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220화>
봉인석 (4)
동화.
이게 세 번째 권능인가.
이제 두 개만 남았군.
동화에 대해 내성이 생겨서 그런가.
봉인석 색이 변하는 속도가 훨씬 삘라졌다.
[어…… 이제 아프지 않아?]
아프로디테가 신음을 멈춘다.
[크…… 크윽…….]
그에 반해 디오니소스는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상황.
둘의 차이, 어디서 기인한 거지?
흠. 혹시…….
“아프로디테. 당신도 자발적으로 제우스에게 협조했나?”
그러자 바로 쯧 하며 혀를 차는 아프로디테.
[하. 자발적? 자발적은 무슨…….]
“서약 때문에 제우스가 강제적으로 봉인시키진 못했을 텐데?”
[물론, 강제로 끌고 가서 날 흡수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분위기를 완벽하게 조성해서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었어요.]
“그럼 거의 강요로 인해 봉인이 된 거나 다름없겠군.”
[그래요. 올림푸스의 영광은 무슨…….]
자발적으로 협조하던 디오니소스와는 반대의 경우.
거의 반강제적으로 제우스에게 흡수당했겠지.
자의냐, 타의냐의 차이에 따라 한 명은 고통을 느끼고, 한 명은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 건가.
[근데, 당신은 누구죠?]
“올림푸스의 적.”
[아…… 영혼신인가요?]
“그래.”
내가 긍정하자 말이 없어지는 아프로디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녀를 놔두고, 봉인석 정화를 지속한다.
동화에 대한 내성이 생긴 후, 빠르게 진행되는 정화.
소모 SP도 대폭 줄어든 상태다.
디오니소스의 봉인석은 85%에서 더디게 오르더니, 90%쯤 되니까 완전히 정화가 멈춰진 상태.
아프로디테의 것은 꾸준히 속도를 유지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완전히 푸르게 변했다.
[신기하군요. 당신, 예전에는 이렇게 강하지 않았는데…….]
“날 본 적이 있나?”
[후후. 당신의 여자였던 엘프의 몸에 잠시 머물렀었죠.]
“디아나의 몸에? 아. 날 꼬드기던 게 당신이었나.”
디아나가 갑자기 육탄 공격을 하던 때도 있었지.
꽤 당황했는데…….
나보고 고자 아니냐고 하지 않았나, 이 여자?
[역시 영혼 계열 클래스는 다르군요.]
“그런 셈이지.”
[제가 당신에게 잡혀 올 정도면…… 올림푸스는 어떻게 된 거죠? 제우스는요?]
디오니소스와는 달리, 계속 꼬치꼬치 캐묻는 아프로디테.
근데 목소리가 워낙 매력적이어서, 그다지 귀찮다는 느낌이 나진 않았다.
오히려 남자라면 대답을 해 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 지경.
미의 여신의 권능인가?
봉인석에 갇혀서 별 힘도 없을 텐데…….
“올림푸스는 다 부쉈지. 아직 제우스는 남았지만.”
[제우스는 아직 건재한가요?]
“어. 그만하면 궁금증은 풀렸나?”
[예…… 더는 물어보는 건 실례일 것 같군요. 친절한 답변, 감사드려요.]
“그럼 이제 이쪽 차롄데.”
[정보가 필요하신가요?]
협조적으로 나오는 아프로디테.
디오니소스 때랑은 완전히 다르군.
[사실, 저는 제우스에게 이른 시기에 갇혀서 그다지 쓸 만한 정보는 없답니다.]
“그래? 실망스럽군.”
[다만, 제우스는 종종 이상한 술을 먹이고, 저를 탐했지요. 영체 상태인 저의 정신을 갉아먹을 정도로 중독성이 강했던 술…….]
“디오니소스가 만든 건가.”
[역시 그가 만든 건가요?]
디오니소스에게서 조금 전 들었던 이야기를 간략히 해 주자, 그럴 줄 알았다는 아프로디테.
[역시, 그 음침한 놈이 벌인 짓인 줄 알았어요.]
[크…… 크큭…… 술을 달라며 스스로 가랑이를 벌리는 탕녀가.]
[갇혀서 심심한데 그걸로 시간을 보내야죠. 호호.]
디오니소스의 말을 가볍게 넘긴 아프로디테.
그러더니 나에게 말한다.
[영혼신. 제우스한테 안겨 아양을 떠니까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오호. 뭔데?”
[절 살려 주신다고 약속만 해 주신다면…… 뭐든지 다 말씀드리겠어요.]
“그래. 말해 봐. 난 딱히 제우스 빼고 나머지를 적대할 생각은 없어. 정보가 괜찮으면 SP도 좀 주도록 하지.”
