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태창 2개 - 57화>
56. 유엔에 가다(2)
대현 그룹의 전세기 안.
고급 비즈니스 호텔을 연상시키는 깔끔한 내부.
베이지색 소파에 앉아 있자니 강시아가 문서 파일을 들고 나타났다.
“저희 대현 그룹을 선택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선약은 지켜야죠.”
붉은색의 오피스룩 원피스를 입고 온 강시아.
그녀는 나를 보고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뭐 드실래요?”
“아이스커피도 되나요?”
“당연하죠.”
재벌집 딸내미가 직접 가져다준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같이 준 디저트를 먹었다.
아. 평화롭다.
케브리안에서 하도 뒤통수 맞는 사건이 많아서 원 피곤했지.
엘프들이 케브리안은 이번이 기회라고 하는데 이거도 뭔 수작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니까.
비행기 내부를 둘러보니 벽에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진짜 다른 사람도 모르나?
나는 강시아를 바라보며 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십자가가 비행기에도 있네요.”
“제우스 님의 상징요? 아버님이 제우스 님의 독실한 신자이셔서 걸어 놨어요.”
“그렇군요.”
흠. 확실히 모르는구나.
모르는 데다가 그 신앙이 제우스한테로 가네.
자기 믿는 신도가 많아지면 SP를 더 받거나 그런 것도 있는 거 아냐?
내가 이런 생각으로 머리를 굴려도 폴룩스나 아우렐리아는 별말이 없었다.
지금 폴룩스에게 아우렐리아가 생각을 숨겨 주고, 드래곤 하트가 나머지 둘에게서 또 숨겨 주는 건가.
뭐 이리 복잡해.
빨리 B급 되면 원형 유지 쫙 깔고 내 생각의 자유를 찾아야지.
“이번에 유엔에서 일이 마무리되면 케브리안 원정대가 전 세계적으로 꾸려질 거예요.”
“그렇죠. 뭐 통과가 안 될 확률도 있지 않겠어요?”
“지금 이 정도 진척을 보인 부서진 세계가 케브리안밖에 없어서요. 아마 통과 가능성이 높을 거라 봐요. 지호 씨의 역할이 더욱 막중해지겠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헌터 된 지 얼마나 됐다고 갑자기 세계의 희망이 된 꼴인데?
“앞으로 강시아 씨 일복이 터져 나가겠군요.”
“예…… 일단 드래곤과의 전투부터 정리할게요.”
그녀는 내 앞에서 서서 파일을 열었다.
“블랙 드래곤 아카르디안에 의해 죽은 사람 중, 독에 당해 죽은 사람들이 극심한 후유증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독으로 죽는 게 많이 고통스러웠나 보죠?”
“예. 저도 두 번 죽었는데 독이 너무 아팠어요. 드래곤 때문에 자살했을 때는 무력해서 다시 도전할 마음이 안 났는데 독은 몸 끝이 녹아내리는 게…… 세 번째 들어가는 데 겁나더라고요.”
그때가 기억나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 강시아.
세 번째로 들어온 것도 대단하다.
“세 번 죽은 사람도 많나요? 아예 케브리안에서 퇴출된?”
“네. 오백여 명 정도 돼요. 그렇게 죽고 죽어도 계속 도전한 거죠.”
“대단한 사람들이군요.”
“반면 사도 지휘대에 속한 사람 중 한 번 죽고 나서 전투 복귀 안 한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부대원 자리에서 방출하고 아까 같은 사람들을 부대에 넣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상벌은 확실해야죠.”
“그게 좋겠네요.”
한 번 죽고 다시 전장 복귀 안 한 사람들을 계속 사도 지휘대에 둘 수는 없지.
“아니면, 사도 지휘대에 실력자들로만 넣는 방법도 있어요.”
“실력자들요?”
“네. 지구의 진정한 정예들은 에슈타르에 있거든요. 미국의 데이비드도 C급에 올랐다고 하네요.”
호. C급이라.
일반 직업 C급은 얼마나 강한지 궁금해졌다.
“데이비드는 강하답니까?”
“예. C급이 되고 나서부터는 D급이 열 명 덤벼도 못 이긴다고 하네요. 레벨도 일, 이 정도밖에 차이 안 나는데.”
C등급이 세긴 세구나.
흠. 생각을 바꿨다.
물론 3번 죽고 참전한 사람들이 고맙긴 하지만, 무참히 쓸려 나가던 D등급 헌터들이 떠올랐다.
일단은 등급을 올리는 게 중요해.
고레벨 헌터들을 50명은 만들어야겠어.
“흠…… 만약에 유엔에서 전 세계 참전이 확정되면, D급의 고레벨부터 사도 지휘대에 넣겠습니다. C급이 되면 그다음 레벨에게 넘기고요. C급 숫자를 늘려야겠어요.”
