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219화>
봉인석 (3)
[중립의 신기, ‘영검’이 성장합니다.]
[권능 ‘성장’이 업그레이드됩니다.]
뜬금없이 성장하는 영검.
아니, 지금 이 타이밍에 성장할 게 뭐 있다고…….
평소라면 공짜로 얻은 성장에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기분이 찜찜했다.
[영혼신의 숙명을 파악해, 격이 상승한 결과입니다.]
영검에서 나오는 메시지를 보자 찜찜한 기분이 더 커졌다.
숙명?
내가 생각한 게 영혼신의 숙명이라고?
이걸 어떻게 파악해서 알려 준 거지…….
설마 넌 이미 알고 있었나, 영검?
[저도 영혼신의 숙명을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신위에 오른 이가 스스로 주어진 숙명을 파악하면 ‘격’이 상승합니다. 이번에도 그와 동일한 결과가 주어졌기에, 그리 판단했을 뿐입니다.]
그런가.
하긴, 이 녀석이 그런 정보가 있을 리는 없겠지.
그래도 숙명은 숙명인 거 아니야.
뭐 숙명 자체엔 문제가 없다.
혼돈 진영의 최고신 ‘창조주의 왼팔’.
결국 그 급으로 올라서는 게 나의 숙명이면 영광이지.
EX급도 뛰어넘는 최고의 신이 되는 거니까.
문제는 혼돈 측에서 제우스를 이용해서 나를 압박한다는 점이다.
빨리 예금해 놓은 SP를 다 영체에 받아들이고, 격에 맞게 행동하라는 압박.
-인간 놀이는 그만하고, 빨리 격에 맞는 세계로 올라와라.
제우스를 장기말로 활용하여, 나를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것 같다.
나야 뭐, 절대 그럴 생각은 없지만.
이제까지 온 이유가 나로서 살기 위해서였는데…….
포기할 거 같냐?
“그래도 녀석이 직접 움직이지 않은 게 다행인가…….”
[그가 이쪽으로 숨을 쉬면, 태양계가 사라질 겁니다.]
“……그렇게 세?”
[격이 아예 다릅니다. EX급 창조주가 개미라면, ‘창조주의 왼팔’은 태양으로 보아야 합니다.]
개미와 태양이라니…….
차이가 너무 심할 정도로 나네.
어쨌든 그렇게 힘의 스케일이 다르니, 스스로 개입은 하지 않는 거군.
그 정도 힘이면, 내가 아무리 SP를 몽땅 인출한다고 해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이건 그나마 다행인데…….
“그래도 혼돈이 제우스를 백업하면…… 골치가 아파지겠군.”
[더욱 빠르게 성장하십시오. ‘성장’의 권능이 한 번 더 업그레이드하면, 새로운 권능 ‘진화’를 얻게 됩니다.]
내 말에 그리 답하며 사라지는 영검의 메시지창.
진화라…….
일단 거기에 목표를 잡고, 나아가야겠군.
위이이잉.
갑자기 들려오는 공명음.
“김지호 님. 봉인석 하나의 색이 급격하게 돌아오고 있어요.”
엘프리안이 손으로 봉인석을 가리킨다.
봉인석이 있는 쪽을 바라보니, 내가 아까 쳐 두었던 실드도 강화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숙명을 깨달았다고, 바로 실드부터 강해지는군.
그래 봤자 있는 힘을 조금 더 활용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건가.”
엘프리안이 이야기한 봉인석 하나를 집고 들어 올린다.
아까 푸른색을 조금씩 찾아 가던 봉인석 4개.
그중 하나가 어느새 50% 이상 푸른빛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으…… 음…….]
그러자 소리가 나는 봉인석.
선이 굵지는 않지만, 남자의 목소리였다.
[여기는 어디오? 나는 분명 제우스께 힘을…….]
“넌 누구지?”
[나는…… 디오니소스요.]
디오니소스.
지구에 첫 번째 권능을 뿌렸던 술의 신이로군.
어째 말하는 것도 몽롱한 게, 마치 술에 취한 것만 같다.
[당신은 누구요?]
“너를 살려 준 은인이라고 할 수 있지.”
영혼신이라고 하면 적대감을 느낄까 봐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대번에 눈치를 채는 디오니소스.
[내 속박을 풀 만한 이라면…… 아버지의 적밖에 없는데. 당신, 영혼신인가? 아버지께서 이야기하신 그 성가신 적인가 보군. 귀찮게 왜 내 봉인을 풀었나.]
날 파악하자마자 바로 반말을 하는 디오니소스.
목소리는 여전히 나른하다.
“제우스한테 먹힌 걸 풀어 줬는데,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별로…… 난 자진해서 아버지에게 흡수되었으니까.]
으음. 태도가 영 글러 먹었는데.
비협조적으로 나올 느낌이다.
“그럼 제우스도 그다지 적대하지 않겠네?”
