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233화>
서약 강탈 (1)
분신 수십만.
전 우주를 떠돌던 것에 비하면, 지구보다 작은 화성을 탐색하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여기가 알려 준 장소다.”
화성 전역을 뒤지던 내 분신.
곧 특정 장소를 찾아냈다.
“금방이네.”
태양계를 정찰할 때, 화성도 살펴보긴 했었는데…….
알고 찾는 거랑, 모르고 찾는 거랑은 확실히 큰 차이가 있어.
올림푸스 대신들의 영혼석을 들고, 화성으로 갔다.
“여긴가.”
별 특이할 데가 없는 지형.
올림푸스 산이라고 불리는 화성 최대의 산도 아니고, 그냥 평평한 붉은 황무지다.
관리자 시스템이 찍어 주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지형.
“아스트라페.”
하나 아스트라페를 소환하자, 느낌이 다르다.
땅속 깊은 곳에서, SP가 느껴진다.
원래는 SP가 없어야 정상인 화성.
땅바닥에서, 미세한 SP가 느껴진다.
“흩어져서, 결계를 쳐. 소울 배리어로 물샐틈없이.”
“알겠다.”
이 영역에 소울 배리어를 크게 치라 명하고, 혼자 땅속으로 들어갔다.
SP가 흘러나오는 쪽을 향해 따라가다 보니, 곧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지지지직.
공동의 입구는 새하얀 전기가 그물망처럼 깔려 있었다.
힘으로 뚫고 갈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아스트라페.”
제우스의 번개를 가져다 대자, 전기망이 스르르 사라진다.
마치 열쇠를 가져다 댄 것처럼.
그렇게 열린 공동을 뚜벅뚜벅 걸어가니, 쇠사슬로 묶인 관이 선 채로 있었다.
“헤파이스토스. 저 관과 사슬은 네 작품인가보군.”
[크윽…… 여길 어떻게…….]
“저 관의 키도 아스트라페겠지?”
지지지지직.
제우스의 번개를 쏘자…….
철컥. 철컥.
툭.
쇠사슬이 저절로 풀리며,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흠흠.
그러면 일단 제우스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맞춰 두고…….
언어를 뛰어넘은 신언神言을 발한다.
“깨어나라. 헤라.”
드르르르.
그러자 관이 열리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관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것은 예전에 영상으로 본적이 있는 헤라.
살결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붕대로 꽁꽁 동여맨 그녀.
양쪽 눈마저도 붕대로 꽁꽁 싸매서, 코와 입만 보인다.
“드디어 봉인이 풀리다니…… 제우스. 승리했나요?”
대신이라면 그깟 붕대, 아무 제약 없이 앞을 볼 수 있을 터인데.
붕대 재질이 특수한 건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헤라.
자기 발로 나와 주니 좋네.
“소울 배리어.”
밖에서 내 분신들이 친 소울 배리어에, 내 것을 더한다.
이 정도면 대신급은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겠지.
“소울 배리어?”
[어…… 어머님. 살아 계셨군요.]
“이 목소리는…… 아레스구나.”
아레스의 음성에 반가워하는 헤라.
소울 배리어도 깔았으니, 이제 더 이상 제우스인 척 할 필요는 없겠지.
만능 키 역할을 했던 아스트라페를 붕대에 쏜다.
화르르르.
순식간에 새하얀 불꽃에 타오르는 붕대.
나는 눈 부위 쪽에 맞췄는데, 불꽃은 헤라의 몸을 감싼 붕대까지 모두 집어삼켰다.
몸매 좋네.
거기에 완벽한 이목구비에 눈이 드러나니 여신의 미모가 완성되었다.
“당신…… 누구지? 제우스는?”
기쁜 표정을 짓다가, 날 바라보자 표정이 대번에 굳는 헤라.
“나는 영혼신. 제우스의 적이지.”
“영혼신……?”
“나 몰라?”
“영혼신이 다시 나오다니…… 지구 출신인가?”
호오. 날 모르는 거 같네.
예전에 하급 각성자였을 때, 헤라가 방해해서 보상 적게 받았던 거 같은데.
그때의 헤라는 진짜가 아니었나?
크툴루가 위혼에 대해 알려 줄 때.
신도 위혼으로 만들 수 있냐고 물어보니까 대답할 수 없다고 그랬지.
그게 그녀와 관련되어 있는 거 같군.
“헤라. 제우스는 올림푸스를 버렸다.”
“…….”
“헤르메스는 죽었고, 수많은 신들도 제우스에게 융합당하고 있었지. 녀석은 그에 따른 페널티를 충분히 받아야 함에도, 그러지 않았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당신은 올림푸스의 나머지 신들을 대표해서, 제우스와 서약을 맺었다고 들었다. 그 서약, 제대로 작동되는 건가?”
“……당연히 그렇지.”
태연하게 대답하는 헤라.
표정 관리는 잘하네.
나는 그녀 앞에 헤파이스토스와 아레스의 봉인석을 던졌다.
퉁. 퉁.
