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상태창 2개-217화 (217/240)

<내 상태창 2개 - 217화>

봉인석 (1)

“봉인석이 넘치는군.”

집에 머물고 있는 ‘나’에게 봉인석을 모두 보내고, 여기서 살펴봤다.

시커멓게 물든 봉인석 4개.

아레스나 아테나의 푸른 봉인석과는 달리, 미약한 영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테나. 뭐 할 말 없어?”

이제 봉인도 되었겠다.

아까 같은 연기는 그만두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포로를 겁박하려고 드시는 겁니까? 저는 굽히지 않습니다.]

“아니, 봉인석이 됐는데 그럴 필요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영혼신. 차라리 소멸을 시킬 것이지, 사악하게 봉인석으로 만들다니…… 고문을 가할 참인가요? 전쟁의 여신에게 고문이라니, 가소롭군요.]

“야…… 흠.”

뭐라고 하려다가 말을 조심한다.

얘가 지구까지 왔는데도 이러는 이유가 있겠지?

지구도 제우스와 힘이 연결된 걸까?

연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인가.

[하지만 기다리세요. 아버님께서 도우러 오실 것입니다. 지구는 아버님의 힘이 미치는 곳. 태양계에 아버님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태양계라…….”

지구가 내 신계가 되었는데도 제우스의 영향력이 아직은 있는 건가.

하긴, 그리스에 뜬 뇌전 회오리를 보면 그럴 만도 하지.

그렇다면…….

“케브리안으로 가야겠군.”

그리스의 하늘을 바라보던 또 다른 나를 집으로 불렀다.

“내가 집에서 영혼 조율하면 되지?”

“어. 부탁해.”

역시 또 다른 나라 그런지 척 하면 척이다.

일단 제우스의 뇌전 폭풍은 격이 낮은 분신으로 감시하고, 이 또 다른 본체에게 주요 업무를 맡겨야지.

맡은 임무를 교체하고, 나는 케브리안 행성으로 출발했다.

봉인석을 다 들고.

“케브리안…… 오랜만이네.”

엘프리안의 은신처에서 몸을 일으켰다.

엘프리안의 기척은 없군.

주변에 영력을 퍼뜨려 보니, 예전과 느낌이 그대로였다.

[타 행성으로 날 데리고 오다니…… 아버지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이군요. 하지만 아버지의 힘은 계속 이어져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언젠가 절 구원하러 오시겠지요!]

세계를 바꿨음에도 충실한 제우스의 종을 연기하는 아테나.

이쯤 되면 연긴지 진짠지 살짝 헷갈릴 지경인데…….

그건 그렇고, 제우스의 힘이 케브리안까지 뻗쳐 있다고?

아무리 창조주라고 해도 타 행성계까지 힘이 미치나?

너무하다 싶어 아테나의 봉인석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흠. 모르겠는데…….”

제우스랑 힘이 연결되어 있다고?

그냥 봉인석인 거 같은데.

달그락. 달그락.

검게 물든 나머지 봉인석을 보면 알아챌까 싶어, 하나하나 살펴봤다.

그래도 딱히 실마리는 없었다.

창조주의 힘은 대체 어디까지인 거야.

속으로 작게 투덜거리며, 봉인석을 왼손에 여럿 뭉쳐 쥔 순간.

하나의 미약한 실선이 눈에 들어왔다.

작정하고 분석하려 들지 않는 한, 보이지 않았을 작은 실선.

이거…… 제우스랑 관련이 있는 건가?

“영기발출.”

영기를 발해 건드려 봤다.

휘잉. 휘잉.

손에 걸리는 게 없이, 그냥 검은 선을 통과한다.

몇 번이고 건드려 봐도, 작은 반발조차 없는 선.

[후후후. 영혼신.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요. 아버님의 힘을 감히 끊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당신의 힘으로는 차단조차 불가능하겠지요.]

옆에서 들으라는 듯이 또 떠드는 아테나.

차단.

차단이라…….

“아이기스. 소울 배리어.”

아이기스의 방패를 소환하고 소울 배리어를 중첩한다.

소울 배리어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던 검은 선.

아이기스의 방패까지 대니까, 그제서야 검은 선의 연결이 저지된다.

[헛된 짓입니다. 헛된…….]

옆에서 계속 입을 털고 있는 아테나.

그에 반해서 아레스는 아까 전까지만 해도 아테나 욕을 하더니, 막상 지금은 조용하다.

뭐야. 쫄았나?

지지지직.

계속해서 막히던 검은 선.

방패에 닿던 부위에 작은 스파크가 튀더니, 선이 사라진다.

흠…… 이제 제우스의 힘이 사라진 건가?

더 이상 막을 필요가 없을까.

[아니, 아버님의 힘을 차단하다니! 감히 제 아이기스로! 하지만 힘이 부치는지 방패를 다시 역소환하려고 하는군요. 역시, 아버지의 힘을 이겨 내기는 불가능한 거겠지요. 영혼신. 정말 허약한 남자입니다.]

