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나 혼자 역대급 수련 095화
23장 어디 한번 해보자고(6)
“가자!”
“명을 받들겠습니다!”
내 말과 함께 뒤에 정예 병력이 순식간에 프로아 백작을 향해 달려갔다.
꽤나 많은 수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프로아 백작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었다.
가장 용맹하게 달려간 병사의 기합과 함께 검이 날아갔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패도적인 공격에 프로아 백작의 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병사의 검은 프로아 백작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프로아 백작의 공격이 더욱 빨랐기 때문이다.
“컥!”
병사가 힘없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눈동자의 초점이 사라진 것을 보니 죽은 것이 확실했다.
“어리석은 놈들.”
그러나 정예 병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들의 무기를 쥐고 동료의 죽음에 분노하며, 프로아 백작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하나의 상처라도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 치열하게 싸웠다. 동료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죽음도 보았겠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뭘까.’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솔직히 저렇게 싸워줄 줄은 몰랐다. 왕자의 명이라고 하지만, 저런 압도적인 상대를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싸운다는 것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왕자님 빨리 몸을 빼시죠.”
한 병사가 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만큼 이 안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다수의 병력을 데려왔음에도 프로아 백작 한 명을 상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자님께 가지 못하게 해!”
“저분이 살아남아야 왕국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로펜 왕자님의 무고한 죽음을 위해서라도.”
이런 식의 관심을 갖는 것은 이곳이니까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저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왕국을 사랑했고, 자랑스러워했고, 무엇보다 지키고 싶어 했다.
시련에서의 감정이입은 시련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도 뒤로 도망갔다가, 본대가 돌아왔을 때 함께 프로아 백작을 쳐도 됐다.
물론, 피해도 그만큼 더 커질 테지만, 나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니 크게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후우…….’
그러나 체펜의 몸에 들어오면서 기억까지 공유하게 되니, 감정을 컨트롤하는 게 쉽지 않았다.
저들을 보며,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내가 꿈꾸고 있는 목표까지 오버랩되니 더더욱 이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자, 이거 받아.”
난 옆에 있는 병사에게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건넸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손에 쥐여 준 다음 말했다.
“지금부터 왕실 보고로 가서 내가 말하는 것을 가져와. 네가 최대한 빨리 움직일수록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
“예.”
“네가 가져올 물건은…….”
나는 혹시나 까먹을까 두 번이나 설명해 주었다. 거의 속사포 랩과도 같았다.
다행히 병사는 똘똘한 편이었고, 바로 뒤를 향해 몸을 돌리고 달려나갔다.
체펜이 가지고 있던 검을 꺼내 들고, 프로아 백작과 싸우고 있는 병사들에게 합류했다.
앞선 병사의 공격에 프로아 백작이 몸을 뒤로 빼고 있었다. 그 틈을 노려 마나가 담긴 검을 찔러 넣었다.
삭!
내 검이 프로아 백작의 왼쪽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옷깃이 잘리고 그 주변이 피로 물들었다.
꽤나 상처의 깊이가 깊었던 모양이다.
“이 새끼들이!”
프로아 백작이 짜증을 내며, 아까 와는 비교되지 않는 강력한 힘을 내뿜었다.
슬슬 시간이 지나 하이 엘프의 피로 만든 영약이 효과를 발휘할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마 어느 정도는 영약이 프로아 백작의 몸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속도를 늦추거나, 영약의 효과가 발휘하지 않게 할 방법이 지금 당장은 없었다.
콰가가강!
프로아 백작의 검에서 마나가 솟구치며 정예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모두 산개해서 피하는 데 집중해! 절대 맞서지 마.”
나는 정예 병사들에게 소리치며, 프로아 백작의 공격을 피했다.
“크흐흐흐.”
프로아 백작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하이 엘프의 피로 만든 영약은 복용자의 신체적 능력과 마나를 극한으로 올려주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미칠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하이 엘프의 피로 만든 영약을 복용하기 위해선 세계수의 나뭇가지로 달인 물을 함께 마셔야 했다.
