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98화>
98 뜻밖의 재회 (1)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라이트.”
마법을 써 보았지만 마나가 움직이다가 말아 마법 구현이 안 되었다.
마나가 안 움직이다니…… 뭐지?
[이 공간에서는 마나의 흐름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아까 들었던 음성이 또다시 들린다.
드래곤 하트로도 마법 구현이 안 되다니…….
함정인가?
너무 준비 없이 들어왔나.
뭐, 수틀리면 귀환을 쓰자. 이건 신의 스킬이니까 마나 흐름이 움직이지 않아도 되지 않겠어?
아테나의 아이기스의 방패도 지금 내 주변을 잘만 맴돌고 있으니까.
[그대로 앞으로 걸어오십시오.]
주위를 경계해 봤지만 딱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일단은 목소리에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어둠 속을 10분쯤 걸어갔을까.
미세한 빛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이는 것은 거대한 원탁 테이블.
어둠 속 공간에서 원탁 테이블만 미약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원탁 테이블에는 의자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내 쪽 방향에 있고 나머지 하나는 건너편에 있었다.
“환영합니다, 영혼 각성자여.”
건너편에 앉아 있는 하얀 가면의 사람.
머리카락은 깔끔한 흑발 장발로 길고, 입가에 드러난 피부는 진한 빛이다.
왠지 익숙한 가면인데, 생각해 보니 오페라의 유령 가면 같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여자 음성.
옷은 남자처럼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영혼 각성자 프로젝트가 정말로 성공하다니……. 지상이 이상해져서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영혼 각성자가 나올 줄은 몰랐군요.”
“당신은 누구죠? 이 쪽지는?”
“저는 ‘잊힌 신’의 화신입니다.”
“잊힌 신이요?”
“예, 잊힌 신이란…….”
“기독교? 불교? 이런 쪽 화신인가요?”
가면을 쓴 여자가 급 입을 다문다.
잠시 침묵하다가 말문을 다시 여는 여자.
“……알고 계셨군요.”
아쉬워하는 음성.
짜잔, 하면서 놀래킬 생각이었나.
“우연찮게 알게 되었네요.”
“예,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부서진 세계에서 광룡 아카르디안을 만나고 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가면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지구를 온 적이 있는 광룡이라……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럼 제 궁금증도 좀 풀어 주시죠. 이 쪽지는 뭡니까? 영혼 각성자 프로젝트는 뭐고요?”
내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질문하는 가면녀.
“지구에서 가장 큰 종교가 뭐였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기독교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들이 믿는 신은요?”
“하느님이죠.”
“그렇죠. 종파야 분화되어 있지만 유일신의 위치에 그만한 존재감은 없었지요. 기독교, 카톨릭, 거기에 이슬람교까지……. 결국 하나의 존재를 절대신으로 모셨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이어 가는 가면녀.
“신을 믿는 신도가 많을수록 더욱 많은 SP를 받게 됩니다. 특히 지구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SP를 상당히 얻었죠.”
“SP는 안 끼는 데가 없군요……. 그래서요?”
“그렇게 많이 벌어들인 SP로 ‘신’은 승급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승급을?
아, 지금 제우스랑 오딘이 목표로 하는 ‘태양계 창조주’를 이미 이룬 건가?
이미 먼저 승급하신 분이 있었네.
“하느님이 창조주로 승급한 건가요? 아니, 근데 세상이 왜 이 모양이죠?”
“그분은 태양계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이 세계는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으니 새로운 창조를 하시겠다며 떠났지요. 완전한 낙원을 만드시겠다고요.”
“아…… 그래요?”
SSS에서 등급 업하면서 그냥 다른 세계로 떠난 건가?
“그럼 지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신을 잊게 되나요?”
“아뇨, 지구는 지구대로 관리하고 확장한 겁니다. 다만 터전이 아예 다른 계로 옮겨져서 지구에는 영향력을 크게 끼칠 수 없게 되었죠. 그 상태를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가 파고들었습니다.”
입가는 드러난 가면 아래, 입술을 꾹 깨무는 게 보인다.
“두 세계는 힘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서 전격적으로 공격해 와 남은 지구의 대신들을 봉인했습니다.”
그게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아무리 기독교가 사라졌다고 해도 불교도 신자가 많고, 힌두교도 신 10억이라느니 하면서 세력이 강할 거 같은데.
올림푸스 아스가르드는 솔직히 옛날이면 모를까, 요즘은 신앙으로서 믿는 경우가 거의 없잖아.