선 없어져도 계속 틀어막으라는 거지?

아, 근데 말하는 게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육두문자로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부모 친지 거론한 것도 아닌데, 아테나가 도발하면 들을 때마다 기분이 더럽다.

그렇게 얼마간을 배리어를 쓰고 있었을까.

변화는 검은색으로 물든 봉인석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 색이 돌아오네?”

완전히 시꺼멓던 봉인석이 푸른색을 조금씩이나마 되찾고 있었다.

100% 중에 한 5% 정도의 비율이었지만, 완전히 시꺼먼 것에 비해서는 진일보한 성과.

아테나의 어조도 확 달라진다.

[지금까지 실례했습니다. 영혼신이여.]

아까의 도발적인 어조는 없다.

나긋나긋한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는 아테나.

[저를 믿고, 제 진의를 잘 해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테나.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지?]

[시끄러우니 넌 좀 가만히 있지 그래, 아레스.]

아테나가 쏘아붙이자 바로 침묵하는 아레스.

나긋나긋하던 목소리는 날카롭게 변한다.

이 여자…… 가면이 몇 개야?

[무슨……!]

[아는 것도 없으면서. 승리의 길 운운하며 이길 것처럼 굴더니, 결국 제우스의 바람대로 올림푸스의 신들을 수없이 희생시켰지. 흑뢰가 되어 사라진 이들은 다시는 부활할 수 없어. 제우스의 연료가 될 뿐.]

[큭…….]

[거기에 올림푸스에 소식조차 전하지 못하고 영혼신에게 패배해서 사라졌으니…… 남은 신들도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제우스의 먹이가 되는 길을 택했지. 굳이 전쟁을 선동해서, 제우스가 힘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을 주다니. 전쟁의 신은 무슨.]

날이 서린 어조로 아레스를 비난하는 아테나.

[너야말로 뒤에서 영혼신과 협력한 올림푸스의 배신자 아니더냐. 네가 만약 그때 도와줬다면……!]

[내가 도와줬으면? 달라졌을까? 영혼신을 상대로? 훗. 그와 싸워 봤으니 생각해 봐. 내가 개입했다고 뭐가 달라졌겠어?]

아레스와의 전투를 복기해 본다.

제우스의 힘이 있었을 때는 내 분신을 학살하던 아레스.

하지만 그 힘이 사라지니 속수무책이었지.

어차피 제우스는 적극적인 개입을 하려던 느낌이 아니었으니…….

아테나가 추가되었다고 해도 결국 둘 다 봉인석행이었겠지.

[영혼신이시여. 완전히 어둠에 잠식되어 버린 신들을 구해 주십시오. 저들을 구하지 않는다면, 지구에 계속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모여 있는 네 개의 검은 봉인석.

지구에 재앙을 일으키는 주체가 저들인가?

“부숴 버리면 재앙이 안 나나?”

[만약 부순다면 그들의 힘과 권능이 완전히 제우스에게 귀속되게 됩니다. 재앙이 더 심해지겠지요.]

“흠…… 그래. 디오니소스랑 아프로디테가 저기 포함되어 있나 보지?”

[그렇습니다. 거기에 헤파이스토스와 데메테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헤파이스토스와 데메테르.

대장장이의 신에, 대지의 신인가.

“그들이 불러올 재앙은 뭐지?”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헤파이스토스는 불의 신이기도 합니다. 불에 관련된 재앙이 왔을 테죠.]

불.

인류를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고, 더 나아가 문명을 이룩하게 만든 자연 현상.

지금도 불은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인류에게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이게 재앙으로 변한다면…….

술처럼 해를 끼치게 변한다면, 집에서 불을 피우기만 해도 사람이 쓰러지는 건가.

발전소에서 발하는 전기, 바닥을 데우는 난방은 어떻게 되지?

재앙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모르지만, 불이 인류의 적이 된다면…….

술이나 성생활이랑은 비교가 안 될 것 같다.

“데메테르는?”

[그녀가 맡은 건 대지. 식량과 관련이 있었을 겁니다.]

여기에 식량이라니.

먹는 건 생존의 기본.

술은 안 마시면 되고, 성생활도 좀 참게 자제를 시키면 되지만…….

사람이 밥을 안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

헤파이스토스의 권능을 어떻게 이겨 내고 있다고 해도 먹는 것에 문제가 생기면 답이 안 나온다.

술 하나로도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었는데, 먹는 게 문제가 되면…….

끔찍하군.

“봉인석이 너희처럼 완전히 푸르게 변하면,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근데 회복이 느린데.”

푸른빛을 조금씩 되찾고는 있었지만, 10%쯤 되니까 그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고 있었다.

