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60화>
59. 세계수에 들어가다(3)
드라키아의 인장이라니.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일단 모르는 척을 해야 하나?
“드라키아라니요?”
[이곳에서는 비밀 유지가 되니 걱정 마세요. 상태창을 보셔도 아실 겁니다.]
오? 상태창을 보면 나온다고?
정말 보니까 수호신이 둘 다 ‘----’ 이렇게 되어 있었다.
이러면 수호신이 개입 불가능하구나.
“흠…… 그를 어떻게 아시죠?”
[저도 그와 같은 처지니까요.]
“같은 처지라구요? 그럼…….”
[제 이름은 엘프리안. 올림포스에게 패배하고 세계수에 봉인당해 일체화된 엘프의 신입니다.]
올림포스에 패배한 신이라고?
지하 공간에서 흙이 올라오더니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사지가 절단된 채 몸통과 얼굴만 만들어진다.
흙으로 빚어졌지만 미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얼굴. 다만 사지가 절단된 모양이 깔끔하지가 않아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그 모습은…….”
[제우스의 짓입니다. 사지가 절단된 채 제우스가 자신의 아이를 잉태할 때까지 절 범했지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낳은 아이는 그가 먹어 버렸습니다. 77명이나. 그 작은 핏덩이들을.]
담담하게 말하는 엘프리안.
하지만 그 내용은 역겹기 짝이 없었다.
뭔 질서의 신이 저런 짓거리를…….
[저의 신격을 떨어뜨리기 위한 수작이었지요. 거기에 제 신성을 물려받은 자식을 먹음으로써 자신의 신력을 올렸습니다. 제우스…… 악마 같은 자입니다. 신격이 떨어진 저는 이 세계에서 이름이 사라졌고, 엘프들이 숭배하던 신은 다른 신으로 대체되었지요. 드라키아처럼 말이죠.]
엘프들이 다른 신들을 믿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군.
그럼 우리가 지구에서 믿던 신들도 다 이런 과정으로 신격이 떨어져서 대체된 건가?
“저희 지구에서 주도적인 신은 원래 올림포스의 신들이 아니었는데요. 올림포스 신은 왜 그렇게까지 강한 거죠?”
[저도 모르겠습니다. 원래 그렇게 강한 이들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갑자기 확 강해지더군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제우스가 그렇게 강하다니.
으으. 천사로 만들려고 하는 것만 제외한다면 그냥 올림포스에 붙어 있는 게 제일 좋은 선택 아냐?
어차피 지구의 신인데.
물론 엘프리안한테 한 짓거리가 잔인무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제우스한테 덤빌 것도 아니고…….
그놈의 천사화가 문제야.
[제우스가 당신을 천사화하려고 한다고요? 왜죠? 아. 영혼 능력이 있군요…….]
이 신도 내 생각을 읽나.
신들은 독심술은 죄다 기본이네.
[신격이 아무리 떨어져도 신은 신. 거기에 여기는 제가 만든 공간이니까요. 제우스가 원하는 바를 알 것 같군요. 당신을 천사화한 후 복제하여 SP 수급을 끌어 올리려 하는군요.]
“복제요?”
[네. 당신 같은 영혼 계열의 천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가 얻는 SP가 올라가게 되겠죠. 천사의 고유 형질을 복제하려면 영혼까지 복제해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당신의 영혼은 영겁을 고통 속에 보낼 겁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사지가 잘린 채 아이 77명을 낳은 여신이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으으.
이 사람 말도 다 믿을 순 없지만 어쨌든 천사화는 아닌 거 같아.
“뭐 어떻게 피할 방법 없겠습니까? 천사는 되기 싫은데.”
[지금은 C급이군요. 승급을 하면 당신을 어떻게든 강제로 천사화하려고 할 겁니다. 제가 당신의 숨겨진 드래곤 하트에 저의 인장도 찍겠습니다. 저와 드라키아의 인장이 승급 때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인장이 들키진 않을까요? 당신도 알 정도인데.”