[어머. 통도 크고 자비로우셔라. 제우스와는 너무도 딴판이군요.]
목소리가 더욱 간드러지는 아프로디테.
돌멩이에서 나는 목소리치고는 너무 섹시하네.
[이렇게 허락해 주시니, 저도 제가 알아낸 정보를 바로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더 재지 않고 바로 말하네.
좋은 자세야.
[제우스는…… 하데스 이야기를 했어요. 하데스가 결국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실컷 비웃었죠.]
목소리를 낮게 깔면서 비밀 이야기하듯 말하는 아프로디테.
만약 사전 지식이 없었다면 놀랐겠지만…….
이건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는 사안이니 SP 주긴 그렇군.
“그건 알고 있어. 그 녀석. 혼돈 쪽으로 귀의한 거 같거든. 그가 쓰는 힘, 혼돈의 신기에서 나오는 거고 말이야.”
[아……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응. 그거 말고 딴 건 없어?”
[음…… 제가 언제까지 가둬 둘 거냐고 하니까, 몇 개월만 참으라고 했어요. 이제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이 정보는 쓸 만하군. 기간을 알려 주는 거니까.
제약에서 벗어난다는 건, 시스템의 SP 제한을 무력화한다는 이야기겠지.
올림푸스를 완전히 파괴하고, 영혼석을 모조리 빼 와 녀석의 보급을 틀어막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SP 제한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 혼돈이 그를 돕는 상황이라면.
내가 올림푸스를 털었다지만, 일단 아프로디테가 들은 기한이 맞다고 생각하고 계획을 짜야겠어.
“그 이야기를 들은 게 언제지?”
[3주 전에 들었어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건가…….”
몇 개월이라니.
제우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면, 이길 수 있을까?
세 가지 권능에 대해 내성이 생기기는 했지만, 2가지는 정체도 모르고…….
내성도 SSS급이 대리로 쓰는 거나 막지, EX급인 제우스가 공격하는 건 못 막을 공산이 컸다.
“그건 쓸 만하네. 1,000억 SP 값어치는 하겠어.”
[……1,000억이요?]
“너무 작나?”
[아, 아니! 아니에요. 호호! 저, 혹시 숫자를 잘못 말씀하신 건 아니죠? 천이랑 백이랑 혼동하신 거 아니죠? 아니, 그래도 100억인데…….]
“차고 넘치는 게 SP니까,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좋은 정보 있으면 더 쳐주지.”
[와아…… 잠시만요. 기억을 정리해 볼게요.]
그러고는 말이 없어진 아프로디테.
그녀는 회복되었으니 놔두고, 나머지 봉인석의 정화를 시도한다.
“이건 잘 안 되네.”
디오니소스나 아프로디테 것과는 달리 색이 잘 변하지 않는 봉인석.
그래도 동화의 내성이 생긴 이후, 느리지만 되기는 된다.
아프로디테도 한 60%에 말을 시작했으니…….
이것도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지구에 아직 권능을 뿌리지 않아서 그런가, 정화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군.
“디오니소스. 너는 뭐 아는 거 없냐?”
[으…… 으으…… 으으으…… 으으…….]
“고통을 가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런 상태야? 근성 없네.”
고통으로 인해 거의 정신을 놔 버린 디오니소스.
정보도 더 이상 토해 낼 게 없는지 앓는 소리만 낼 뿐이다.
녀석은 그냥 이대로 놔둬야겠고…….
[아…… 뭘 말하지? 하데스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계신데. 그가 마지막 심판을 벌인다는 것도 아실 텐데.]
“뭐? 마지막 심판?”
[네. 하데스의 심판이요.]
“그건 무슨 소리야?”
[하데스의 권능은 뭐죠?]
“명계의 신…….”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명왕 하데스.
그의 권능이라면…… 죽음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녀석은 너희처럼 제우스한테 먹히질 않았을 텐데?”
[하지만 제우스는 마지막 심판으로 하데스를 확정했어요. 방법이 있으니 그러지 않았겠어요?]
“이런. 불…… 식량도 문제였는데, 죽음이라고?”
앞의 네 신은 모두 자신의 권능을 통해, 사용자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방식이라면…….
하데스는 그냥 바로 직통으로 죽여 준다는 거겠지.
중간 단계가 없는 거다.
“각성자가 아닌 인간은, 바로 죽는 건가…….”
[영혼신이여. 하데스 숙부의 권능이 발현된다면, 각성자도 무사치 못할 거요. 혼돈의 군주인 하데스 숙부와, 제우스의 혼돈의 신기와는 시너지가 잘 맞을 테니.]