[그래. 나에게 뭘 물어볼 생각은 하지 마라. 어차피 아는 것도 없으니.]
바로 선을 치는 디오니소스.
제우스에게 협조적인 것에 비하면, 색 돌아오는 속도는 가장 빠르네.
뭔 차이지?
-술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
그때 또 다른 김지호에게서 정보가 들어온다.
-디오니소스의 봉인석 색이 돌아왔을 때, 음주자를 자세히 관찰했다. 술을 마시도록 끌어당기는 마력이 감소했으며, 헌터가 아니더라도 건강한 성인이면 술의 힘을 어느 정도 견디는 것으로 확인했다.
오호…….
지구에서의 힘이 감소했네?
디오니소스에게로 돌아와서 그런가.
권능이 돌아오는 만큼, 색이 빨리 돌아오는 거 같군.
그러면 녀석이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얻은 게 있긴 한데…….
“그래도 입을 열지 않는다니 아쉽네. 고문이라도 해야 하나?”
[봉인석을 어떻게 고문한단 말이오?]
“봉인석이 별건가. 영혼이 담긴 돌멩이인데. 흠…… 아레스. 이건 어때?”
어차피 봉인석이라 해 봤자 영혼을 담는 그릇.
영혼신인데 이런 것도 컨트롤 못하면 안 되지.
“이렇게 손을 넣어서…….”
아레스의 봉인석에 손을 넣고.
살짝 후벼본다.
[큭……? 뭐, 뭐 한 것이오!]
“아프냐?”
[당연하오. 영혼을 직격하다니, 나의 근간을 뒤흔드는 공격이었소. 으으. 봉인되었는데도 공격을 당하다니…….]
[아레스가 아파하다니. 꽤 강한 자극인 것 같군요. 그는 전신으로서 고통에 익숙한데…….]
그래?
나름 효과가 있다는 게 증명이 되었군.
디오니소스의 봉인석을 바라본다.
색을 거의 80% 이상 되찾아 가고 있는 디오니소스의 봉인석.
녀석은 스스로 아는 게 없다고 했지만, 뭐라도 아는 게 있을 수 있지.
한번 자극이나 해 보자.
디오니소스의 봉인석에 손을 집어넣고, 그의 영체 안에 손가락을 넣는다.
꼬집고, 후벼 보고…….
처음에는 살살 자극한다.
[크…… 크윽…….]
“뭐 아는 거 있으면 이야기해 봐. 제우스와 관련되어서.”
[그런 거…… 없…… 어……!]
“별로 자극이 안 세나? 아레스도 깜짝 놀라던데.”
손가락 하나 더 넣어 볼까.
두 개를 넣어서 각기 움직여 본다.
움직일 때마다 고통을 호소하는 디오니소스.
[크윽…… 정보가 없는데…… 무슨 말을 하란 말이냐. 큭!]
“흐음…….”
별것 없나.
뭐, 별로 기대도 안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조금만 더 하고 말아야지.
그러던 중, 봉인석의 20%를 차지하는 검은 부분에 눈이 갔다.
저길 한번 만져 볼까.
조금 전에는 구조가 아예 파악이 안 돼서 만질 생각조차 못했는데, 숙명 파악으로 인해 ‘격’이 올라가서 그런지 만져도 별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휙휙. 휙휙.
손가락으로 찔러 보려니 탁 막히는 봉인석.
검은 부분만 손이 들어가지 않는 게 기분이 나쁘다.
[으으…… 으아아악……! 제…… 제발 그쪽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비명을 내지르는 디오니소스.
그렇게 아픈가?
손도 들어가지 않는데, 그냥 뺄까 싶었는데…….
[크아아. 크아아악! 이…… 이런다고 내가 말할 줄 아느냐! 아, 아니…… 아는 게 없다!]
“……뭐야?”
통증이 심해서 그런가.
횡설수설하는 디오니소스.
근데 어째 말하는 게, 아는 게 있을 분위기다.
말할 줄 아느냐고 하는 거 보니까…….
이 녀석. 뭔가 수상한데?
툭툭. 툭툭.
영력을 끌어올리며 본격적으로 분석해 본다.
이거…… 뭔가 특이한데.
지금까지 판별된 권능인 ‘소멸’, ‘추방’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제대로 판별해 봐야겠어.
[크아아아…… 제발……! 거기는……!]
디오니소스의 비명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만진다.
만질수록 SP가 상당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건 대체 정체가 뭐야?
[으으…… 으으윽…… 말하겠다. 말하겠다고……!]
“아. 관심 없지만…… 말할 거면 후딱 해.”
지금은 검은 부분이 더 궁금하거든.
내가 계속 분석을 지속하자, 비명을 몇 번이고 내지른 디오니소스가 황급히 말문을 연다.
[크…… 크윽. 제…… 제우스가 나보고 신도 중독시킬 술을 만들라고 했다. 자신의 말을 거스르는 헤라를 굴복시킨다고……! 한참 만들고 있었는데……!]
