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나 혼자 역대급 수련 078화
20장 넘어오시죠(6)
내 질문에 최정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주문한 음료를 마시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시간이 흐르고, 최정환의 다물어진 입이 떨어졌다.
“그래.”
바로 대답을 하지 않은 것에서 이미 짐작은 했다. 막상 최정환의 입으로 듣게 되니 조금 놀라웠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은 종종 드러나는 행각으로 인해 알 수 있었다.
이전에는 관심이 없어서 내 눈에 안 들어왔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의식을 하고 바라보니, 최근에 그런 모습들이 더욱 자주 보였다.
“다른 사람에겐 비밀이다.”
“아마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최정환의 말에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비밀로 해주고 싶지만, 길드 대표단에서는 이미 그 둘을 연인 사이로 보고 있었다. 겉으로 티를 안 냈을 뿐이다.
그나마 나는 델타가 누구일까라는 입장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선뜻 사귄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꽤나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의 최정환을 바라보며 나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소희 선배님 얼마나 믿을 수 있습니까.”
“무슨 소리지?”
충격에서 빠져나온 최정환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내 질문에 대한 요지를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음. 최정환 선배님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한소희 선배님을 배신할 수 있습니까?”
“아니.”
간결하고 빠른 대답이었다.
최정환의 표정은 최이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처럼 진지했다.
“동생을 위해서라도 말입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최정환은 최이수만큼이나 한소희를 생각하고 있었다. 가볍게 사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반대로. 한소희 선배님은 최정환 선배님을 배신할 것 같습니까?”
중요한 건 이 질문이다.
나는 한소희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겉모습만 보고는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정환은 달랐다.
함께해온 시간이 많았고, 심지어 사귀는 사이라고 했으니 한소희에 대해 훨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도 최정환의 대답은 빨랐다.
“아니.”
볼일은 끝났다.
저렇게 확신을 지어 얘기하니 더 이상 파고들어 질문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부정적인 질문을 던져도 긍정적인 답변만 나올 뿐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볼일은 끝났으니 저도 이제 들어가 보겠습니다.”
“잠깐.”
최정환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지?”
“지금 당장은 모르시는 게 좋습니다.”
어차피 길드 대표단 등록을 마치면 얘기할 생각이었다. 지금 얘기하게 되면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몰랐다.
최정환이 정말 내 말대로 움직이는 인형도 아니었고, 현재 방수찬에게 엄청난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지금 알려준다면 당장 방수찬에게 달려갈 것이다.
안 봐도 뻔했다.
‘죽이려 하겠지.’
최정환이 강하다고 하지만, 지금 방수찬을 상대하기는 조금 벅차 보였다.
방수찬도 엄연히 헌터였고, 아이리스 길드 내에서도 꽤나 상위 퍼센트에 포함되어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재능이 뛰어나도 이제 2년 차인 최정환이 어찌하기에는 실력 부분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방수찬이 방심을 하거나 천운이 따라 죽일 수 있다고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확률이었다.
“절 믿으세요. 조만간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다 마신 잔을 반납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최정환과 함께 병실로 향했다.
약을 먹이는 것만 확인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정말요?”
“그래. 정환이가 말을 다하더라고.”
병실 안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는 한소희였고, 약간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는 최이수였다.
아이의 목소리는 밝았고, 무엇보다 한소희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알고 지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대화도 섞여 있었다.
나는 병실 앞에 섰다. 문을 열지 않고 최정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은 밑에 있는 물품 보관소에 넣어놓겠습니다.”
최정환에게 약을 건네받은 나는 몸을 돌렸다. 내 뒤로 드르륵 소리와 함께 최정환이 병실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후에 그들의 분위기는 더욱 밝아졌다.
“후우…….”
약을 건네받은 것은 한소희에게 약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최정환은 그녀를 믿지만, 나는 아니었다.
최정환의 믿음은 확실하게 느꼈지만, 나는 정말 최악의 상황을 그리면서 움직였다.
한소희가 델타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머릿속 한구석에 담아놓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의 분위기를 보며, 괜한 생각을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설픈 것보다는 이게 나아.’
나는 1층으로 내려와 병원에 마련되어 있는 보관실에 약을 넣었다. 그리고 보관 번호와 비밀번호를 최정환에게 보냈다.
“어?”
그때,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아주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14팀이 호위를 맡았던 세븐 돌즈의 박영주였다.
“오랜만이네요.”
박영주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역시나 아름다운 외모는 그대로였다.
예전에 달고 다니던 근심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전보다 보기 좋았다.
박영주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여긴 무슨 일로?”
내가 병문안을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퇴원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랑 상담이 있어서요.”
“완치된 거 아니었습니까?”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간단하게 하는 상담이에요. 아파서라기보다는 마음을 단련시키는 과정이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중에서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정신력이 일반인보다 강하긴 하지만, 강한 만큼 큰 충격을 받을 일들이 많았다.
던전에서 동료를 잃거나,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한다거너, 던전 브레이크에서 가족을 잃었을 때 등 헌터들도 강한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한다. 나도 어릴 적에는 던전 브레이크 때문에 잠깐 다닌 적이 있었다.
‘이 시간에?’
