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105화>
105 하데스와의 재회 (2)
“큭, 하데스. 이건…….”
“하.데.스? 올림푸스에 있을 때는 고개를 숙이기에 바빴던 당신이 참 건방지군요.”
낫이 그대로 아킬레우스의 상반신을 쓱싹 벤다. 아킬레우스의 상반신이 툭 떨어져 나가 땅바닥에 구른다.
피가 터져 나가 땅을 적셨지만 아킬레우스의 영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체는 인간의 육신이지만 상체는 유령처럼 남아 있는 그로테스크한 광경.
가슴은 베여 있지만 영체는 그래도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
“하, 신이 돼서 죽지도 않네. 킬킬, 좋아요. 당신도 프로메테우스처럼 나의 컬렉션으로 만들어야겠군요.”
“크으윽……! 소울 배리어!”
응? 소울 배리어?
헤라클레스만 쓸 수 있는 스킬인데……?
백색의 보호막이 아킬레우스의 몸을 감싸자 하데스의 낫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아킬레우스의 뒤에서 낫을 들고 있던 하데스도 그 여파로 몸이 살짝 뒤로 물러섰다.
“소울 배리어?!”
“하데스, 이 굴욕은 꼭 갚아 주마!”
상체는 유령인 채로 줄행랑을 치는 아킬레우스.
하늘 위로 휙 오르더니 빛이 번쩍이면서 사라졌다.
“참나. 헤라클레스의 스킬을 저런 잡졸이 쓰다니, 어이가 없군요. 올림푸스 놈들, 대체 뭔 짓을 한 건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쪽으로 내려오는 하데스.
백발에 외눈안경을 끼고 있는 병약한 미소년.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데도 몸이 왜소해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는 어마어마한 광기가 내포되어 있는 혼돈의 군주였지.
“엘프리안, 힘을 회복했군요. 당신의 연수 제의를 듣고 전 참 놀랐답니다.”
그가 땅에 내려서자 풀들이 그대로 썩어 가기 시작한다.
정말 사령대제라고 일컫기에 걸맞은 모습.
어찌 보면 엘프와 나무, 생명과도 연관 있는 엘프리안이랑은 상극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썩어가는 녹음을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적의 적은 친구 아닌가요?”
“하하하, 옳은 말씀입니다.”
하데스가 웃는 낯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디아나까지는 아무 감정 없이 지켜보던 그는 나를 보자 눈빛이 표변했다.
“당신…… 뭐죠?”
“응?”
시간회귀를 했으니 그가 나를 알아볼 리가 없다.
거기에 지금은 엘프리안이 마련해 준 나무갑옷 때문에 난 줄 절대 알아볼 수가 없는데.
근데 왜 갑자기 정색이야?
“페르세포네…… 페르세포네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자세히 연유를 밝히시죠.”
목에서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어느새 내 목을 감싸고 있는 하데스의 낫.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목에선 살짝 피가 흐르고 있었다.
“페르세포네의 기운이라면, 페르세포네의 파편 때문인가?”
“페르세포네의 파편? 당장 내놔라.”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하데스의 다급한 표정.
거기에 언제나 존댓말을 쓰던 것과는 달리 반말이다.
그가 나에게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햐, 사랑하기는 했나 보다……?
하지만 말이야.
“공짜로?”
“……하, 미쳤냐? 나 혼돈의 군주, 사령대제다. 근데 감히……?”
“그 정도 직위인데 당연히 기브 앤 테이크가 있어야지? 나 죽이면 인벤토리도 그대로 증발이야.”
“이 자식이……!”
순수하게 분노를 토하는 하데스.
너무 뻗댔나?
그때 엘프리안이 시의적절하게 막아 주었다.
“저, 그는 영혼 각성자입니다! 지금 베면 시스템의 패널티를 받을 거예요.”
“영혼…… 각성자? 헤라클레스 말고도 영혼 각성자가 또 나왔다고요?”
그러자 낫을 확 치워 버리는 하데스.
분노의 눈빛이 사라지고 어느새 호기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흐음…….”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하데스.
그러면서 단안경(單眼鏡)을 열심히 매만지고 있었다.
“능력이 확실히 특이하군요. 지구인 출신 중 이런 이레귤러는 없었는데…… 흥미로워요.”
“뭐, 내가 영혼 각성자인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페르세포네의 파편, 당신에게 비싸게 팔고 싶은데 말이야.”
그가 좀 안정을 되찾자 나는 그에게 딜을 제시했다.
인벤토리에서 썩고 있던 페르세포네의 파편.
이거 어따 쓸데도 없고, 가장 비싸게 사 줄 하데스가 눈앞에 있으니 지금 이 기회에 팔아버리고 싶다.
내 말에 흥미를 보이는 하데스.
“팔고 싶다고요……?”
“그래, 뭐 쌈박한 스킬이나 아이템이랑 바꿀 용의가 있어.”
