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235화>
서약 강탈 (3)
“거참…… 헤라 덕분에 살았네.”
헤라가 나 대신 죽어 주다니.
10분 전만 해도 나를 표독스럽게 쳐다보던 헤라였는데.
관리자 권한이 뭐라고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변하냐?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서약의 글자.
붉은색으로 변한 글자는 한 번 번쩍이다가, 허공에서 스르르 빛을 잃고 사라졌다.
[크으으윽……!]
서약의 페널티가 제대로 발동하는 건가?
급격히 약해지는 제우스의 번개.
화성을 뒤덮던 흑뢰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영혼신……! 네놈만은 꼭 죽여 주마. 감히 헤라를!]
“니가 죽여 놓고 왜 나한테 지랄이냐?”
[헤라를…… 헤라를!]
점차 사라지는 흑뢰.
나를 공격할 생각을 하지는 않은 채, 그저 헤라의 이름만을 부르짖는 제우스.
아니, 언제부터 그렇게 조강지처를 챙겼다고 저러고 있어.
[영혼신…… 이 일, 절대 잊지 않으마. 내 꼭 너의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
그러더니 착 가라앉은 음성을 끝으로 사라지는 제우스의 번개.
“왜? 지금 죽이지 그래?”
[…….]
“힘 딸리냐?”
내 도발에 답하지 않고, 사라지는 흑뢰.
그와 동시에 화성을 뒤덮던 제우스의 힘이 사라짐을 느꼈다.
“서약이 제대로 발동되는 건가.”
올림푸스의 서약.
한 신계 모든 신의 운명이 담긴 만큼 페널티가 어마어마했다.
관리자 모드에서 본 바로는, 이게 제대로 발동할 시 제우스가 받는 페널티는 바로 ‘소멸’.
하지만 그건 대신 제우스일 때나 받는 페널티니, 소멸까지는 아니겠지.
어쨌든, 나도 목적을 이뤘으니 이제 그만 화성에서 나와야겠군.
신들의 봉인석을 챙겨 두려고 하니, 헤파이스토스의 음성이 들렸다.
[어머님이…… 어머님이 이렇게 가시다니…….]
넋을 놓고 있군.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좀 미안하기는 하다.
[영혼신. 어떻게 어머니를 다시 살릴 방법은…… 없는가? 하.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건 무리야. 제우스 공격이 너무 셌거든.”
헤라의 영혼 조각이라도 있으면 좀 챙겨 두기라도 할 텐데…….
제우스의 공격이 워낙 거세서 그런지 먼지만큼도 남지 않았다.
관리자 공간에서도…….
-여신 ‘헤라’, 완전히 소멸했습니다.
완전히 사라졌음을 알려 주고 있었고.
[영혼신. 네놈. 네놈만큼은 용서하지 못한다……!]
[하. 한심하긴. 제우스가 죽이는 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당신 멍청한 건 알고 있었지만, 눈도 없는 줄은 몰랐네. 누가 헤라를 죽였는데?]
[빠져라. 너는.]
[거기에 뭐. 영혼신이 헤라를 없앤 거라고 해도, 그게 뭐가 잘못이야? 헤라 그 여자는 제우스랑 자기만 살려고 했는데. 올림푸스의 신들에게 사기를 친 거잖아! 네 어미는 친자식도 버린 거야!]
[헤라 님, 아니 헤라는 저희를 배신한 겁니다. 거기에 그녀는 결국 제우스에게 죽은 셈. 영혼신을 탓할 일은 아니에요.]
헤파이스토스가 내게 원망을 드러내자, 이를 질타하는 아프로디테.
아테나도 냉정하게 말한다.
[나는…… 믿을 수 없다!]
[같은 걸 보고 들었는데도 밈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멍청하단 소리를 듣는 거지.]
한창 말다툼을 시작하는 헤파이스토스와 아프로디테.
“시끄럽네. 시끄러워. 일단 돌아간다.”
봉인석을 챙겨서 정령계로 돌아간다.
아버지가 한참 조성하고 있는 공원에서 봉인석을 내려놓으니, 아테나가 나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올림푸스의 서약이 어떻게 발동되는지를 봐야지.”
[그렇다면…… 제우스의 흔적이 다 사라지면, 저희 봉인된 대신도 활용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하는 아테나.
[올림푸스의 서약이 제대로 발동되었으니, 아무리 제우스라고 해도 꽤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저희 올림푸스 대신에게서 제우스의 힘이 다 빠진다면…… 저희도 영혼신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테나. 무슨 소리를! 어떻게 영혼신과 협력을 할 수가!]
[그럼 당신은 봉인석에 평생 갇혀 계세요. 헤파이스토스.]
“그러니까 결국 풀어 달라는 거지?”
올림푸스의 대신의 봉인석.
제우스의 힘은 이제 잘 느껴지지는 않지만…….