이미 진료 시간은 끝이 나도 한참 전에 끝이 날 시간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도 진료를 합니까?”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어서 부탁드렸어요. 제 담당 의사 선생님이 워낙 친절하셔서 이 시간에 받을 수 있게 배려해 주셨죠.”
“혹시 담당의가 남잔가요?”
그렇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여자 선생님이세요.”
나는 괜한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돌리기 위해 다른 주제를 던졌다.
“요새 드라마에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이 사실은 내가 알아본 게 아니라 이찬혁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마 드라마가 방영된다면 내 옆에서 드라마 내용을 읊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맞아요.”
박영주가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무슨 역할입니까?”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악녀가 되어버린 여자요.”
“어렵네요.”
연애 경험도 드물고, 드라마도 보지 않은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캐릭터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악녀가 되어버린다니, 이찬혁이 감정 이입해서 나에게 다가와 징징거릴 모습이 상상되었다.
‘젠장.’
그때, 박영주의 매니저가 박영주를 데리러 왔다.
박영주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다음에 만나면 밥이라도 한 끼 해요.”
“저야 좋죠.”
나는 대답을 해주었고, 박영주와 매니저가 먼저 병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도 택시를 불러 숙소로 돌아갔다.
* * *
“도착했다.”
김찬익의 말에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차 오른쪽 창문으로 바깥 풍경이 보였다.
거대한 돔 형식의 홀이 보였다. 그 크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잠실야구장보다 컸다.
내가 타고 있는 차는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디 길드에서 오셨습니까?”
“아이리스입니다.”
“C-17 구역으로 가시면 됩니다.”
오늘은 길드 대항전의 전초라고 할 수 있는 길드 대표단 등록이 있는 날이었다.
길드 대항전 자체를 보면 그리 중요한 행사는 아니었다. 정말 최악의 실력을 가진 헌터가 아니라면 기본적인 테스트는 모두 통과했다.
들어오기 전 간간이 보였던 차들은 대부분 기자나 길드 관계자들이었다.
기자들은 좋은 소스를 찾기 위해.
길드 관계자들은 다른 길드의 파악을 위해.
“내리자.”
이지상의 말에 차 문을 열고 대표단이 내렸다. 최정환부터 시작해서, 김세아, 이찬혁, 박찬영, 김진수, 그리고 내가 차례대로 내렸다.
찰칵!
찰칵!
엄청난 플래시가 터지면서 기자들이 다가와 질문을 했다.
“이번 아이리스 길드의 목표는 어디입니까?”
“김세아 헌터 이번에 이진수 선수와 개인전에서 붙게 되면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저번에 그린나래 길드에 패배했는데 이번엔 이길 수 있습니까?”
그러나 대표단은 입을 다문 채 돔 형식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강한수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자신의 입맛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냥 아무런 대답도 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오늘 있을 대표단 등록에만 신경 쓰면 됐다.
“자세한 얘기는 대표단 등록이 끝난 뒤에 답변 드리겠습니다.”
이지상이 뒤에서 기자들을 막으며, 시선을 주목시켰다. 그 틈을 타 대표단은 무사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길드 관계자가 안에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아이리스 길드입니다.”
“7층 705호 대기실로 가시면 됩니다.”
대표단은 김찬익을 따라 앞에 보이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김세아가 오르자 삐-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김세아가 뒤로 물러서고, 나는 김찬익을 보며 말했다.
“저흰 나중에 타겠습니다.”
“그래.”
일행이 먼저 올라가고, 나와 김세아는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입구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들어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였다. 대표 등록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들어올 수 없는 기자들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진수 헌터! 이번 길드 대항전 목표는 어딥니까”
“그린나래는 이번에도 우승할 수 있습니까?”
“견제하는 길드는 어딥니까?”
기자들의 중심에는 이진수가 서 있었다.
큰 키와 잘생긴 외모.
넓은 어깨와 단단한 근육.
그가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주위에 다른 대표단도 있었지만, 시선은 이진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남을 빨아들이는 듯한 아우라가 퍼져 나왔다.
그의 얼굴에서는 자신감이 가득했고, 결코 그것이 오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진수를 보필하듯 대표단 감독이 옆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이진수가 멈춰 서자, 대표단 감독도 같이 멈췄다.
이진수는 기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 목표는…… 당연히 우승입니다.”
찰칵! 찰칵!
다시 터지는 플래시와 함께 감독이 이진수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질답 시간은 대표단 등록 후에 따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린나래 대표단이 관계자를 만나 자신의 대기실 위치를 듣고 있었다.
띠링.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내렸다.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나와 김세아가 엘리베이터 안에 탔다.
문이 닫히려고 할 때, 누군가가 우리가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 때문에 닫히려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이진수였다.
이진수가 우리를 보며 웃었다. 정확히는 김세아를 쳐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진수가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오랜만이다?”
“그래.”
“이번엔 도망가지 말고 잘해봐.”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는지 김세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전에도 분위기가 안 좋은 것은 알았지만 잘 이겨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에휴.’
나는 슬쩍 김세아의 앞으로 이동했다.
딸깍!
나는 엘리베이터 닫는 버튼을 눌렀다. 김세아라면 했을 말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리고 이진수가 지었던 비릿한 미소를 똑같이 지어주며 말했다.
“너나 잘해.”
이번 길드 대항전엔 내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