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96화>
96 용신 드라키아, 복귀하다.
칼바인에 드라키나와 연관이 있다고?
바로 용신 드라키아가 떠올랐다.
헤라클레스에게서 붉은 보석을 받으니 익숙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용신 드라키아의 목소리.
[오랜만이군.]
“어떻게 된 겁니까?”
[토르가 작정하고 잡으려 하더군. 자폭하려고 하는데 혼돈의 군주가 개입해 날 봉인했다.]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드라키아.
‘웃는 얼굴의 악마’가 도와준 건가?
“칼바인은 파괴된 겁니까?”
[행성이 완파되지는 않았지만 문명은 멸절했지.]
“흠, 계속 출입이 안 되던데…….”
[그런가? 시간을 바로 되돌리면 될 것을, 이상하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 이 에슈타르처럼 망하면 그냥 다시 되돌리면 되잖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 그러고 보면 여기 혼돈의 군주가 있었지?
“들었어?”
“뭘 들어.”
“나한테만 들리나…… 그게 말이지.”
헤라클레스에게 내 의문점을 물어보니 그가 간단히 대답한다.
“그거야 당연하지. 우리는 일부 지역만 따로 시간을 되돌리고 있으니까.”
“일부 지역만?”
일부 지역만 되돌리는 거였다고?
아하…… 그런 거였나.
생각해 보면 케브리안에서는 요새에 있다가 요새 근처 지역에서만 왔다 갔다 했지.
그러고 1차 페이즈가 끝나니 2차로 이동해서 거기서 퀘스트가 진행되었고.
칼바인에서는 드래곤 레어에 있었지.
근데 원래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인데 째 버려서 이레귤러라고 판단, 드라키나를 죽이라고 퀘스트도 나왔었고 말이야.
에슈타르는 사람들이 이 에룬달과 주변 지역 던전만 계속 돌았지 다른 나라를 가던가 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
스테이지로 주어진 곳만 시간을 돌린 건가?
“그래, 지구로 따지면 드넓은 땅에서 그리스 지역만 시간 회귀를 한다고 보면 되지. 이 세계 전체를 되돌리기엔 SP 소모가 너무 심할 거다.”
헤라클레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다.
“애초에 그냥 바로 지구에 쳐들어가서 다 때려 부수면 되는데 다른 녀석들 욕심 때문에. 투표 결과 3:2로 부결되었지.”
“무슨 투표를 했는데?”
“올림푸스에서 제안이 들어왔었다. 너희가 말하는 부서진 세계, 여기서 나오는 SP를 반씩 나눠 가지자고 했다. 대신 우리는 지구 침공을 좀 유예하기로 했고.”
“뭐? SP를 나눠 가진다고?”
“그래, 웃는 얼굴의 악마가 제일 적극적으로 나섰지. 그 녀석, 올림푸스한테 분명 SP를 뇌물로 받았을 거야.”
웃는 얼굴의 악마.
칼바인에서 이상한 행보를 보였었는데…….
이레귤러인 상황을 그냥 지켜보겠다고 했지? 아스가르드의 시간 역전에 동의하지 않고.
“그놈 정체는 뭐야?”
“나도 몰라. 가면 쓰고 있어서.”
“니네 별로 안 친하구나?”
“친할 턱이 있겠냐. 우리 쪽은 이제 그만 물어봐라. 그래도 나름 혼돈의 군주인데 다 까발리면 안 되지.”
손을 휘휘 내젓는 헤라클레스.
쩝, 아쉽지만 여기까지군.
“그럼 나는 가 보도록 하지.”
“아, 근데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줄 수 있어?”
“……뭐냐.”
“A급 던전 한 개만 더 소환해 주라.”
“왜?”
“드라키나도 돌라고 하게.”
귀찮은 얼굴을 하던 헤라클레스가 드라키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순순히 승낙한다.
“용신의 후예를? 흐음, 그래라.”
생각보다 수월했네.
그가 땅에 손을 뻗자 남색 던전 포탈이 두 개 생겨난다.
“이제부턴 두 개씩 소환하도록 하지. 알아서 정리해라.”
그러더니 쑥 사라지는 헤라클레스.
그가 사라지자 용신이 다시 나에게 말을 건다.
[아스가르드에서 나를 계속 찾을 테니 던전으로 들어가자.]
“그러죠. 드라키나에게 따로 할 말은 없어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단칼에 자르는 드라키아.
역시 혈육에 대한 정은 찾아볼 수가 없단 말이야.
“알겠습니다. 드라키나, 넌 저기로 갈래?”
“아. 알았다.”
헤라클레스가 나왔을 때부터 얼어 있던 드라키나가 먼저 던전으로 사라지자 나도 그 옆에 있는 A급 던전에 들어섰다.