“지구 신 전체로 따지면 엄청 많지 않나요?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밀려요?”
“저희도 그것이 의문입니다. 저들은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지구의 대신들께서는 순식간에 지저에 봉인되셨지요.”
신은 기본적으로 불사라 봉인이 최선이라고 했나? 올림푸스-아스가르드 연합도 신을 죽이지는 못하고 봉인한 게 최선인가 보군.
근데 이들은 뭐지?
봉인 당했는데 왜 화신이야.
“근데 당신들은 뭐죠? 봉인당했는데 화신이라니.”
“그들이 시간을 되돌리는 건 알고 계신가요?”
“네, 지구인 전체를 돌리더군요.”
“한 세계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대이적(大異蹟)입니다. 겨우 올림푸스-아스가르드의 시간의 신만으로는 불가능하지요. 그들은 봉인된 신 중 시간의 권능이 있는 대신의 능력을 같이 착취합니다. 그러니 봉인에 틈이 생길 수 있었죠.”
“아하…….”
“그 틈을 타서 대신이 아바타를 형성할 수 있었죠. 저들의 눈을 피하는 데 집중을 두어 A급 반신밖에 되지는 않지만…… 이제 당신이 성공했으니 달라질 겁니다.”
서서 이야기를 듣던 나는 원탁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봉인된 대신의 아바타라.
지금이야 죄다 A급이지만 봉인을 풀면 SSS의 힘을 내는 건가.
이들과 협력하면 이 무한회귀하는 지구의 상태를 다시 되돌릴 수 있나?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희망이 생긴다.
“아바타는 얼마나 되죠?”
“저도 정확한 숫자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저들의 시간 역행을 따라가는 것 이외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SP를 모을 방도는 없어지지요. 그래서 성공률이 희박했던 영혼 각성자 프로젝트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01명을 선택해 그들에게 희망을 걸었죠. 다 실패한 줄 알았는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가면녀.
나만이 성공했다는 건가.
영혼 각성자 프로젝트, 결국 이거도 SP 벌려고 한 거였군.
진짜 기승전 SP구나.
“제가 왜 선택이 된 거죠?”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 김지호 님은 선택되신 게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김지호 님은 크로노스의 파편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저희가 굳이 권능을 쓰지 않아도 시간 역행이 가능하셨죠. 그래서 저희 측에서 따로 힘을 써도 되지 않아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접촉했습니다.”
공략집 내용 중 크로노스의 파편을 쥐라는 게 기억났다.
그가 크로노스의 파편을 얻은 덕분에 이 아바타 집단은 별 소모 없이 시간 역행이 가능했나 보군.
그녀는 담담히 말을 이어 간다.
“저희의 대의에 김지호 님은 흔쾌히 따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영혼계열로 각성시키기 위해 지식을 주입하고, 기억을 영혼계열로 각성하기 쉽도록 수정했습니다. 필요한 아이템도 다 준비해 두었지요.”
그럼 미래에서 왔던 선물 보따리, 상태창 2개도 다 이들이 준비한 건가?
이상하네. 아우렐리아, 로키가 넘겨준 거 아니었나……?
“로키는 당신들과 무슨 관계입니까.”
“로키라뇨? 아스가르드의 로키 말씀이십니까? 그야 당연히 저희의 주적이죠.”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영문을 몰라 하는 가면녀.
뭐야, 모르나?
어, 혹시……
“아우렐리아는 알아요?”
“그녀는 알죠. 저희의 협력자였습니다만……. 영혼 각성자 프로젝트에도 크게 일조하셨지요.”
아이고, 이것들.
당했네, 당했어.
“그녀가 로키인데요.”
“네?! 그게 무슨 소리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가면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다.
“아우렐리아가 로키라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데요.”
“본인이 직접 변하던데요. 당신네들 다 털린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럴 리가…….”
그런 그녀를 향해 내가 겪은 일을 말해 주었다.
천사화를 시키려는 올림푸스.
그걸 막고 무사히 승급하자 헤르메스가 나왔고, 아우렐리아 보고도 변하라고 했던 이야기를.
그래서 로키로 정체를 드러냈다고 하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가면녀.
처음에는 숨겨진 흑막처럼 등장하시더니 뭐냐, 저 태도는.
이것들 영 쓸모없는 거 아냐?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래서 프로젝트가 실패한 건가……. 다들 로키의 손에 들어가서…….”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제가 영혼 중개자 되니까 영혼 각성자들을 또 키워 보겠다고 지구인 전체를 시간 회귀 시킨 걸 보니.”