“일단 등급을 올릴 생각이시군요.”
“예. 혼돈의 군주가 드래곤 급만 돼도 솔직히 다 전멸입니다. 저번에 보셨잖아요.”
사령대제는 하데스.
하데스면 제우스처럼 SSS급 대신일 거다.
거기에 5%로 힘이 제약된다고 한들 미친 듯이 세겠지.
“이게 위로 갈수록 등급 차이가 확연하게 나는 것 같아요. 어떻게든 C급으로 만들어야 그나마 희망이 있습니다.”
내 말에 블랙 드래곤이 떠올랐는지 강시아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솔직히 드래곤 급이면 D급이 만 명이든 십만 명이든 뭔 상관이겠어.
싹 다 쓸리겠지.
“저도 그 의견에는 동의하는데…… 상임 이사국들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네요.”
“네? 그들이 왜요?”
“지금까지는 강대국에서 추천한 사람들이 저희 부대에 들어왔거든요. 어떻게 보면 친정부 헌터들이죠. 근데 지호 씨 말대로면 정부 컨트롤을 거부하던 헌터들도 우르르 들어올 테니…….”
흠. 설마.
1년 후 세계 멸망의 위기라면서.
나라 지도자들이 그러겠어?
그것도 상임 이사국이 말이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실질적인 유엔의 핵심 기관으로 5개의 상임 이사국과 10개의 비상임 이사국으로 이루어진 기관.
상임 이사국이 안건을 동의하지 않으면 그 안건은 절대 통과가 되지 않기에, 실질적으로 유엔이 유명무실하게 된 데 일조한 조직이라고 한다, 던전이 열리고 엘프가 나온 이후에는 엘프 도우미까지 낀다고 했다.
“그래도 던전 문제 이외에는 절대 개입을 하지 않지만요.”
여성 엘프의 안내를 받으며 유엔 안으로 들어섰다.
“이건 포털 게이트 아닌가요?”
“네. 완벽한 보안을 위해서 임시로 마련된 차원 공간에서 회의를 진행합니다.”
그녀의 뒤를 따라 포탈에 들어서자 회의실이 나타났다.
중세 느낌의 원탁에 둘러싸 앉아 있는 각국의 지도자들.
수행원도 대동해서 그런지 거대한 원탁에는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티브이에서나 보던 정치인들이 있으니 신기하네.
“김지호 헌터님이 들어오십니다.”
“아…… 저 사람이 바로…….”
“영상의 주인공인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가 있지?”
수군거리는 사람들.
그중 티브이에 자주 보던 트람프나 페틴도 있었다.
“오. 환영합니다. 인류의 용사, 최초의 C등급 김지호 헌터.”
트람프 대통령이 일어나 과장스러운 박수로 날 맞이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원탁에서 일어나 일제히 기립 박수를 했다.
이거야 원.
이 장면은 사진 한 장 남겨 줘야 할 것 같은데.
“미국은 언제나 당신의 편입니다. 최고의 각성자여.”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구사하는 트람프.
통역 마법이라도 썼나 보다.
“러시아도 언제나 당신의 든든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중국도 당신을 지지합니다.”
다른 나라 지도자들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덕담을 쏟아 낸다.
그렇게 귀화 제의가 쏟아진다는데 여기서부터 입질 시작인 건가?
어쨌든 다들 웃는 낯으로 날 띄워 주니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리로 오시죠.”
엘프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는다.
내게 지정된 자리는 라이아나의 옆자리.
“안녕하세요. 김지호 헌터님.”
나를 보고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라이아나. 나도 마주 인사를 했다.
“예. 오랜만입니다. 진행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예. 일 차 안건…… 케브리안으로의 총동원령은 조금 전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내가 오기 전에 이미 하고 있었구먼?
“부서진 세계에서 가장 진척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저희가 강력히 추천했습니다. 지금처럼 에슈타르에 있다가는 아무 손도 못 쓰고 전멸할 게 뻔하니까요. 이제 곧 에슈타르 멸망의 시기가 다가오는데, 그때 헌터들을 총동원하자고 했습니다.”
“몰래 빠져나가진 않을까요?”
“유엔 안보리에서 최종 의결이 나면 저희가 케브리안 외의 문을 열지 않을 겁니다.”
라이아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와! 문을 안 열어 주면 그만이구나.
엘프들의 권한이 상당하네.
“그리고 두 번째 안건이…… 저희가 보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데요.”
“뭐죠?”
“김지호 님이 이끄는 케브리안 원정대, 사도 지휘대의 티오 문제입니다.”
“네?”
“그건 김지호 님이 결정할 문제 아닌가 싶은데, 상임 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가 서로 한 자리라도 더 차지하겠다고 다투더군요. 거기에 비상임 이사국인 일본과 인도, 호주도 끼고…….”