벌써 풀어 주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풀어 준다 한들 별 활용도도 없고 말이야.
“일단 제우스의 힘이 다 빠지면, 그러도록 하지. 아직은 그의 힘이 남아 있을 수도 있거든.”
[감사합니다.]
“거기에 제우스를 없애기 전까지는 사도 계약도 해야겠어. 최소한의 보험이라고 생각해.”
[사도…… 예.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요.]
순순히 수긍하는 아테나.
다른 대신들도 다들 동의하는 것 같다.
침묵을 지키는 디오니소스나 난동피우는 헤파이스토스를 제외하고는.
“일단 여기 있어.”
올림푸스의 대신…….
사실 전력상으로는 쓸모는 없다.
SSS급 몇이 지금 추가된다고 해도, 제우스와 나의 전투에 끼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하니까.
올림푸스의 서약이 발동된 이상, 더 이상 얻을 정보도 없을 것 같고.
나중에 시킬 일이 생기면 그때 풀어 주지 뭐.
“제우스의 힘, 줄었을까?”
정원 한편에 봉인석을 두고 나오며, 지구의 동태를 살폈다.
화성을 순식간에 장악하던 제우스의 힘.
지금의 내 본체가 죽기 직전이었는데, 코앞에서 철수했지.
서약의 영향이 없었으면,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존재가 눈앞에 있는데 그렇게 빼지는 않았을 터.
그래서 지구에서의 힘도 약해지지 않았을까 기대했는데…….
상황은 내 예상과 완전히 정반대였다.
짙은 어둠이 무분별하게 확장해 나간다.
그리스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한 어둠.
인간을 천만씩 학살하면서, 서서히 퍼지던 어둠은 지금 마구잡이로 뻗어 가고 있었다.
어둠에 닿자마자 그대로 죽어 영혼이 빨리는 사람들.
내가 심어 둔 가짜 영혼이 계속 제우스의 파악되지 않는 거대 영체 안으로 들어선다.
그 속에선…….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오직 죽음만이 들린다.
제우스에게 흡수된 영혼이 완전히 분해되며, SP로 만들어지는 와중에도.
그 SP가 그의 끝 모를 거대한 영체를 채우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죽음을 고하는 소리만이 영혼에 각인된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어느덧 흡수되는 영혼의 숫자는 수억이 넘어갔다.
서로는 이탈리아. 동으로는 사우디까지.
제우스의 어둠은 재앙처럼 번져 갔다.
“이 자식, 왜 이렇게 빨라!?”
지구 본체가 분신을 찍어 내서 파견을 보냈다.
또다시 수십만 김지호가 중동과 유럽으로 이동했다.
힘이 강화된 덕에,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분신들.
“엉망진창이네.”
예전에 봤던 제우스의 어둠은 질서정연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무질서하다.
예전에는 단면이 잘 빠져 있었다면, 지금은 울퉁불퉁한 어둠이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느낌.
힘을 통제하지 않고 마구 뿌리는 것 같았다.
“아스트라페.”
가볍게 견제 겸 제우스의 번개를 쏘았다.
수십만의 김지호가 일제히 내뿜는 벼락.
지지지직.
“호오?”
예전과는 다르게, 추방의 권능이 발동되지 않았다.
아스트라페 수십만 발이 일제히 어둠 속으로 뻗어 나갔다.
서약 발동으로 힘이 빠진 건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번개를 계속 뿌려 본다.
꾸물. 꾸물.
얼마나 뻗어 나갔을까.
뭔가 물컹한 것에, 아스트라페가 막혔다.
막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스펀지처럼 흡수당하는 뇌신의 벼락.
흡수 속도가 워낙 빨라서, 이대로라면 분신마저도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아스트라페 끊어!”
분신에게 그리 명하지만, 이미 늦은 상태.
백색의 뇌전을 타고, 역으로 검은 기운이 흘러온다.
이거, 늦었다. 흑뢰가 닿기 전에…….
“자폭해!”
분신을 일제히 폭파시킨다.
잡아먹히면 큰일 날 거 같거든.
흑뢰가 완전히 닿기 전, 일제히 폭발하는 내 분신.
폭발력에 제우스의 어둠이 살짝 걷히나 싶더니…….
[죽어라. 죽어라…… 영혼신? 영혼신! 잡아. 먹어라. 산채로 집어삼켜, 영원히 지옥을 보여 주마!]
더 미친 듯이 뻗어 나가는 제우스의 어둠.
와.
이건 도저히 못 막겠는데?
몇 번이고 분신을 보냈지만, 속수무책이다.
그렇다고 지구의 본체를 보냈다가는, 재수 없다가는 먹혀 버려서 제우스의 힘만 더할 위험이 크고…….
어느덧 동으로는 히말라야까지 뻗고, 서쪽으로는 영국과 스페인까지 집어삼킨 어둠.
