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91화>
91 영혼약탈자 헤라클레스 (2)
푸른 보석이 박힌 나무 지팡이를 짚고, 새하얀 로브를 입은 노인.
꽤 많은 양의 마나가 느껴졌다.
드래곤 하트를 지닌 나에 비하면 조족지혈이긴 하지만.
그는 지팡이를 들고 날 향해 뻗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엄청난 마나…… 네놈이 이 일을 저질렀는가.”
“하. 이 정도 마나로 저런 엄청난 짓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으음…….”
“전 마나핵 방위를 도우러 온 겁니다. 지금 사방에서 좀비들이 날뛰고 있어요. 쓰러진 사람들도 다 좀비가 되려 하고 있고요.”
“망했구나…… 어떻게 번영을 이룬 에룬달인데…… 단 한순간에…….”
“혼돈의 군주 홀로 서는 거신의 짓인데, 뭐 아는 거 있어요?”
내 말에 고개를 좌우로 젓는 노인.
오히려 나에게 반문한다.
“혼돈의 군주? 그게 뭔가. 갑자기 생겨난 던전 포탈과 연관이 있는 거요?”
“뭐 걔네들 보스라고 보시면 돼요. 마나핵은 어디 있죠?”
그러자 잠시 경계하던 노인은 곧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노인의 등 뒤에는 새하얀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 커다란 보라색 보석이 둥둥 떠 있었다.
저게 이 도시의 마나핵인가?
내 상체만한 크기라 들고 가기도 애매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들어온 입구만 틀어막으면 방어하기가 좋아보인다.
일단 여기서 방어하면서 경험치를 올려야지.
“제가 입구를 막겠습니다.”
“고맙소.”
화염전차에서 내려 입구에 선다.
입구가 사람 수십이 한 번에 통과할 정도로 넓은 편이라 방어하기가 애매하군.
이럴 땐 마법이지.
“벽을 만들어라.”
용언으로 명하자 바닥에서 새하얀 돌벽이 우르르 올라온다.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 구현되는 마법.
그럼 돌벽 위에 화염방사기 같은 것도 만들 수 있으려나?
음 화염방사기면 건물이 타오를 테니까 심플한 게 낫겠다.
“마나포를 생성하라.”
그러자 새하얀 마나로 이루어진 용의 머리가 성벽 위에 하나둘 씩 자리를 잡는다.
총 네 개가 생성되자 ‘6서클로 제한되어 4개까지 생성됩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아쉽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아니, 이게 무슨 마법…… 설마 용언입니까?”
“뭐, 그렇죠.”
“아아, 위대하신 존재께서 왜 질서 진영의 영역으로…….”
“위대하신 존재는 아니구요. 일단 저들부터 막죠.”
크르르르.
짙은 신음 소리와 함께 빠르게 달려오는 사람들.
일반적으로 좀비는 느리다는 인식과는 다르게 그 속도가 C급 헌터에 필적한다.
이 좀비들은 뭔가 강하다.
“아니, 좀비가 왜 이렇게 빠르지?!”
뒤의 마법사 노인도 당황한 채 소리친다.
그러면서도 마법 캐스팅을 잊지 않는다.
그는 뭐 알아서 할 테고, 나도 내가 할 일을 하자.
“뇌신.”
전력을 다해 벼락을 뿌린다.
그러자 내 손에서 퍼져 나가던 번개가 성 안을 완전히 뒤덮는다.
이 정도 위력이면 집중강화를 한 채 뇌신을 썼을 때와 비슷한 규모.
그 어아어마한 전격의 파도에 모든 좀비들이 단번에 휩쓸려 간다.
“역시 위대하신 존재시군요. 어마어마합니다!”
이미 나를 용으로 생각한 건지 존칭을 하며 찬양하는 노인네.
에휴. 오해 풀어 주기도 귀찮아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쾅!
전격이 멎자 마나포가 새하얀빛덩이를 날린다.