“흠. 그러니까 제 사도 지휘대 천 명 자리를 가지고 싸우는 건가요?”
뭐 맡겨 놨냐?
지들 멋대로 싸우고 있어.
나는 황당한 마음에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미국은 기존 티오 이상을 원합니다. 미합중국은 넓고 지켜야 할 땅은 많소. 강력한 헌터들이 필요합니다.”
“그건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연구 결과 인구 비례로 던전이 많이 생겨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인구에 비례해서 티오를 나누는 게 맞습니다.”
“유럽 연합은 안타깝게도 김지호 헌터와 초반에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구와 땅 크기에 비해 너무 배정 인원이 적습니다. 저희야말로 인원이 더 필요합니다.”
“러시아야말로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넓습니다. 저희야말로 인원이 더 추가되어야 마땅합니다.”
자기들끼리 소리치면서 한자리라도 더 가져가겠다고 싸우는 사람들.
각국의 최고 지도자와 수행원들이 서로 삿대질을 하며 한 자리라도 더 가져가기 위해 싸운다.
누가 준다고 했나?
뭐, 그래.
웬만한 상황이면 나도 그냥 강대국들에게 적당히 대가 받고 자리 나눠 주겠다.
뭐 부대야 어차피 경험치 늘리려고 사람들 받는 거니까.
하지만 인류 멸망의 위기라며?
이제 슬슬 똥줄 타는 시점 아닌가?
“잠시 멈추시죠.”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조용해지는 원탁.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된다.
“여러분 중 블랙 드래곤과 원정대가 싸운 영상 못 보신 분 있습니까?”
좌중에 침묵이 감돈다.
다 봤겠지.
“D급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블랙 드래곤이 이성을 잃지 않았으면 저희는 손도 써 보지 못하고 전멸했을 겁니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으신 분 있습니까?”
갑자기 원탁에서 한 명이 손을 든다.
자기 혼자 원탁의 기사인 양 갑옷을 입고 등에는 검을 찬 남자.
얼굴은 엘프 남자처럼 기생오라비같이 재수 없게 생겼다.
금발에 푸른 눈도 똑같군.
뭐야 저놈은?
“그 영상은 조작된 거 아닌가?”
“영상이 조작이라고요?”
“그래. 나도 C급이다.”
말을 까길래 같이 까 주었다.
“당신이 데이비드인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나도 C급이기에 알 수 있다. 그 영상은 말이 안 된다. 나는 일단 진위부터 검증해야 한다고 본다.”
“진위…… 그래. 어떻게 검증할 건데?”
그러자 나에게 검을 빼 든 데이비드.
“내가 널 상대하지.”
아오. 별놈이 다 깝죽거리네.
폼은 뭐 이리 잡아.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뻗었다.
“뇌신.”
손가락에서 번개가 뻗어 나가며 데이비드를 직격한다.
녀석은 내가 손가락을 뻗자 뭔 공격을 할 거라 생각했는지 검에서 마나 블레이드를 끌어 올렸지만, 검은 단숨에 부러졌다.
“으아아악!”
그리고 곧 푸른 뇌전에 전신이 감전되어 쓰러지는 데이비드.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자리를 피한다.
이거 원 적당히 안 죽이게 힘 조절 하는 게 더 힘들군.
“저 녀석 그래도 죽지는 않게 해 주시죠.”
여성 엘프가 표정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데이비드에게 다가간다.
“영상은 사실입니다, 여러분. 라이아나 님. 데이비드가 몇이 덤벼야 제가 제압될까요?”
“제우스의 번개를 물려받은 지호 님을요? 만 명이 달려들어도 힘들지 않을까요?”
“예. 그런 저도 드래곤에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라이아나가 제우스의 번개를 받았다고 하자 회의장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온다.
아. 그러고 보니 제우스는 십자가를 대신했지.
“혼돈의 군주가 과연 드래곤보다 약할까요? 중간에 이성을 잃은 드래곤에 비해 훨씬 강하면 강하겠죠. 그런 이들에겐 D급 따윈 십만 명이 몰려가도 소용없습니다.”
“크으음…….”
“저도 여러분과 합심하면 좋습니다. 강대국의 비호를 받으면서 수백, 수천억의 돈을 후원받고 배 두들기며 편하게 노후를 즐길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도 일단 세계가 유지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손에서 뇌신을 더 뻗친다.
사방을 퍼져 나가는 번개.
거대한 원탁이 어느새 전기의 막으로 감싸인다.
그것을 보고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
“제우스 님의 번개…….”
“신의 사도를 몰라뵙고 우리가 배덕자가 되다니…….”
참 나.
신앙이 바뀌어서 쓸 만한 점도 있네.
기독교 국가였던 나라에서는 제우스 권능이 먹히네.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러분이 할 일은 지금 당장 각 나라의 고레벨 헌터를 저에게 보내는 겁니다. 지금 당장.”