[저와 드라키아는 한때 케브리안을 두고 싸웠던 경쟁자이기에 알 뿐, 다른 신들은 알기 힘들 겁니다. 저의 인장도 드래곤 하트의 은폐를 도울 거고요.]
흠. 그래 드라키아의 인장도 있는데…… 찍어 준다니까 일단 받자.
[드래곤 하트에 잊힌 신, 엘프의 신 엘프리안의 인장이 찍힙니다.]
메시지 창이 뜨고 변화가 없자 난 다시 물었다.
“이거 다른 효과 같은 건 없나요?”
[다음 등급에 오르면 다른 능력으로 효과가 개화될 것입니다. 이제 시간이 없군요.]
그 전엔 그냥 인장인가.
시간이 없다는 말에 나는 공략집의 내용을 물어보았다.
“혹시 크로노스의 흔적이 세계수 안에 있나요?”
[크로노스요? 올림포스의 시간의 신…… 크로노스?]
의아한 듯이 중얼거리는 엘프리안.
어?
모르네?
세계수와 일체화되었다고 하더니.
혹시 또 공략집이 잘못된 정보를?
[크로노스의 흔적이라면 설마…… 제가 좀 알아보겠습니다. 일단 외부로 나가면 왜 끌려갔냐고 의아해 할 수 있으니 제가 적당한 축복을 드릴게요.]
[세계수의 강화된 축복을 받았습니다.]
[세계수의 권역 안에서 능력치가 50% 증가합니다.]
[세계수의 권역 안에서 신체의 재생력이 아주 크게 오릅니다.]
적당한 축복이 50% 증가라니 역시 신들은 통이 커.
세계수의 권역 안이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크게 도움이 될 거다.
[제가 크로노스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을 또 부르겠습니다. 등급이 오를 때를 가장 조심하시길…….]
그녀는 나를 걱정해 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세계수의 뿌리가 땅에서 나와 나의 몸을 감쌌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나의 몸.
“오셨다!”
전장에 복귀하니 나무뿌리가 사방에서 올라오며 우리 부대를 잘 케어해 주고 있었다.
흠흠. 세계수가 우리를 밀어주는군.
축복도 받았으니 힘내 볼까?
[폴룩스가 세계수의 축복을 받다니 특이하다고 합니다.]
끌고 가더니 주던데요?
그러자 대답이 없는 폴룩스.
흠…… 왜 침묵을 하는지 좀 걸리긴 하는데.
일단 적 앞이니 생각은 그만하고 일단 때려잡자.
“화염 전차 소환.”
전차 위에 올라타 사방으로 번개를 쏜다.
일단 강화된 언데드들 위주로 잡아 갔다.
나 혼자서는 커버가 불가능했지만, 세계수의 뿌리 덕에 전장은 유지가 되고 있었다.
“레벨 업 했다!”
“C급이 되니 적에게 공격이 통해!”
그래도 좀 고레벨 같던 애들이 금방금방 레벨 업해서 C급이 되자 슬쩍 전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해가 중천에 뜨자 언데드의 움직임도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고, 강화된 언데드들도 제압당했다.
하지만 슬슬 지치기 시작하는 각성자들.
“끝이 없어…….”
“레벨 업하는 건 좋은데…… 이거 지쳐 쓰러지겠다.”
온종일 싸움을 치러 본 적이 없는 각성자들.
처음에는 나름 체력 안배도 한다고 하더니, 강화 언데드가 나오고 나서 전력을 다하는 바람에 힘이 쭉 빠졌다.
그에 비해 지치지도 않고 계속 몰려오는 언데드 군단들.
언데드가 정말 지친다거나 그런 게 없으니까 최악이구나.
[주인. 밤이 되면 언데드는 더욱 강해진다. 벌써 각성자들이 지치면 힘들 텐데.]