그것이 하이 엘프의 피에 담긴 힘을 순화시켜 복용자의 몸에 정상적으로 안착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때, 프로아 백작의 왼손이 주머니로 들어가더니, 액체가 담긴 병을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설마?’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어디서 얻었을까 고민하던 중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로펜을 죽인 화살.
세레나가 쏜 화살이라고 했던 그 화살은 분명 세계수의 나뭇가지로 만든 화살이었다고 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런 소름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발을 박차며 프로아 백작에게 몸을 날렸다.
검의 방향은 백작이 아닌 손에 들린 액체가 담긴 병이었다. 저것만 못 마시게 해도 프로아 백작을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어딜!”
프로아 백작이 검과 내 검이 부딪쳤다. 강한 충격파가 발생했고, 나는 이를 악물며 버텼다.
아직까지는 체펜의 육체가 잘 버텨주고 있었다.
챙! 챙! 챙!
나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내 모습을 보고, 정예 병사들도 달려들어 다시 한번 프로아 백작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프로아 백작이 자리를 박차며 공중으로 점프했다. 손에 있는 액체 병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밖으로 나가!”
나는 정예 병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이제 프로아 백작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었다.
내가 심부름을 부탁한 병사가 오기 전까지는 일방적인 도륙의 현장이 될 것이다.
정예 병사들은 내 외침에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왕자로서의 명령이다. 빨리 밖으로 나가!”
밖으로 나가는 정예 병사들을 확인하며, 나도 밖으로 달렸다. 프로아 백작은 지금 영약의 힘을 진정시키기 바쁠 것이다.
“이런 젠장.”
밖에 상황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왜 심부름을 시킨 병사가 오지 않나 했더니, 밖에서도 전투가 한창이었다.
기존의 왕궁을 지키는 쪽과 프로아 백작에 의해 반역을 꿈꾸는 자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서 심부름을 시킨 병사를 찾았다.
그가 가져올 아이템이 있어야 프로아 백작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콰아아아앙!
입구가 완전히 부서지며, 프로아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 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몸집을 하고 있었다.
짧았던 머리는 산발이 되어 길게 자라났고, 외모는 좀 더 엘프 쪽에 가깝게 변했다.
“이 힘…… 죽이네.”
프로아 백작이 눈에 힘을 주고, 주위를 둘러보며 적당한 사냥감을 찾았다.
아직 나를 찾지는 못한 모양인지, 다른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프로아 백작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저 멀리 있는 정예 병사의 앞에 나타났다.
굵고 큰 손가락으로 병사의 머리를 부숴 버렸다. 내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왔다.’
타이밍 좋게 내 쪽으로 뛰어오고 있는 심부름 시킨 병사의 모습이 보였다. 프로아 백작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몸을 움직였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병사가 건네주는 물건을 받았다. 흰 천에 둘둘 감겨 있는 것을 풀었다.
흰 천 안에는 평범한 장검이 하나 있었다. 특이한 것이라고는 검 자루 부분에 보라색 보석이 하나 박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왼손 위에 그 검을 올리고, 왼손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주르륵.
검신에 피가 타고 흘렀다. 내 손에서 나는 피는 대충 옷에 문지르며 닦아냈다.
오른손에 들린 검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몸 안에 차오르는 마나를 느끼며, 나는 프로아 백작을 향해 다가갔다.
“거기까지!”
정예 병사의 심장으로 향하는 프로아 백작의 검을 쳐냈다. 그러고는 마나가 실린 발로 프로아 백작을 걷어찼다.
중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빠르게 날아가 벽에 박혔다. 나는 다시 지면을 박찼다.
바닥이 움푹 파이고, 돌들이 비산했다.
내 검은 프로아 백작을 향해 쇄도했고, 정신을 차린 프로아 백작이 검을 들어 막았다.
챙!
콰아아앙!
검을 막았지만, 그 충격파는 일방적으로 프로아 백작을 향해 날아갔다. 결국 그 힘을 버티지 못한 프로아 백작이 꼴사납게 뒤로 굴렀다.
“그 힘은 뭐지?”
비틀거리며 일어난 프로아 백작이 나를 보며 물었다.