“당신의 아들들이다. 헤파이스토스와 아레스의 봉인석이지.”
“…….”
“제우스는 그들을 버렸다. 헤파이스토스는 진작에 먹어치웠고, 아레스도 장기말에 불과했지.”
[어머니…… 저자의 말, 듣지 마십시오.]
헤파이스토스가 분노한 기색으로 말한다.
뭐, 그렇게 고문을 가했으니 오죽할까.
그에 반해 아레스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대신이 봉인되었지.”
[헤라 님. 헤라 님! 제우스는 저희까지도 모두 파멸시키려고 해요.]
[제우스는 올림푸스도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를 모두 쓸어버리고, 완전한 천지창조를 하려 합니다.]
아프로디테와 데메테르가 헤라를 설득한다.
그에 반해 아테나는 조용한 상태.
군신들은 조용하군 그래.
“영혼신. 목적이 뭐지?”
“서약을 발동해라. 제대로.”
“서약은 발동된 상태야.”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고 이야기하는 헤라.
예전이라면 긴가민가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헤라.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SP가 많지 않군. 193,471이라.”
“……뭐!?”
“재미있는 스킬도 참 많이 보유하고 있어. 가정의 여신이면서 뭐 이리 매혹 스킬이 많은지 모르겠네. 거기에…… 진·카마수트라? 극한의 밤? 이런 스킬도 있냐. 이거 나도 가르쳐 줘 봐.”
“다…… 당신. 뭘 보는 거야?”
“여신 헤라의 상태창이지. 흐음…… 뭐 이리 남자 꼬드기는 스킬이 많아? 제우스가 정처로 삼을 만큼 얼굴, 몸매는 다 되는데…… 바람기를 잡으려고 한 건가?”
내가 그러며 헤라를 쓱 훑어보자 그녀가 바로 옷을 생성하며 팔로 가슴을 가린다.
거참…… 반응이 격렬하시네.
이러니 내가 변태 같잖아.
외모가 내 취향이긴 하지만, 유부녀는 관심 없다고.
“뭐, 뭘 하려고 하는 것이냐……!?”
“헤파이스토스. 영혼 변형시키는 거, 어땠냐?”
[큭…… 그걸 설마 어머님께도 할 생각인가?]
“그녀의 영혼 속에 각인된 제우스를 나로 바꾸면, 꽤 재미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안 그래?”
[네놈……!]
휙!
헤라의 영체가 빛으로 변한다.
공간 위쪽으로 날아가려는 그 빛.
어쭈. 완전히 튄다, 이거지?
절대 협조할 생각이 없군.
그렇다면…….
위이이잉.
소울 배리어에 바늘 같은 구멍을 일부러 뚫어 준다.
점이나 같은 크기.
헤라의 영체가 통과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다.
하지만, 빛 한 줄기가 통과하기엔 충분한 공간이기도 하다.
쾅!
헤라의 신형은 소울 배리어에 막혀, 맥없이 떨어졌다.
그 폭발 가운데서, 미약한 빛줄기는 구멍을 통해 빠져나갔다.
-지금의 빛, 열어 줘라.
밖에 있는 분신에게 명령하고, 태연스럽게 헤라에게 다가간다.
낭패한 표정으로 땅바닥에 누운 헤라.
“윽…….”
“SP도 없는데 무리하지 마세요. 아줌마.”
“누가 아줌마……!”
“아들을 몇을 낳았는데 당연히 아줌마 아니야? 당신, 서약을 대행했으면 지켜야지 왜 발동을 안 하고 계속 봉인 중이야?”
“……봉인이라니!”
올림푸스 신들의 봉인석이 주변에 있어서 그런가.
바로 발뺌에 들어가는 헤라.
하지만 그녀의 상태창은 이미 나에게 샅샅이 보이는 상태다.
그래.
관리자 시스템에 의해서.
-대신 ‘헤라’를 찾아 달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여기 있습니다.
내 앞에 떨어지는 헤라의 상태창.
-그런 하찮은 신을 뭐 하러 찾으십니까?
나에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관리자 시스템이 묻는다.
관리자 공간에 있어서 그런지, 대신도 그냥 하찮아 보이는 정돈가 보다.
“그녀를 찾으면, 제우스를 엿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어서.”
-그렇습니까. 제우스 정도야 당신에게는 그저 거쳐 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지금은 귀찮게 발톱 막고 있잖아. 새꺄. 관리자 권한이나 좀 공짜로 주고 그리 말해라.”
-그것은 저에게 허락되지 않은 권한입니다.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말이 많아.
녀석이 던져 준 헤라의 상태창.
[대신 헤라]
[봉인중]
상태가 특이하게도 봉인 중이었다.
“헤라가 봉인 중이라. 위치도 알 수 있어?”
-그것은 저에게 허락된 권한입니다.
“그나마 쓸모가 있네. 어디에 있는데?”
-화성입니다.
화성이라.
봉인 상태에 대해 의문을 담으며, 그녀의 능력치와 스킬을 살핀다.
가정의 여신답게 딱히 전투형 스킬은 많지 않던 헤라.