이번 던전은 사막 느낌의 필드였다.
당장 시야에 적이 안 보이니 용신과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간 겁니까?”
[후, 칼바인 파멸은 성공적이었지.]
드래곤들은 용신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다고 한다.
질서 진영, 중립 진영 할 거 없이 모든 곳에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유성우.
신성제국의 저력이 워낙 강력하여 처음에 신성 배리어로 저항했지만, 드래곤 하트까지 바쳐 가며 쓴 대마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완전히 멸망하는 건 보지 못하고 토르의 친위 발키리에게 추격당했지만. 그들에게 붙잡히기 전 자폭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나온 웃는 얼굴의 악마가 날 이 보석에 봉인시켰다.]
“그를 보셨습니까?”
[아니, 그저 ‘재미있겠는데?’ 하면서 봉인하더군.]
그 자식은 또 뭐하는 놈이야.
나는 A급 던전 안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대충 드라키아에게 말해 주었다.
[혼돈의 군주가 2030년에 무조건 강림한다고 그랬나?]
“네.”
[얼마 안 남았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헤라클레스가 그대를 좋게 생각한다는 거군. A급이 되기까지의 길이 단축된 건 아주 다행이야. 거기에 영혼 계열 클래스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면 다른 진영에서도 그대를 더욱 대우할 것이다.]
“그렇습니까?”
[지금의 영혼 중개자 능력만 봐도 대단한데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올림푸스도 아스가르드도 다들 그대를 영입하기 위해 안달이 날 것이다.]
확실히 레벨이 오르고 등급이 오를수록 결국 중요한 건 SP.
그 SP를 획기적으로 얻을 수 있는 스킬들을 가지고 있으니 가치가 있긴 하지.
사실 일반 각성자가 이렇게 적 혼돈의 군주를 만났으면 어떻게든 혼쭐을 냈을 거다. 근데 아스가르드 신들이 난 오히려 더 잘 대해 주라고 지시 내렸다며?
그런 거 보면 어느 정도는 막 나가도 될 거 같긴 해.
[그럼 그대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고 싶은가? 헤라클레스의 말대로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의 음모를 분쇄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협력하여 창조주로 만들 것인가?]
선택지가 여러 개긴 하구나.
제우스와 오딘의 시간 역전을 방해하거나 아니면 제우스 혹은 오딘 편을 들거나.
근데 굳이 그놈들 편은 들고 싶지는 않아.
믿을 수가 없단 말이야.
“뭐, 일단은 강해지면서 좀 상황을 지켜보려고 합니다. 지금은 신급에선 약해빠져서요. 대신의 공격 한 방에 죽던데요?”
[후후. 그래, 적어도 신위에는 올라가야 최소한의 생존이 가능하겠지.]
“근데 기본적으로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아요. 당한 것도 있기도 하고, 결국 그들이 창조주가 되면 지구 싹 정리할 거 같으니까요.”
[그럼 내가 좀 방해해 볼까?]
“방해요?”
[그래, 나에게 SP 지원을 조금만 해 주면 된다.]
그러며 10만 SP를 달라는 드라키아.
이제 소득도 늘었겠다, 아낌없이 거래창을 열어 투척했다.
그러자 보석에서 빛이 새어 나오더니 내 몸 크기만 한 작은 드래곤이 반투명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드라키아는 잠시 보석을 바라보다가 입으로 불길을 뿜었다.
보석이 새까맣게 타오르더니, ‘키에에에엑!’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걸 보고 코웃음을 쳤다.
[‘악마의 눈’을 숨겨 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는가?]
‘웃는 얼굴의 악마’가 숨겨 둔 건가?
역시 그냥 보내 주진 않는구나.
그러더니 다시 불길을 내뿜는 드라키아. 새까만 보석이 다시 붉은빛으로 돌아와 반짝반짝 빛났다.
[이제 정상적으로 거주할 수 있겠군. 그대, 내 각성 퍼센트가 얼마나 나오나?]
“이제 6%군요.”
[일단 20%까지 회복하기 전까지는 던전에 있어야겠군.]
“뭐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힘을 회복하면 케브리안으로 갈 거다.]
드래곤은 투명한 팔을 들어 땅바닥에 선을 죽죽 그었다.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의 주 수입원은 지구에서 나오는 SP다. 거기에 부수입으로 다섯 행성에서도 대신의 자리를 빼앗고 SP를 가져가고 있지.]
“그렇죠. 이걸 혼돈 애들과 반으로 나누는 거 아닙니까?”
[그래. 그대가 영혼 중개하는 내 SP 수치는 지금 어떻지?]