마치 레이저포처럼 날아가는 마나.
뇌신을 맞고도 부들거리던 몇몇 좀비들의 몸을 그대로 파괴했다.
오 자동공격인가?
쓸 만하네.
“으……으으.”
수백의 좀비를 제압하니 또다시 몰려오는 좀비.
옷차림이 기사와 병사도 있고 하인, 메이드도 있고 가지각색이다.
모두들 이성을 잃고 전력질주하기 시작한다.
“으으으!”
“여의.”
여의를 소환해 좌로 한번, 우로 한번 휘두른다.
푸른 검기에 수수깡처럼 부서져나가는 좀비들.
하나 반 토막난 상체와 하체가 각자 기어서 이쪽으로 움직여 온다.
징글맞네.
온갖 마법을 퍼부으니 좀비들이 뭉개져서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에 비례해 성이 부서지고 있었다.
“이거 성이 부서질 거 같네요.”
내 말에 깍듯이 대답하는 마법사.
“마나핵을 이용해서 바로 복구하겠습니다. 너무 강력한 공격이 아니면 복구가 가능합니다.”
“그럼 불태워도 되나요?”
“예…… 너무 강하게만 하지 말아주십시오. 복구가 힘들 시에는 말씀드리겠습니다.”
“타올라라.”
그가 가능하다고 하자 바로 불을 연상한다.
전방이 일기 시작하는 불길.
“화염전차. 가라.”
그와 동시에 화염전차를 전진시키자 좀비의 몸이 빠르게 타오르며 소멸한다.
불구덩이 속을 부나방처럼 계속 뛰어드는 좀비들.
모조리 타올라서 사라지고, 경험치과 SP를 적립해 준다.
“너……너무 강합니다.”
“예. 조절하죠.”
마법사가 우는 소리를 하면 불길을 조정하며 한 시간을 농성했을까.
[레벨업 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레벨 업 메시지가 떴다.
입구만 틀어막고 불만 지피면 되니 너무나도 편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보내니 마법사가 주저앉았다.
“헉……헉…… 죄송하지만 마나를 좀 회복해도 되겠습니까?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흠. 마나를 회복해라.”
용언으로 명하니 이제까지와는 다른 메시지가 떴다.
[타인에게 마나 회복은 8서클이어야 가능합니다.]
쳇. 안타깝군.
화염전차를 역 소환하고 불길을 잠재운다.
그러자 기회라는 듯이 뛰어오는 좀비들.
검으로 썰고 마나포를 쏜다.
불로 태울 때보다는 훨씬 죽이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에 반해 적의 수는 아까보다도 훨씬 많았다.
이제 마을에 있던 사람들도 몰려오는지, 옷차림이 아까와는 많이 달랐다.
이거 안 되겠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으으…….”
“그거 들고 하늘로 가면 안 돼요?”
“그럼 마법도시 에룬달의 기능은 완전히 멈춰버립니다!”
“지금 사람들 좀비돼서 망한 거나 다름없는데요. 마나핵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재건이라도 하지 않겠어요?”
내 말에 이를 악무는 마법사.
그러다가 내가 죽이고 있는 좀비의 얼굴을 보고 표정이 얼었다.
“레이첼…… 수도로 유학을 보낸 네가 어째서…….”
이 수많은 좀비들 가운데서 자기 지인을 찾다니 대단하네.
난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다.
그저 기계처럼 검을 휘두를 뿐.
하나 마법사는 그러지 않는지, 갑자기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위험합니다.”
“레이첼……레이첼이 맞아…… 끄으윽…… 내 자랑인 손녀가…….”
“더 앞으로 오지 마세요.”
내 말을 듣고 뒤로 물러서는 마법사.
입술을 악 문채 눈물을 흘리던 그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도시는 무너지고…… 가신도…… 손녀도 모두 죽고…… 살아 봤자 무엇하겠는가…… 성을 유지해 보았자 무엇하겠는가…….”