“뭐 이리 밤 스킬이 많아.”
S급부터 F급까지.
등급을 가리지 않고 스킬창의 반을 차지하는 방중술 스킬.
부부 관계를 참 즐기거나, 아니면 화목하지 않나 보네.
그런 생각을 하며 온갖 밤 스킬을 쭉쭉 넘기다 보니, 내가 원하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올림푸스의 서약]
[봉인중]
[올림푸스의 주신, 제우스가 올림푸스의 모든 신과 맺은 서약. 올림푸스의 신은 제우스의 창조주 승급을 돕고, 제우스는 올림푸스 신의 완전한 영생을 후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서약 내용, 자세히 볼 수 없어?”
[관리자 권한을 사용할 시 가능합니다.]
“아니, 니 말대로 하찮은 대신 급에 관리자 권한을 써야 한다고?”
제우스 견제에 써야지.
헤라한테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
그런 나에게 관리자 시스템은 설명을 덧붙였다.
[관리자 권한을 사용하면, ‘하찮은’ 대신의 모든 수치를 바꿀 수 있습니다.]
“흠…… 그래?”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군.
헤라가 제우스에게 있어서 중요한 키포인트면…….
쓸 만할 수도 있겠어.
실험을 해 봐야지…….
“헤라. 네가 서약을 제대로 이행했다면, 지금 올림푸스의 대신들이 이 꼴이 되지는 않았겠지.”
[어머님. 저자의 말, 듣지 마십시오!]
[헤라님. 설마 저희를 속이신 겁니까? 헤르메스는 완전히 소멸했어요……!]
헤르메스의 소멸에 잠시 입술을 깨물던 헤라.
곧, 냉정한 얼굴로 돌아온다.
“봉인이라니. 지금 올림푸스의 서약은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헤라 님……!]
아프로디테의 호소도 그냥 무시하는 헤라.
서약은 이행되고 있다는 거로 밀고 나갈 생각인가.
“서약을 이행하면 10조 SP를 주지.”
“10…… 조요?”
“그래. 거기에 매년 10조씩 더 주지. 새로운 올림푸스 건설도 허락하겠어. 당신을 주신으로 삼아서.”
“…….”
“당신이 제우스에게 뭐 그리 의리를 지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올림푸스도 버렸어. 조강지처는 못 버릴 거 같아?”
“……서약은, 이행되고 있어요.”
10조 SP에 잠시 흔들리나 싶더니,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헤라.
지조 있군그래.
말로는 더 이상 설득이 될 거 같지 않고…….
“그럼 어쩔 수 없네. 영혼 변형부터 가 볼까?”
[여…… 영혼신. 그러지 마라. 어머님께 하느니, 차라리 나에게 해라!]
“으이구, 이 자식아. 니 엄마가 서약을 이행 안 했다는 건 널 버렸다는 거야. 그런데도 옹호가 되냐?”
[으으……! 상관없다……! 차라리 나에게 해라!]
“너는 그럴 가치도 없어.”
헤파이스토스의 요구를 일축하며, 영혼 변형을 할 준비를 마친다.
헤라는 이미 각오했는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이거 뭐 완전 악당인데.
물론 상대는 벌써 이천만을 학살한 제우스의 협력자지만 말이야.
[영---혼---신.]
영혼 변형을 시도하려고 한 그 대.
화성 전체에 분노에 가득찬 음성이 들린다.
제우스다.
콰르르르르르르.
화성의 대지에 검은 번개가 일제히 내리친다.
“크윽……!”
분신이 생성한 소울 배리어가 그대로 찢긴다.
그와 동시에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가는 분신.
분노한 제우스의 흑뢰를 모두 견디질 못한다.
제우스의 권능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고, 나의 힘은 늘었다.
근데도 소울 배리어가 버티질 못했다.
평소보다, 제우스가 힘을 많이 낸다는 뜻.
그만큼 마음이 조급해졌다는 증거다.
[감히 헤라를……! 여기서 완전히 지워 주마!]
분노한 음성이 매우 폭급하다.
그 음성을 듣자, 헤라는 눈을 뜨고 나에게 고개를 치켜세운다.
기세가 아주 등등하다.
“영혼신도 별것 아니네.”
“큭. 어떻게 했지!?”
낭패한 듯, 가볍게 맞장구를 쳐준다.
아. 발성 에러네. 이건.
한데 이런 내 생각과는 달리…….
발연기가 티가 나는데도, 이미 신나서 웃는 헤라.
“호호호. 아까 날 완전히 막은 줄 알았지? 빈틈이 있었어. 네 그 잘난 배리어에.”
“큭…… 그렇군!”
“빨리 도망가는 게 어때?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신난 기색을 보이며 이야기를 이어 가는 헤라.
그녀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러려고.”
“그래도 눈치는 있네.”
“네 서약은 빼앗고 말이야.”
제우스가 이렇게 바로 튀어나오다니.
헤라, 네 가치가 뛰어나다는 걸 증명했구나.
“관리자 권한. 실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