 받는 너희 모습을 봤을 때, 질투가 났다.”
소주잔을 쥐고 있는 이찬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찬혁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예상이 갔다.
자괴감.
나와 김세아에게 가졌던 감정이 다시 떠올랐을 거고,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충분히 공감이 되는 상황이었다.
헌터 학교에서 내가 매일같이 하던 생각이었고, 매일 같이 후회하던 짓이었으니까.
“그래서. 도망가는 거냐?”
우리 얼굴을 보기 힘들어서, 자신의 감정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이라면 절대 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피하면, 다음에 그다음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때 도망만 치게 될 것이다.
나는 이찬혁을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다. 김세아와 더불어 아이리스 길드에서 함께 쌓아온 인연이었다.
“아니.”
이찬혁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나는 내 잔에 술을 따르고, 안주 한 점과 같이 입으로 가져갔다.
“싸우러 가는 거다.”
“…….”
“지금처럼 너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 너희는 나를 도와줄 거고, 나는 너희가 주는 도움에 익숙해지겠지.”
이찬혁이 내 눈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그의 눈빛에서 비장함이 가득한 것이 보였다.
“너희가 가진 특성과 재능을 잘 살리는 것처럼, 나도 내가 가진 것을 이용할 생각이다.”
군성 그룹.
서열 최하위 셋째 아들이자, 정실부인의 자식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이찬혁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이찬혁은 싸우는 것을 선택했다. 스스로 일어나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선택한 것이다.
도전을 할 곳은 이찬혁에겐 S급 던전과도 같은 군성 그룹이었다.
나는 잡으려던 마음을 깔끔하게 접었다. 지금의 다짐과 눈빛이라면, 분명히 해낼 것이라고 믿었다.
“할 수 있겠냐?”
“길드 대항전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계속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야. 그리고 이미 아버지에게 말한 순간 이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됐다.”
나는 이찬혁의 잔에 술을 따랐고, 이찬혁이 술을 받아 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길드에서는 그냥 보내준 거냐?”
“아이리스 길드에서 그린나래 길드로 임대 처리했다.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아이리스 길드에 부탁했다. 머 아버지는 내켜 하지 않으시겠지만. 기한은 1년이야.”
“1년?”
“그래. 아버지와 내기를 했거든. 1년 안에 그린나래 길드에서 정상을 찍겠다고. 그리고 난 다시 아이리스 길드에 돌아올 거다.”
“미친놈.”
나는 술잔을 들었고, 이찬혁이 가볍게 다가와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고, 다 식어버린 안주를 먹었다.
“하아…… 1년 뒤 아버지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네.”
달콤한 복수를 꿈꾸는 이찬혁의 표정은 흐뭇해 보였다. 그러나 그런 달콤한 복수를 하기까지 이찬혁이 걸어갈 길은 험난할 것이다.
우리와 함께했던 훈련은 애교일 정도로, 더욱 미친 듯이 훈련하고 살아남아야 했다.
군성 그룹에서 회장의 눈에 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그들은 하나같이 이찬혁을 노릴 것이다.
이찬혁은 군성 그룹에 지지해 줄 편이 없었으니까, 더욱 집요하게 그 틈을 노릴 게 분명했다.
말 그대로 혼자서 군성 그룹을 상대해야 하는 미친 싸움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이겨낸다면, 이찬혁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성장할 것이다.
살아만 남는다면, 이진수를 능가할 수도 있었다.
“근데, 1년 뒤에 돌아와도 우리보다 약하면 안 받아준다. 우리도 놀고만 있을 것은 아니거든.”
“그게 제일 걱정이야. 내가 너희보다 강해져 있으면 어떡하지 싶다. 너희들을 친구라고 소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헛소리하지 말고 마셔!”
그러곤 웃고 떠들며 술을 마셨다. 안주까지 모두 비우고, 시간이 늦어져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술값 계산은 이찬혁이 했다. 나는 먼저 밖으로 나와 차가운 밤공기를 맞았다. 몸 안에서 끌어 오르는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었다.
딸랑딸랑!
문이 열리고 계산을 마친 이찬혁이 나왔다. 그와 함께 정면에서 라이트를 켠 차량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이리스 길드 건물에서 보았던 리무진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찬혁을 데리러 온 것으로 보였다.
“김세아는 안 보고 가도 되냐?”
나야 인사를 나눴지만, 나 못지않게 팀원들을 생각하는 것이 김세아였다. 이렇게 얘기 없이 가면 분명 섭섭해할 게 뻔했다.
“다음에.”
“내일 정도면 깨어날 텐데?”
나는 체력 스탯이 높아 회복이 비정상적으로 빠른 것일 뿐, 보통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하루 정도 걸리니, 내일이면 일어날 것이다.
“그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대신 안부 좀 잘 전해 줘라. 하루라도 빨리 가고, 하루빨리 돌아와야지.”
“그래.”
마지막으로 한 악수와 함께 이찬혁은 리무진에 탑승해서 돌아갔다. 나는 그것을 보고 택시를 불러 숙소로 돌아왔다.
텅 비어버린 것만 같은 숙소.
그 안에 내가 사다 놓았던 과자와 맥주가 보였다. 나는 바닥에 털썩 앉아 과자와 맥주를 뜯었다.
“크으으…….”
뭔가 씁쓸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하는 모호한 감정과 함께 밤을 보냈다.
* * *
다음날 일어난 김세아에게 이찬혁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놓고 섭섭하다고 이야기하며,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 뒤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김세아는 정상적으로 퇴원을 했고 개인 훈련에 들어갔다.
나 또한 개인 훈련에 집중하며, 다음 임무를 선택했다. 이번에는 김세아의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곳으로 골랐다.
그리고 채하나에게 다가가 임무에 대해 이야기했다. 채하나는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김세아? 이번에는 못 데려갈 거야. 아니, 앞으로 못 볼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