그러더니 마나핵 앞에서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하는 노마법사.
“언인스톨.”
언인스톨? 이거 설마……?
쿠르르르.
그가 마법을 사용하자 성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수많은 좀비 시체에도 끄떡없던 최상층의 바닥이 단번에 금이 가고 있었다.
툭,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마나핵은 제단 위에 떨어져 있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마나핵을 부탁드립니다…….”
완전히 생의 의지를 잃은 얼굴.
그는 풀린 눈으로 지팡이를 바닥에 떨구었다.
“라이트닝.”
손으로 전기를 불러일으키더니 가슴에 이를 대는 노마법사.
심장쪽이 지지지직 거리더니 풀썩 쓰러진다.
자살한 건가…….
마법도시가 완전히 망하고, 손녀도 좀비가 되니 삶의 의지를 잃었군.
그의 시체를 잠시 착잡하게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초기화될 거…… 너무 감정을 부여하지 말자.
이제 굳이 성을 지킬 필요는 없으니 마력핵을 들고 하늘로 튀어야겠어.
“타올라라.”
다시 불길을 일으키고 화염전차를 소환한다.
마력핵을 그대로 품에 안고 벽을 뚫어 하늘을 난다.
그렇게 나온 밖은 불사조가 장담했듯이, 불바다였다.
아까 보았던 성과 마을이 불타오르고 있었으며, 성으로 달려오던 좀비들은 하늘 위의 나를 보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사조의 공격에 하나둘 씩 소멸하는 좀비.
실컷 날면서 적을 학살하던 불사조가 음성을 보낸다.
[주인. 정말 마나가 넘쳐 나는군. 진짜 다 불태워도 되나?]
“그래 싹 다 불태워. 어차피 망했거든.”
[주인 친구가 잠들어 있는 길드지구는 놔뒀다만. 범위를 더 넓히려면 거기까지 불태워야 한다.]
“아 거긴 놔둬. 어차피 다 일로 몰려왔을 테니까.”
[알았다.]
약간 실망한 목소리.
이 녀석 완전 방화범 다됐네.
어쨌든 날 수 없는 좀비들을 향해 공중에서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펑펑 쓰기 시작했다.
폭격기가 중세시대에 뜨면 이럴까.
화살도 쏘지 못하고 그저 근접전만 가능한 좀비들이 지상에서 우어어 하면서 모두 죽어 가고 있었다.
몇몇 좀비들은 점프했지만, 아무리 강력한 좀비라고 해도 하늘까지 뛸 수는 없는 노릇.
그저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다가 그대로 불에 잠겼다.
[레벨업 하였습니다.]
그렇게 지상의 좀비들을 학살하니 레벨 업 메시지가 또다시 들렸다.
“으르르…….”
“우어어!”
길드지구 때문에 안태운 동네에서도 계속 좀비가 튀어나온다.
해가 질 때까지 불바다를 지속하니 또 오르는 레벨.
오늘 하루에만 3이나 오르는군.
165…… 참 좋은 숫자야.
상태창을 보고 레벨에 만족하고 있자니, 갑자기 좀비들이 움직임을 멎었다.
[잘 놀았나? 꽤 강하구나.]
하늘 저편에서 들리는 음성.
헤라클레스인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어느덧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 속에서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지상의 지옥도와는 달리 평온한 풍경.
[다음엔 나를 찾아와라. 영혼 약탈자여.]
그의 말이 끝나자, 온몸이 바싹 굳는다.
시뻘게진 세상.
몸은 움직이지 않는데 전신이 따갑다.
위험감지……!
으윽. 피해야 하는데!
몸이 꿈쩍도 안 한다.
대신 죽음의 위기를 감지한 듯 아이기스의 방패가 저절로 펼쳐진다.
[단천斷天.]
평온한 한마디.
하나 내 앞의 풍경은 이와는 완전히 상반되어 있었다.
눈앞의 하늘은 반으로 갈라져 있다.