수십억 인구를 집어삼키자, 그때서야 움직임을 멈춘다.
“와…… 작정하니 너무 강한데.”
올림푸스의 서약이 발동했는데도 저 정도야?
저걸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아 머리를 벅벅 긁었다.
시간을 좀 번 줄 알았더니, 어째 행동이 더 빨라졌네.
어떻게 타개해야 하지?
[더 빨리 나아가야 한다.]
그때, 제우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까지 들렸던 사념 같은 소리와는 완전히 상반된, 냉정한 느낌.
이거…….
“위혼에서 오는 거군.”
내가 지구인의 영혼을 보관하고, 대신 심어 두었던 가짜 혼.
처음에는 조심스레 흡수하던 제우스였으나, 올림푸스의 서약 발동 이후 그는 앞뒤 보지 않고 영혼을 빨아들이는 데에만 집중했다.
워낙 많은 영혼이 빨린 탓일까.
처음에는 제우스에 대해 아무것도 파악하질 못했는데…….
이제는 미약하게나마 느껴진다.
생각의 편린이 읽힌다.
[헤라…….]
분노. 후회. 회한. 자책.
수많은 감정이 제우스의 속에서 교차했다.
아니, 자신을 따르던 올림푸스 신들도 뒤통수치던 놈이 왜 이래?
[내가 너를…… 죽이다니…….]
녀석이 영체를 소화 흡수하는 동안, 나도 그를 계속해서 파악한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생각할 것이지, 자꾸 헤라를 떠올리는 제우스.
이 반응, 좀 뜻밖이었다.
천공의 신 제우스.
신들의 왕인 그에게는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난봉꾼.
미인이라면 신이고 인간이고 가릴 것 없이 덮치고, 어쩔 땐 여자가 아닌 소년마저도 탐한다.
그 행동에는 분명 명분은 있었다.
거인들의 침입, 기간토마키아를 방지하기 위한다는 명분.
제우스의 씨를 뿌려, 영웅들을 양산해야 올림푸스의 멸망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명분일 뿐.
제우스는 난봉꾼 그 자체였고, 그의 아내인 헤라는 평생을 제우스의 바람을 지켜보며 살았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헤라의 이미지는 바가지 긁는 마누라의 전형, 그 자체.
헤라클레스도 제우스의 사생아라며 평생을 괴롭히지 않았던가.
그리스 영웅들의 스토리에서 어찌 보면 악당 역할을 하던 헤라.
표독스런 조강지처의 이미지였는데…….
뭐, 실물은 여신답게 예쁘긴 했지만.
[너만은, 살리려고 했다.]
제우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헤라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녀를 가장 아름답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자식. 제 눈에 가장 예뻐서, 마누라로 삼았군.”
신들의 왕이 된 제우스가 반려로 삼은 이가 헤라다.
수많은 미의 여신들이 있었음에도, 헤라가 처음에 바람둥이는 싫다며 거부했음에도 계속되는 구애로 부인을 삼았지.
[널 이렇게 잃다니…….]
제우스의 상실감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짙게 깔린 허무와 자책.
수많은 감정이 어지러이 다가왔다가 나간다.
얼마나 실의에 빠졌을까.
[이렇게 된 것도 운명이라면…… 그래. 나는 독존하겠다. 절대신으로서.]
제우스의 의지가 다시 피어오른다.
절대신으로서 완전히 홀로 서겠다고.
의지를 다시 다잡는 것이 느껴졌다.
마누라 상실로 실의에 좀 빠지나 싶더니, 금방 회복하는군.
아까의 감정은 완전히 사라진 채, 야망과 결의가 느껴진다.
이 자식.
진짜 절대신에 모든 걸 걸었구나.
[SP가 서약 집행으로 인해 계속 빠져나갈 터. 그전에 지구를 장악해야 한다.]
[영혼신을 찾아내서, 갈기갈기 찢어야 한다. 어디에 숨었나 보지만…… 상관없다.]
나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는 제우스.
모든 게 읽히진 않는다.
그가 품은 생각의 일부분만이 드러날 뿐이다.
[이 속도라면…… …… 시간이면…….]
[확장은 일단 자제…….]
[지구부터…….]
하지만 그런 일부분만으로도, 그의 계획을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페널티…… SP가 부족…….]
[혼돈…… 관망.]
[인간을 모두…….]
페널티 덕에 SP가 부족하고, 혼돈에서는 SP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건가?
그래서 인간을 빨리 집어삼키려고 하는군.
흡수된 SP가 제우스의 어둠 외곽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그의 목소리가 점차 들리지 않게 됐다.
이 정도 정보로 만족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지구와 융합한다.]
[그리하여 지구를, 목성형으로 뒤바꾼다.]
[그러면 끝.]
[영혼신이 어디에 있든, 끄집어낼 수 있으리라.]
혼돈의 마지막 권능, 융합.
융합에 대한 의지가 완전히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