[케브리안도 ‘부서진 세계’의 관리로 제우스와 혼돈의 입김이 닿았던 곳. 회복이 쉽지 않을 겁니다. 아예 그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세계로 가야 합니다. 제우스가 아예 인지하지 못한 세계로요.]

“흠. 내가 가 본 세계 중 제우스 입김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고는……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네.”

경매장 때 사용했던 혼돈의 영역 정도?

하지만 제우스와 혼돈의 연결성이 갑자기 나타난 만큼, 거기도 좀 가기가 그래.

잘못하다간 호랑이의 입에 제 발로 들어가는 꼴이 될 테니까.

“좀 알아봐야겠어.”

[예. 일단은 계속 회복되는 걸 지켜보시지요.]

아테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끝나자, 잠시 침묵이 감돈다.

봉인석의 회복을 위해, 최대한 소울 배리어로 막아 보고 있자니…….

침묵하고 있던 아레스가 말문을 연다.

[근데 아테나, 너는 왜 아버지를 배신했지?]

[너랑은 그다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데.]

[아버지는 널 자식 중 제일 아끼셨다. 사실 다른 대신은 다 버려도, 너는 남길 거라고까지 생각했지.]

“그래. 그 일은 나도 궁금해. 왜 나한테 접촉한 거지? 제우스가 궁극적으로 올림푸스도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더 자세한 연유가 알고 싶어.”

그러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테나가 다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영혼신께 알려 드린 게 전부입니다. 제우스는 올림푸스라는 짐덩이를 치우고, 홀로 남아 천지를 창조하려고 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헤라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어머님이……? 거짓말하지 마라. 나에게는 말씀을 안 하시고, 네게만 알릴 리가……!]

[네가 못 미더웠던 거겠지.]

[크윽……!]

아레스가 할 말을 잃고 침묵한다.

“헤라가 등장하네. 그녀는 어디 있어?”

[헤라는 제우스가 먹었습니다.]

[뭐……?]

제우스가 먹었다고……?

[영혼신. 제우스가 계획한 일은 모두 잘 처리되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얻지 못한 건 뼈아픈 실책이었지만, 오딘을 제압하고 SP 거래소에 대출을 받게 하는 건 성공했죠. 다만…… 마지막 일처리가 아쉬웠습니다.]

“시스템 페널티 받은 거 말인가?”

제우스가 EX등급이 되었음에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지 못했던 이유.

바로 시스템의 페널티 때문이었지.

[‘불완전한 창조주’ 제우스에게 페널티를 집행합니다.]

[제우스의 SP 획득량이 크게 감소합니다.]

[이 효과는 제우스가 ‘완전한 창조주’가 되기까지 유지됩니다.]

이거 때문에 내가 대신이 될 때까지 잘 버텨 온 거 아니겠어.

창조주의 힘으로 지구를 들이치질 못했으니까.

[SP 획득량 감소는 지금까지의 계획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페널티였습니다. 제우스는 자신의 힘만으로 모든 걸 이뤄 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EX등급은 기본적인 SP 소모량 자체가 차원이 달랐죠.]

“흠…… 그게 그 정도였나?”

[예.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폐기되었지요. 제우스는 숨만 쉬어도 SP가 빠져나갔습니다. 이는 시스템 페널티에서 시작했지만, 결국은 ‘불완전’에서 기인한 것…….]

그래. 불완전한 창조주라고 했지.

[그는 완전해지려고 했습니다.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헤라는 최적의 ‘먹이’였죠.]

[잠깐. 그래서. 어머님을……? 무슨…… 겨우 그런 이유로?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다.]

[영혼신. SP를 조금 줄 수 있겠습니까? 조금만 주세요. 봉인이 풀릴 수도 있으니.]

갑자기 나에게 부탁하는 아테나.

SP를 주는 건 별 일 아닌데…….

조금만 달라는 게 어렵다.

얼마나 줘야 하지?

요즘 하도 SP를 펑펑 써 대니 감이 다 떨어졌어.

“얼마여야 적은 거지?”

[……1억만 주세요.]

“그래.”

1억 정도를 전송하자, 아테나의 봉인석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의 화면을 띄우는 아테나의 봉인석.

마치 빔 프로젝터 같았다.

그 화면에 한 여신이 뜬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올림푸스의 여신들을 통틀어 봐도, 보다 더 특출 난 미녀.

붉은 머리칼의 여신은 슬렌더한 스타일의 아르테미스나 아테나와는 달리, 풍만하고 농염한 매력이 가득했다.

성인의 매력을 마음껏 뽐내고 있는 여신.

개인적으로 완전히 내 취향을 직격하는 여신이었다.

저 여신…… 설마…….

[어머니!]

헤라.

그래. 저 여신이 헤라구나.

와. 제우스…….

저런 여신을 마누라로 뒀는데 그렇게 바람을 핀 거야?

거기에 최후엔 잡아먹기까지 해?

와. 시발.

진짜 쓰레기 새끼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