하늘도, 태양도, 대지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세로로 뚝 나뉘어 있었다.
반으로 완전하게 갈라진 세상.
캉!
아이기스의 방패에 금이 간다.
세상을 반으로 가른 공격이지만 아이기스는 이를 든든히 막았다.
SS급 일격까지 막을 수 있다는 아이기스의 방패.
이 공격은 SS급인 건가?
내가 몸을 쓸 수 없음에도 꿋꿋하게 나를 지켜 줬다.
하지만…….
캉! 캉! 캉!
연속적으로 들리는 충돌음.
이에 발맞추어 방패에 새겨진 금이 한줄 한줄 늘어난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무형의 무언가와 수백 번을 부딪치더니 산산조각이 나는 아이기스의 방패.
눈앞에서 빛의 방패가 조각조각 나 사라진다.
그리고 머리가 살짝 따갑다 싶더니, 단번에 갈라지는 몸.
이상하게 고통은 없었다.
[사망하셨습니다.]
[사용자가 영혼 약탈자입니다. 영혼 약탈이 발동하지 않습니다.]
[본래의 세계로 귀환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런 메시지를 보며, 서서히 의식이 사라져 갔다.
눈을 떠보니 협회 최상층.
익숙한 풍경이다.
“하아…….”
살았다.
여기서 부활했다.
반으로 갈라졌던 머리를 만져 보았다.
무사하군.
“하하…… 저런 게 혼돈의 군주냐?”
나오자마자 웃음이 났다.
어디서 공격하는지도 몰랐는데 그냥 한 방에 죽었네.
그가 막상 공격하니까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케브리안 때 하데스가 엄청난 힘의 제약을 받고 있었던 거구나.
SS급 공격을 막을 수 있다던 아이기스의 방패도 결국 조각나 버렸지.
혼돈의 군주…….
대신 급에게 인간은 결국 상대가 안 되는 건가?
태양과 반딧불 같은 차이가 들어 잠시 절망스러웠다.
인간으로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이게 한계인가?
신에게 대항하는 건 필멸자로서 무리가 아닐까?
용신도 쥐꼬리만한 힘으로 행성 하나를 초토화시키고 있고, 헤라클레스는 한 번의 공격으로 세상을 갈랐다.
이런 대재해 같은 대신에게 어떻게 일개인간이 대항할 수 있을까?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 솟구친다.
과연 내가 가능할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겨우 던전 들어가서 살았네.”
“C급에서 레벨 진짜 안 올라.”
에슈타르가 멸망하기 전, 에슈타르 내 던전에 들어가서 무사히 산 사람들.
다들 삼삼오오 잡담을 떤다.
수준이 B급에 오르기는 멀어 보인다.
B급도 안 나오는데, A급은 나오긴 나올까…….
결국 내가 해야 한다.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그냥 포기하면 아까의 노마법사처럼 절망하다 자살하겠지.
헤라클레스가 만약 지구에 소환된다면, 좀비떼가 되는 건 지구인일 터.
그 꼴을 볼 수는 없다.
나는 아직 B급이다. 더 강해질 수 있어.
신들에게 한 방 먹이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겠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 또 다짐했다.
“그건 그렇고…….”
헤라클레스의 일격을 막으면 클리어한다는 에슈타르.
방패로 한 번 막는 건 카운트가 안 되나 보다.
후우우.
일단 B등급에서는 못 막을 거 같아.
몸이 마비가 되니…….
마비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단 A급이 되어야만 해.
그리고…… 강해져야 한다.
이렇게 1번의 공격에 죽지 않도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해져야 한다.
[다음에는 나를 찾아와라.]
헤라클레스의 말이 떠올랐다.
혼돈의 군주. 인류의 불구대천의 원수 혼돈세력의 수괴.
일반적이라면 그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빨리 왔군. 영혼 약탈자여.]
다시 입장한 에슈타르.
나는 헤라클레스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