“그래. 마지막 권능이라고까지 한 이상, 각성자도 버티기 힘들겠지.”
[어머. 아레스, 여기 있었어?]
[그래.]
[근데 왜 아는 척도 안 하고 있었어? 서운하네. 우리 사이가 그것밖에 안 되니?]
[헤어진 지가 언젠데. 왜 친한 척이지?]
아레스와 아프로디테가 투덕거리지만, 두 불륜 신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관심은 온통 하데스의 권능에 쏠려 있었다.
“이거 문젠데…….”
불과 식량은 봉인석을 깨워서 막는다고 해도…….
하데스의 권능은 그런 수준이 아니잖아.
이 자식이 봉인되어 있지도 않을 테고……
아. 그래.
“하데스를 내가 먼저 제압한다면, 권능을 못 쓰지 않을까?”
[그럴 수 있겠지만…… 그를 어떻게 발견하겠습니까? 혼돈 진영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거기에 하데스를 만약 제압한다고 해도, 제우스가 몇 달 안에 강림하면 인류가 절멸할 것은 똑같겠지요.]
“하. 그렇군. 제우스가 있구나.”
하데스를 어찌어찌 먼저 봉인한다고 해도, 제우스가 강림하면 꽝이다.
그가 지구에서 제대로 힘만 발휘하면, 싹쓸이가 되겠지.
“흠. 시간만 있으면 이길 수 있는데…… 시간이 부족해. 그 전에 인류 멸망이라니…….”
[시간이 있으면 승산이 있으신가요?]
아레스와 투덕거리다가 갑자기 나에게 물어 오는 아프로디테.
“있어. 확실히.”
[그러면 인류 따위 버리면 되지 않나요? 창조주를 이길 정도가 되면, 영혼신께서도 EX급에 오르셨을 텐데…… 그냥 이번 인간은 버리고 새로 창조해요.]
“인간을…… 버리라고?”
[아프로디테. 당신답지 않게 좋은 생각이군요.]
[아니, 아테나. 당신도 있었어? 영혼신한테 모조리 사로잡혔구나. 호호.]
[아폴론과 아프로디테도 그의 편에 섰지. 사실상 올림푸스의 대신 태반이 영혼신의 아래 있다고 보면 돼.]
[영혼신님. 잘됐네요. 제우스가 인간 쓸어버리게 놔두고, 저희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요. 천국 엘리시온을. 저희가 영혼신의 손발이 되겠어요.]
해맑게 말하는 아프로디테.
다른 신들도 그다지 반박하는 기색은 아니다.
그들에게 인류는 이 정도 가치인 건가?
어차피 새로 만들면 그뿐인.
근데…….
이 제안에, 나도 모르게 놀랍도록 끌렸다.
내 자아가 확장하여, 모든 힘을 발휘하면 이기는 싸움.
그동안 인류의 희생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제우스를 피해 다닌다면…….
장기전으로 끌고 간다면…….
필승이다.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확실히 이기긴 이길 거야.
근데…….
이러면 내가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자아.
김지호가 돌아갈 곳은 완전히 사라지는 셈이 된다.
인간이었던 나는 그 색채가 빠르게 희미해지겠지.
인류도 없고, 이 돌멩이들과 우주와 각 세계를 배회하며…….
제우스를 피하며 힘만 키우다가, 그냥 내 자아를 포기할 거 같다.
돌아갈 곳, 돌아갈 사회가 사라지면…….
그냥 나 혼자 떨어지게 되면, 의미가 없어.
그냥 지금 10경 다 인출하고 제우스랑 싸우는 거랑, 차이가 없어.
“엘리시온을 창조하자는 제안은 거절하지. 현 인류는 나에게 필요한 존재야. 김지호로 살기 위한 고향이지.”
[흠……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소이까? 제우스의 힘, 지금은 막을 방도가 없을 텐데…….]
“그래. 네 말이 맞아. 아레스. 내게 지금 제우스의 힘을 막을 방도는 없지.”
[예. 혼돈의 신기까지 깃든 제우스의 파괴력은 최강. 그의 힘이 지구를 직격한다면, 이를 전부 막기는 힘듭니다. 결국 뚫리겠지요.]
“그래…….”
인류의 생존은 하데스의 권능 때부터 위험한 상태.
제우스까지 힘을 발휘한다면, 지구라는 행성도 온전치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도저히 지구에서 그들의 공격을 방어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그렇다면…….
이 방법을 써야 하나.
“막을 수 없다면, 들고 튄다.”
[네? 들고…… 튀다니요?]
“말 그대로야. 70억 인간. 모두 내가 데리고 지구에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