“헤라를?”
[그래…… 나를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던 헤라. 그년을 이번에 완전히 굴복시킨다고 하셨다. 흐흐…….]
[디오니소스? 네놈 무슨 짓을…… 어머님이 어찌 그깟 술에 중독된단 말이냐?]
[평소의 대신 헤라라면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제우스에게 먹힌 헤라를 굴복시키는 건 가능한 일…… 아프로디테에게 좀 더 실험하고, 이제 헤라에게 써먹어 보려고 했는데…….]
“뭐 마약 같은 거라도 만든 거냐?”
[마약이라…… 큭큭. 그럴지도 모르겠군. 신의 영체에도 통용되는, 마약 같은 술…… 이걸 만들어서 헤라를 술 없이는 못 살게 만들려 했는데…….]
디오니소스가 술의 신. 황홀경의 신이라더니.
이거 완전 범죄자 같네.
“그래서 만들었냐?”
[제우스께 시제품은 드렸지…… 한데 갑자기 봉인 상태에서 해제되어 버렸어…….]
“흠. 그래. 어쨌든 제우스한테 협조는 했구나.”
[큭…… 그래도 말을 했으니, 고문은 멈춰 다오. 내가 더 이상 아는 건 진짜 없다. 맹세할 수 있어!]
“어…… 미안해. 나도 조사할 게 있어서. 좀만 참아 봐.”
[뭣? 더 한다고……?]
“아. 그래. 니가 만든 술 먹고 있어. 그거 먹으면 안 아프겠지.”
[이…… 이놈……! 약속이 다르지 않느냐!]
“잘 생각해 봐. 약속한 적은 없는데.”
이 정도면 내 미안함도 많이 표현했으니.
다시 만지자.
[으아아아악!]
디오니소스의 비명 소리를 무시하며 분석을 계속한다.
조금 전에는 심한 거 아니냐고 훈수 두던 아레스도 디오니소스가 털어놓은 사실에 화가 났는지 그냥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호 님. 일이 길어질 것 같으니, 잠시 정령계를 둘러보고 올게요. 다 끝나시면 불러 주세요.”
“네. 다녀오세요.”
봉인석을 만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엘프리안도 손을 흔들며 자리를 뜬다.
“흠. 이거 하나론 분석이 안 되나.”
하나로만 분석을 해서 그런지, 뭔가 속도가 더디다.
남은 세 개 중에 두 번째로 색이 많이 돌아온 걸 잡아 바로 손을 집어넣었다.
[SP가 부족합니다.]
그러자 뜨는 메시지.
아니, 나한테 SP가 부족하단 메시지가 뜨다니…….
물론 좀 쓰긴 했지만, 이 봉인석 분석에도 SP가 상당히 소모되는 모양이다.
바로 계좌에서 SP를 인출했다.
원래처럼 10조를 인출하려고 하다가…….
“이제는 이 정도까지는 될 거 같아.”
40조를 인출했다.
영혼신의 숙명을 알았다고, 가용 한도가 크게 늘었다.
이 이상 뽑으면 정신이 흐릿해질 거 같으니…… 이 정도만 해야지.
SP가 늘어나자 분석에도 힘이 빨라진다.
[크으…… 으……!]
힘이 쭉 빠진 채 간헐적인 소리만 내지르고 있는 디오니소스.
[…….]
그에 반해 아무 말도 없는 두 번째 봉인석.
대신 내가 만질수록, 푸른색으로 돌아오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디오니소스는 85%쯤에서 멈춘 상태인데, 두 번째 봉인석은 한 60%까지 온 상태.
둘을 만지면서 분석을 거듭하다 보니…….
[아아아악!]
하이톤의 비명 소리.
두 번째의 봉인석에서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제우스…… 이제는 날 고문하는 거야!? 이상한 술을 계속 먹이더니……!]
“넌 누구니?”
[아니…… 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왜 여기에……?]
디오니소스는 바로 이름을 밝히더니, 얘는 안 밝히네.
일단 하던 거나 하자 싶어서 검은 부위를 계속 매만진다.
[아…… 말, 말할게요! 전 아프로디테, 미의 여신…….]
아. 아프로디테였구나.
뭐…… 그건 중요하지 않지.
슥슥. 슥슥.
[아아악! 이름을 밝혔는데 왜……!?]
“음. 미안. 조금만 참아줘. 네 혼에서 제우스가 지배하는 부위를 정화하는지라.”
아무렇게나 지껄였지만, 영혼석이 푸른색으로 변해 가는 것도 사실.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고 아프로디테의 영혼석도 매만진다.
쌍으로 질러 대는 비명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검은 기운을 만지다 보니…….
드디어 내가 바라던 메시지가 떴다.
[혼돈의 권능, ‘동화(同化)’에 대해 내성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