그의 말에 영혼 중개창을 보니 드라키아가 벌어오는 SP 수익이 소폭 줄어 있었다.
6, 7천 벌던 게 5천 수준이었으니까.
이게 영혼 중개 레벨이 6에서 7로 변하면 벌어오는 수익이 늘어야 했다. 스킬 레벨이 오르면 중개 가능 범위가 늘어나니까.
근데 스킬 레벨이 올랐음에도 예전보다 수익이 준 걸 보면, 원래에 비해 수익이 상당히 줄었음을 뜻했다.
“꽤 줄었네요.”
[칼바인 행성에서 오는 SP가 거의 없어진 상태다. 완전히 멸망해 가니 SP를 보내 줄 주체도 없는 거지. 다만 케브리안은 아직 건재한 편이다. 그대가 말하길 거기는 출입 금지라 했지?]
“네.”
[거기는 왜 출입 금지일까?]
“그러게요. 제압당한 엘프리안이 뭘 하나? 그녀는 영혼 중개로 꾸준히 SP 보내 주고 있습니다만.”
[엘프리안이 얌전히 SP 중개만 했으면 케브리안도 문을 열었겠지. 한데 부서진 세계를 아직 안 연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
그런가?
엘프리안은 사지 다 끊겨서 흙 인형 신센데.
그 상태에서도 뭘 할 수 있나?
하긴 SP를 모으다 보면 그거로 어떻게 힘을 회복했을지도 모르지…….
엘프리안과 영혼 중개 계약을 맺은 건 상당히 초창기니까 SP도 꽤 많을 거다.
대신급이 작정하고 튀면 잡기 힘든 건 용신이 증명한 사실이고.
거기에 용신은 칼바인에서 깽판을 쳤지만 엘프리안은 눈에 띄게 깽판 칠 거 같진 않아.
그녀가 뭔 짓을 하고 있어서 아직 케브리안을 오픈 안 한 건가?
[엘프리안, 아주 음흉한 년이지. 케브리안의 패권을 다투던 싸움에서 그녀의 교활한 계략에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뭔 수를 썼을 게 분명하다.]
그런가?
착해 보이던데…….
하긴 나야 사지 잘린 불쌍한 모습만 봤으니까.
[이번엔 그녀와 협력을 해야겠군. 내 힘이 회복하면 같이 가서 그녀를 설득하지. 그대가 중재하지 않으면 그녀는 나와 협력하지 않을 테니.]
“얼마나 원수였기에 그럽니까?”
[뭐, 그녀의 눈앞에서 그녀의 자식 여럿을 씹어 먹었을 뿐이다. 음흉하기 짝이 없는 그년이 비명을 지르는데 아주 속이 시원했지. 엘프 신은 혈육에 대한 정이 각별하더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드라키아.
하, 이 아저씨도 장난 아니란 말이야.
이거 데려가도 되는 거 맞아? 서로 사생결단 내는 거 아닌가?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니 드라키아가 머리를 흔들었다.
[자식을 먹은 일도 이미 수천 년 전의 일이다. 아무리 혈육의 정이 각별하다 한들 공과 사는 구별할 줄 알 거다.]
“뭐, 알겠습니다. 일단 20%까지 회복하시죠. 근데 어떻게 회복하실 겁니까?”
[두 번 정도 SP를 더 줄 수 있겠는가?]
두 번?
20만 SP……. 30만이 드는군.
뭐, 2일 치다. 투자해야지.
용신 각성 보상도 받아야 하니깐.
“가능합니다.”
[고맙다. 그럼 SP를 주고 난 이후엔 보석을 드라키나에게 건네주어라. 그녀의 피와 살이 필요하다. 던전에서 조금씩 뜯어먹지.]
딸의 몸을 먹어 회복하겠다고?
이 양반 참…….
확실히 선한 신 느낌은 아니다.
“드라키나 죽지는 않죠?”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취미는 없다네. 그녀는 내 회복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야.]
딸에 대한 정은 1도 느껴지지 않지만, 그가 그렇게 말하니 드라키나는 확실히 살려 둘 거란 느낌이 들었다.
이건 뭐 딸이라기보다는 예비 목숨이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부터 그렇게 하지요.”
[그래, 자네는 레벨 업에 전념하게. A급에 오르는 것이 중요하니까. 내가 저들을 방해하지.]
“그러죠.”
가볍게 A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드라키나에게 드라키아의 보석을 넘겨주었다.
그 보석을 받은 드라키나는 잠시 죽을상이더니, 애써 웃으며 용신을 모시겠다고 했다.
쩝, 적당히 뜯어먹혀라.
그렇게 A급 던전을 처리한 지 10번째.
드디어 고대하던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레벨 업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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