“그러게.”
일단 각성자들이 교대로 나누어서 수비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뒷열에 예비대로 있던 부대랑 앞열을 바꿀 시간을 줘야겠군.
지구 대륙의 모양을 상징하는 유엔의 깃발이 펄럭이는 지휘부로 마차를 몰았다.
전장을 바라보면서 참여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지휘부 인원을 볼 수 있었다.
“부대 교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지쳐서 다들 쓰러지겠네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예비대랑 교체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제가 중간에 적을 좀 제압할 테니, 그동안 교체해 주세요.”
“예!”
예전보다 대답이 아주 씩씩하게 나오는구먼.
나는 바로 화염 전차를 전장으로 몰았다.
땅을 가득 메운 언데드들.
지금 1선에서 바로 맞붙은 언데드는 지구 각성자보고 처리하라고 하고, 뒤를 좀 끊어야겠다.
“파이어 월.”
불의 벽을 생성해 언데드들을 모조리 태우고.
“뇌신.”
번개로 대량 학살하며.
“여의.”
검을 적당히 확장시켜 뭉텅이로 적을 쓸어 버린다.
강화된 언데드도 그다지 반항하지 못하고 단번에 쓸려 나갔다.
이것저것 시도해 보니 가장 좋은 솔루션을 찾았다.
화염 전차로 쭉 달리면서 확장된 여의로 적을 쓸어 버리는 것.
여의를 언데드 쪽으로 뻗고, 화염 전차를 빠르게 달린다.
칠판지우개로 낙서를 지우듯이 한번 쓱 움직이니 적이 싹 다 타 버렸다.
[레벨 업하였습니다.]
부대가 교체될 때까지 계속해서 전장을 왔다 갔다 했다.
적이 쓸려 나가며 양팔과 어깨가 쑤셨지만, 무한 정력에 세계수의 축복으로 재생력이 늘어서 그런지 금방금방 회복되었다.
[레벨 업하였습니다.]
이러다 금방 100 되겠구먼?
이번에는 단번에 확 쓸어 버리지 않고 순찰하듯 왔다 갔다 하니 마나 소모도 적당했다.
적이 이런 놈들만 오면 그냥 계속 이러다가 끝날 수도 있겠어?
앞열 전사 라인이 교체가 되자 달리는 걸 멈췄다.
뭐 지금이 제일 적이 약할 때라니까 지구인들 레벨 업이나 좀 더 시키자.
C급은 되어야 쓸 만하겠어. 진짜.
[호오. 대체 축복이 몇 개입니까.]
갑자기 전장에 울려 퍼지는 경망스러운 목소리.
언데드들은 로봇이 배터리가 다한 듯이 우뚝 서서 멈춰 있었다.
이 목소리는…….
[처음 뵙겠습니다. 사령대제입니다.]
언데드 위의 먹구름에서 갑자기 커다랗게 사령대제의 얼굴이 홀로그램처럼 나타난다.
단안경에 짜증이 날 정도로 잘생긴 사령대제.
그는 화면 속에서 왼손으로 와인 잔을 들며 나에게 향했다.
[그쪽은 처음 보지만 참 인상적이로군요. 신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각성자라…… 미리 제압을 해야겠어요.]
처음 본다는 듯이 말하는 사령대제.
아우렐리아가 아니었으면 기억을 못 했을 테니, 저런 식으로 녀석도 연기를 하는 건가.
[죽어도 지구에 가서 또다시 기어 나올 테니까. 잡아 드리죠.]
그리고 그대로 술잔을 던지는 사령대제.
화면 속에서 던지는 거였지만 예감이 이상했다.
당장 화염 전차를 이끌어 부대 쪽으로 빠졌다.
술잔의 술이 화면 전체로 엎어지면서 액체가 전장에 튀어나온다.
그 크기는 하늘을 덮었는데 그대로 내가 있던 땅에 푹 하고 내려온다.