“일단 그 파편, 보여 주시죠. 제가 가진 것과 동일할 수도 있으니.”
그러며 자신의 품에서 보라색 보석을 꺼내는 하데스.
숫자가 30개쯤 되는데, 26개는 다 똑같이 삼각형 모양으로 생겼다.
내거는 뭐였지?
인벤토리에서 페르세포네의 파편을 꺼내자 저 모양과는 달리 원형의 보라색 보석이었다.
그러자 눈을 크게 뜨는 하데스.
“이럴 수가…… 다른 문양이라니……? 이건 어떻게 구한 거죠?”
“그 정보를 포함하면 더 큰 대가 콜?”
“아! 진짜 짜증 나게 하네요, 당신. 줄 테니까 말하시죠.”
“올림푸스 놈들한테는 안보이지?”
“아~ 까전에 미리 차단해 놨습니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말해요.”
말 안 하면 진짜 팰 기세군.
나는 지구에서 A급 던전을 클리어했고, 거기에서 나온 레오니다스에게서 페르세포네의 파편을 얻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는 대번에 나를 보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회귀했군요?”
“너도 아나?”
“당연하죠. 지구는 아직 A급 던전이 나올 때가 아닙니다. 거기에 내가 하데스인 것에 대해서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익숙한 언사…… 나도 만나 봤겠군요?”
“뭐, 그건 그쪽 생각에 맡기지.”
“킬킬, 당신의 가치가 별로였으면 그 싸가지를 가만두고 볼 내가 아닌데 말이죠……. 꽤 쓸 만했나 봐요?”
단안경을 나에게 휙 가져다 대는 하데스.
아오, 싸가지는 그쪽이 없었거든?
이 재수 없는 자식, 힘만 있으면 한 대 때려 주고 싶네.
하지만 그 마음은 하데스의 다음 말에 깨끗이 사라졌다.
“페르세포네의 새로운 흔적을 발견했으니 그만한 대가,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A급이니 SS급의 스킬 정도면 적당하겠군요.”
“SS급?!”
SS라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S급 스킬도 B등급으로는 수납 못한다고 해서 얼마나 제약이 많았던가.
A등급이 되자마자 바로 SS등급 스킬로 딜을 하는구나.
“왜 그렇게 놀라시죠? 당신 혹시, 예전 세계에서는 A등급이 아니었나요?”
“흠, 그건 상관없어. SS 스킬인 게 중요할 뿐이야.”
“킬킬…… 딱 봐도 B등급이었나 보네요. 싸구려 S등급 스킬 하나둘에 좌지우지 당했을 게 눈에 선하군요.”
싸구려라고?
S등급 스킬 가지고 생색을 내던 이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물론 내가 S 이상 스킬을 못 받았기 때문에 나에겐 가장 비싼 스킬이었지.
근데 녀석이 말하는 거 들어 보면……,
“S가 그렇게 싼 스킬 가치냐?”
“뭐 당연한 말을 하고 그래요. 당신 A급이죠? 지금 C급 스킬 거들떠보기나 해요?”
“으…… 그건 아닌데.”
“그거보다 훠얼~ 씬 갭이 큰 게 SSS와 S급 스킬입니다요.”
하데스가 손가락을 까닥까닥 흔들며 나를 훈계한다.
아오, 저 자식 진짜.
그래도 페르세포네의 보석으로 SS급 스킬 준다니까 참자.
“자, 무슨 스킬이 필요하세요? 즉사 스킬을 드릴까? 아니면 투명스킬 퀴네에? 아바타 교환도 있고…… 일단 원하는 종류부터 불러 봐요.”
원하는 스킬 종류라.
공격 스킬은 일단 영기발출과 영검으로 어느 정도 충족된 상태다.
방어 스킬은…… 흠. 아이기스의 방패가 올림푸스 놈들이랑 싸울 때는 쓸모가 없긴 해.
근데 영혼 약탈자 등급이 올라 소울 배리어를 배우면 그거로 다 때울 수 있지 않을까?
공격은 영기발출로 퉁치잖아.
뭔가 기능적으로 쓸만한 스킬이 필요한데……
[아바타 교환 스킬을 배우세요. 정말 추천드립니다. 제가 탐나네요.]
엘프리안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아니, 왜 갑자기…….
아바타 교환.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는 스킬이다.
일단 내가 아바타가 없는데 뭘 교환하냐?
거기에 교환해서 뭐하겠다고……
내가 엘프리안의 아바타랑 내 아바타를 교환하면 성별이 바뀌나?
[진짜 이건 고민하는 게 무의미해요. 아바타 교환이 최고예요.]
하지만 엘프리안이 자꾸 나에게 아바타 교환 스킬을 강력추천해서 하데스에게 물어보았다.
“아바타 교환은 무슨 스킬이야?”
“흐, 엘프리안이 하라고 시켰습니까? 아주 시끌시끌하시더군요.”