“그런가요? 없는 거죠? 하아아, 다행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가면녀.
그러더니 다시 태도를 바꾸어 나에게 말한다.
“로키 문제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기억이 돌아오진 않으셨나요?”
기억?
나에게 선물을 보냈던 중립진영의 김지호 말하는 건가? 케브리안에서 디아나 가지고 놀던?
그러고 보면 요상하기는 하네.
시간 역행 때 같이 딸려서 돌려보낸 거라면 결국 미래의 김지호가 나랑 동일 인물 아니야?
근데 딱히 기억 같은 건 안 돌아오는데.
“기억이요? 아뇨.”
“아직 기억의 봉인이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제가 권능을 써도 되겠습니까?”
“해 가는 건 아니죠?”
“해가 간다면 원형유지가 보호해 줄 겁니다.”
원형유지가 진짜 최곤 거 같아.
그녀의 설득에 난 알겠다고 했다. 그러자 내가 앉은 의자와 원탁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며 나에게로 빨려들어오는 빛.
머리가 상쾌해진 느낌이 들었다.
기분 좋네.
뭔가 마음이 복잡했는데 싹 쓸어 주는 느낌이다.
음.
기분이 좋아.
아주 좋아.
“돌아오셨습니까?”
“아뇨. 상쾌해지는데요?”
“어…… 이상하다. 다시 한번 해 보겠습니다.”
또다시 번쩍이는 빛.
머리가 시원하다.
근데 딱히 봉인된 기억이 풀린다?
이런 건 없는데.
그냥 나는 나지.
내가 멀뚱멀뚱 가면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몸을 움찔했다. 가면으로 얼굴은 안 보이지만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럴 수가…… 대체 뭐죠?”
“그걸 저한테 물어보셔도, 뭐…….”
“이런…… 이럴 순 없는데…….”
또다시 손톱을 깨물기 시작하는 가면녀.
쟤 왜 이렇게 얼빵해?
이 아바타 모임, 영 믿음이 안 가네.
그들의 비전을 듣고 괜찮으면 힘을 실어 주려고 했는데, 로키한테 사기당한 데다가 나온 가면녀도 좀 아마추어 같아.
이쪽이랑 손잡는 건 영 아닌가?
그때 그녀 옆 의자에서 똑같이 흰 가면을 쓴 사람이 불쑥 등장했다.
키가 크고 마른 가면의 남자.
스포츠형 머리에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는 확실히 얼빵녀에 비해 기세가 달랐다.
“……미카엘.”
“여전히 돌발 상황에서 대처를 못하는 건 여전하군.”
“으윽, 당신도 듣지 않았습니까? 아우렐리아가 로키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그는 기억도 없고요.”
“그가 우리 프로젝트에 참가한 시점을 생각해 봐라. 작년 11월 아닌가? 올해는 6월이지. 200번도 넘게 회귀가 된 상태다. 그의 기억이 수없이 많은 회귀 끝에 마모되었을 수도 있지.”
그런가? 7달 차이기는 하니까, 뭐.
아예 머릿속에 흔적도 없는 거 같긴 한데…….
“그의 기억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가 영혼 각성자가 되어 자기 발로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거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대에게 설득은 어울리지 않나 보군. 관세음보살의 아바타로 선택받았음에도…… 쯧. 부족해, 아주 부족해.”
헉, 불교의 관세음보살?
저 여자가?
불교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면서 읊는 건 안다.
그럼 엄청난 고위급 신 아니야?
근데 영 아바타가…… 상태가 메롱인데.
“정말 저분이 관세음보살의 화신인가요?”
“그래.”
“그러기엔 상태가 좀…….”
“신앙심이 깊은 인간 중에 선택받은 거라 어쩔 수가 없어. 좀 부족해도 네가 이해해라, 지호야.”
직접 화신이 되는 게 아닌가 보네.
근데 뭐야 이 사람. 뭔데 바로 말을 까?
게다가 지호야, 이러다니.
날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야?
“당신은 누군데?”
“흠…… 이런. 맞아, 가면을 쓰고 있었지. 나도 관세음보살 아바타를 타박할 게 아니군.”
그러면서 손을 가면에 가져가는 남자.
근데 뭔가 실루엣과 느낌이 익숙했다.
저 모습…… 어디서 봤는데……
“자, 이럼 알아보겠어?”
“아니…….”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중년의 얼굴.
내 기억 속보다 얼굴의 주름은 펴졌고 피부는 좋아졌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여기에……?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