치이이이익.
땅에 닿자마자 멍하니 서 있던 해골과 좀비가 그대로 녹는다.
어우. 저걸로 날 잡겠다는 거야? 맞았으면 그대로 사망각이구먼.
젤리처럼 꾸물거리던 액체가 서서히 뭉쳐 하나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으. 저건 또 뭐야.
첫날은 좀 쉽게 쉽게 가지.
“뇌신!”
멀리서 번개 한 방을 쏜다. 하나 치지직 하면서 살짝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그대로 계속 뭉치는 걸 멈추지 않는다.
그러더니 번개가 날아갔던 방향 그대로 핏빛 액체가 푹 튀어나온다.
팔이 미친 듯이 따가우며 위험 감지가 발동된다.
금방 내 팔을 잡을 것 같은 액체.
못 막을 것 같아.
몸을 전차에서 날려 옆으로 피한다.
그러자 뒤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사…… 사람이 그대로 녹았어!”
뒤를 돌아보니 전장 한편에 자리하던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뭐야 엄청 센데?
액체가 계속 총알처럼 날아온다.
그래도 위험 감지 덕에 슉슉 피하면서, 어떻게든 번개를 갈겨 본다.
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집중 강화를 써야 하나?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그가 위험하다.]
[우리가 상대하겠다.]
[그를 지켜라.]
하늘에서 빛이 내리더니 천사들이 강림한다.
숫자는 무려 넷.
그들은 이제는 거대 슬라임처럼 뭉친 붉은 액체를 향해 일제히 날아가 빛의 검을 휘두른다.
붉은 액체는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천사들을 제압하려고 했으나, 그의 공격은 하나도 닿질 않는다.
빛이 번쩍하면 순간 이동을 하며 검을 휘두르고, 또 번쩍하면 공격을 피한다.
천사 넷이 빛의 검으로 난도질을 하자 금방 타오르며 해체되는 붉은 액체.
[우리는 언제나 그대를 보호할지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싸우거라.]
[우리와 함께하길 기대하지.]
천사들이 내게 덕담을 날리더니 또 빛이 껌뻑이며 사라진다.
그리고 나타나는 레벨 업 메시지.
무려 2렙이나 올랐다.
뇌신 좀 날리고 공격 좀 피했는데?
뭔가 꽁으로 레벨 업해서 이득이긴 한데…….
천사들이 진짜 케어해 주네.
나만…….
거기에 뭘 함께해.
그들의 케어에 괜히 등이 오싹해졌다.
진짜 천사화시키려는 게 확정이구먼.
[천사의 보호를 받다니. 참 대단하신 분이군요. 그죠? 다른 분들은 몇 명이 죽어도 신경도 안 쓰는데 클클클…….]
화면 속의 사령대제가 씩 웃었다.
[다음엔 제대로 준비해야겠군요. 또 봅시다. 각성자여.]
그리 말하더니 사라지는 사령대제.
그와 함께 언데드 군단의 진격이 재개되었다.
그렇게 3일 밤낮으로 전투를 치렀다.
적은 비슷한 규모로 계속 들이쳤다.
각성자들은 레벨이 올라 C급이 속출하고 점점 전력이 강해지는데 비해 언데드는 그대로.
이틀쯤 되자 내가 그다지 개입을 안 해도 위험한 상황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3일 밤낮이 지나자 지구에서 2만 명이 더 도착하고, 군의 사기는 최고조였다.
붉은 액체에 당해 죽은 사람들만 트라우마가 생겨 복귀를 못 한다는 게 옥의 티일 뿐.
아침이 되어 부대 교체를 위해 적을 쓸어 버리고 다시 돌아오니, 갑자기 땅에서 뿌리가 올라왔다.
뿌리가 내 발을 작게 감싸자, 음성이 들려왔다.
[김지호 각성자. 크로노스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