이게 감청도 되나? 아킬레우스는 못 들었던 거 같은데.
엘프리안을 힐끗 보니 표정을 찡그리고 있었다.
“대신의 힘도 회복하지 못했는데 넓은 오지랖은 좋지 않아요.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뭐, 봐드리지요. 저도 추천 드리고 싶은 스킬이니까요.”
[아바타 교환]
[액티브 스킬]
[등급 : SS]
[아바타와 본체를 완전히 교환합니다. 그 어떤 제약에도 얽매이지 않고, 영체의 위치를 완전히 바꿉니다. 남겨진 아바타는 사용자의 행동 양식에 맞춰 자동으로 움직입니다. 스킬 시전 후 재시전까지는 200일이 걸립니다.]
어…… 이게 그렇게 좋은 스킬이라고?
그냥 아바타랑 내 위치를 바꾸는 거에 불과한데.
도망칠 거면 헤임달의 귀환 쓰면 되지.
내가 별로 탐탁지 않은 기색이자, 하데스가 또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었다.
“이 스킬은 무조건 당신의 생명을 1번 보장해 주는 스킬입니다.”
“근데 나 귀환 스킬 있어. 헤임달의 귀환이라고.”
“쯧쯧! 그래요. 헤임달, 아스가르드의 파수꾼. 그 녀석의 귀환 스킬이라면 나름 위기에서도 다 빠져나가겠죠. 근데 헤임달이 당신을 감시한다면?”
그러자 약간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헤임달 앞에서 헤임달의 귀환을 쓰면 도망칠 수 있을까?
“헤임달은 파수꾼의 대신입니다. 당신은 무조건 추격당해요. 자, 그리고…… 지구에 터전을 잡고 있는 당신이 도망쳐 봤자 어디로 도망치겠어요? 금방 따라잡아서 죽여 버리겠죠.”
“그건 이 스킬도 마찬가지잖아?”
“아니죠. 아바타 교환을 하면, 저들에게 당신이 ‘죽었다’고 인식시킬 수 있어요. 그다음에 정체를 숨기는 건 당신 몫이지만 한 번 기만의 기회가 남은 거죠.”
하데스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자, 생각해 봐요. 자신이 죽인 적인 줄 알았던 상대가 뒤통수 칠 때 일그러지는 적의 얼굴을. 그 몰골을 볼 때마다 뇌리에 저릿거리는 쾌감을 잊을 수가 없어요. 킬킬킬킬.”
아주 산뜻한 미소를 짓는다.
아, 이 스킬이 그 정도의 가치란 말이야?
지금 나는 아바타도 못 만드는데…….
[이거 정말 중요한 스킬입니다. 저는 강력 추천 드려요.]
계속 옆에서 바람 잡는 엘프리안.
들린다고 지적을 받았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음성을 보낸다.
“아바타는 언제 생기는 거지?”
“S급에 오르면 만들 수 있죠. SP 상점에서도 팔긴 합니다. 당신은 반신급이니, 아바타를 움직일 수가 없긴 하지만요. 클클.”
A급인데 아바타를 사 봤자 그냥 인간 인형일 뿐인가…….
그래도 인형 집에 놔두고 위기의 순간 때 아바타 교환 쓰면 되지 않겠어?
대신이 이렇게 강력 추천하는데 하나 가져 보자.
올림푸스 쪽에선 헤임달의 귀환으로 튀고, 아스가르드 쪽에서는 아바타 교환으로 튀면 되겠지.
“좋아.”
“그럼 받으시지요.”
[SS급 스킬, ‘아바타 교환’을 얻었습니다.]
스킬을 받고 페르세포네의 조각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전에 없던 부드러운 표정으로 페르세포네의 조각을 쓰다듬는 하데스.
이놈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하데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천년만년 조각 쓰다듬을 지경이다.
“흠흠.”
엘프리안이 헛기침을 하지만 아랑곳하고 계속해서 페르세포네의 조각을 매만지는 하데스.
아주 순애보네, 순애보야.
몇 번이고 헛기침을 하자 드디어 행동을 멈춘다.
“오랜만에 와이프의 흔적을 찾게 돼서 실례했군요. 이제 우리의 용건을 해결하도록 하죠.”
페르세포네의 조각을 품 안에 넣은 하데스가 대낫을 바닥에 꽂는다.
그러자 하얀 뼈조각으로 분해되더니, 커다란 뼈 의자로 형성되는 대낫.
하데스는 거기에 앉아 이쪽을 쳐다보았다.
“엘프리안 님,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제 제안이 마음에 드셨나요?”
이미 이야기가 어느 정도 오간 건가.
둘 다 어느 정도 교감이 이루어진 듯했다.
“예, 흥미가 가지요. 케브리안 독립 이야기인데요.”
케브리안 독립?
내가 엘프리안을 바라보니, 그녀는 크로노스의 파편을 손에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