내가 들고 있는 시간의 검이라고 불리는 아티팩트였다. 능력은 사용자의 수명을 대가로 초월적인 힘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사용자의 피를 검에 먹여야 했다. 병사에게 처음 검을 받자마자, 검에 피를 먹인 것이었다.
“몰라도 돼.”
슈펜도 딱 한 번 이 검을 사용한 적이 있었고, 이것에 대해 어린 체펜에게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슈펜은 이 검으로 당시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던 프로아 가문의 가주를 이겼다. 그로 인해 프로아 가문을 실로스 왕국의 밑으로 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 다시는 이 검을 사용하지 않았고, 왕실 보고에 흔한 장검처럼 숨겨 놓았던 것이다.
“내가 시간이 없어서. 빨리 끝내자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명이 깎이고 있었다. 나는 사선으로 그으며 프로아 백작을 공격했다.
촤아악!
가슴에 긴 상처와 함께 피가 터졌다.
하이 엘프의 영약을 먹고 신체적 능력을 비롯해 모든 것이 인간을 초월했지만, 시간의 검은 그것보다 더욱 큰 능력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비틀거리는 프로아 백작 심장에 시간의 검을 꽂았다. 그러자 프로아 백작이 피를 한 움큼 뱉어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 정도로…….”
몸이 축 처지며 프로아 백작은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다시 검에 피를 묻혀 계약을 종료시켰다.
“이제 화해만 남은 건가.”
* * *
왕국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프로아 백작이 슈펜에게 사용한 약물은 모두 해독되었고, 슈펜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슈펜은 빠르게 왕국을 안정시켰고, 프로아 백작가에 대해서는 모든 권리를 박탈시켰다.
직계는 모두 감옥형에 처했고, 재산은 모두 압수하였다. 그 과정에서 영약을 제조했던 실험실과 세레나의 언니의 시체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엘프의 숲으로 향했다.
먼저 흰색 깃발을 흔들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표시하고, 황금 관에 담긴 시체를 들고 엘프의 숲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엘프의 왕이자, 세레나의 아버지인 하이 엘프 애프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연락을 보냈기 때문에 이렇게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넘겨라.”
슈펜의 지시에 병사들이 황금 관을 엘프들에게 넘겼다. 엘프들은 황금관을 가지고 애프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애프림은 관을 열어 안에 있는 자기 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보았다.
“내 딸을 이렇게 만든 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죽였습니다.”
나는 프로아 백작의 머리가 담긴 주머니를 애프림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초상화가 그려진 종이도 함께 넘겼다.
“하이 엘프의 피로 만든 영약을 만든 놈입니다. 현재 동북 방향의 스모나 숲 쪽으로 도주하고 있습니다. 그놈은 엘프의 몫으로 남겨놓았습니다.”
애프림이 근처에 있는 엘프에게 초상화를 넘기며 말했다.
“살아서 데려와라.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엘프가 고개를 숙이더니 몇몇 다른 엘프를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애프림은 다시 우리를 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오해가 생겼지만 잘 풀었고, 이번 일로 길로스 왕국과 엘프와의 관계가 더욱 개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지금의 우리에게 인간은 다 똑같아 보일 뿐이니. 다만 먼저 적대하여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애프림이 몸을 돌려, 다른 엘프들을 데리고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먼저 돌아가서 기다려라. 나는 잠깐 들릴 데가 있다.”
나는 같이 온 병사들에게 말을 하고, 세레나와 만나는 추억의 장소로 걸어갔다.
역시나 그곳에는 세레나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시련을 성공적으로 마치셨습니다.]
[히든 클리어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일반 티켓이 프리미엄 티켓으로 바뀝니다.]
[프리미엄 티켓을 습득하셨습니다.]
시련이 끝났다는 메시지와 함께 체펜의 몸에서 내 정신이 분리되었다.
내 눈에는 체펜의 모습이 온전히 들어왔다.
“어?”
자신의 몸을 되찾은 체펜이 자신의 손을 움직여보더니 놀란 눈으로 앞에 있는 세레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달려가 세레나를 품에 안았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끝이다.’
[귀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